1. 어릴 적, 나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태권 V가 되고 싶다는 짝꿍 경수나, 선생님이 되겠다는 친구 희철이보다 훨씬 소박한 꿈이었다. 나는, 학교 앞 분식집의 떡볶이 아저씨가 되고 싶었다. 그것은, 나의 소중한 꿈이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빨간색 떡볶이, 그 떡볶이 사이에 감초처럼 끼여진 오뎅, 그리고 바삭한 튀김들... 어렸던 시절, 나는 어른이 된 후에는 그런 음식들에 둘러싸여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런 내 꿈을 비웃듯이 짓밟은 것은, 하늘색 방울달린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던 말괄량이 반장이었다. 남자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던 화통한 성격의 여반장과는 달리, 나는 여자아이들 사이에 끼여서 공기 놀이 하는 것을 즐기는 소심한 성격의 회장이었다. 그렇게 정반대의 성격과 기질을 가지고 있던 반장과 내가 친한 사이였던 것은, 아이들 사이에서도 종종 화제가 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로 손꼽히던 반장과 나의 관계는, 어느 날 방과 후에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나중에 커서 호랑이 검사가 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반장에게, 나는 수줍게 웃으며 나의 꿈을 고백했다. 내 말을 들은 반장은, 나를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꿈 속에서 살고 있구나.” 그 순간, 나의 순수한 동심은 처참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입을 내밀고 교실을 뛰쳐나온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런 나의 슬픔은, 그 후 반장의 말이 진실로 드러남으로써 더욱더 깊어지고 말았다. ...나는, 떡볶이는커녕, 김밥도 제대로 말지 못하는 요리치였던 것이다. ...이럴 수가... 차라리 아줌마를 고용해 떡볶이 장사를 할까, 하는 생각에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지만, 그러기에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나의 첫 번째 꿈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렸고, 나는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 반장과 절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지금, 17세가 된 나는 아무런 꿈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지각이었다. 이대로 뛰어가도 제시간에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시간은 촉박했다. ...어떻게 할까. 차라리 쌈박하게 지각을 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오늘은 입학식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저번 소집일 날도 늦잠을 자 결석을 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오늘도 지각을 하게 되면, 나는 1학년 처음부터 선생님들에게 찍히는 불행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히, 주머니에는 아버지가 쥐어주신 1000원짜리 지폐가 몇 장 들어있었다. 이 돈이면 택시를 탈 수도 있다.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택시에 편안히 앉아 가는 것이 속 편한 일이다. 나는, 건널목에 택시 2,3대가 멈춰 서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였다. 초조하게 신호등이 바뀌는 것만 기다리다가,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건널목을 건넌 후, 서둘러 제일 앞에 있는 택시의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K 고등학교로 가 주세요.” 나는 급하게 말하면서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에서 꾸깃꾸깃한 1000원짜리 지폐를 꺼내 손에 쥐자, 비로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 나는 택시비로 내야 하는 지폐를 매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의 낭비는 딱 질색이다. 하지만, 낭비를 피하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더욱 질색이다. 앞으로 펼쳐질, 어쩔 수 없는 악순환의 반복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나는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다시 한 번 말했다. “K 고등학교요.” 내 말에,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던 택시 기사가 고개를 까딱했다. “어, 그래.” 얼떨떨하게 말을 하며 택시를 출발시키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사람은 택시 영업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택시 기사는 택시를 몰면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내가 K고등학교로 가는 게 아니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니?” 나는, 티꺼운 눈으로 택시 기사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손님에게 친한 척 구는 다수의 직업인들을, 나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예약이 있었나요?” 혹시 이 택시, 콜택시였나 싶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 말에 택시 기사는 낮은 웃음을 터뜨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래도...난, 처음에 네가 강도인 줄만 알았어. 얼마나 놀랬는 줄 아냐?“ ...이 쯤에서 나는, 무언가 대화가 엇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랫 동안 틀린 적 없는 나의 예감이 빛을 발하면서 경고음을 울린다. 나는, 우선 침착하게 택시 안을 둘러보았다. 아기자기한 소품으로 꾸며진 택시 내부를 살피고, 운전석에 붙어 있어야 할 요금표시기가 없다는 것에 절망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택시 기사라 생각했던 젊은 남자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젠장이다. 나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질문했다. “이 차...택시 아니었나요?” “...아닌데...” 남자는, 아주 잠깐 놀란 얼굴을 하더니 분명하게 대꾸했다. 나는 욕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싱긋 미소지었다. “죄송합니다, 뒤의 택시와 착각을 했어요.” 남자는, 잠시 후 비실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연신 쿡쿡대며 웃다가, 남자는 내 쪽을 휙 돌아보았다. “야, 내 차가 택시처럼 보이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아까 지었던 미소를 다시 한 번 지어보였을 뿐이다. 남자는 그런 나를 보며 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남자를 무시하고 차 창문에 달라붙었다. 이제 학교에도 거의 다 왔으니, 이 쯤에서 내려달라고 하자. 오늘은, 시작부터 좋지 않은 날이었다. “저는 이만 내리겠습니다. 태워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인사를 하면서 남자를 바라보는데도, 남자는 차를 세울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여유있게 차를 운전하면서, 남자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못 보던 얼굴인데, 이번 신입생이냐?” “...선생님이십니까?” 불길한, 아주 더러운 기분이 든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반이지?” 나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정직하게 반을 알려줄까, 아니면 입 쓱싹 닦고 이대로 도망칠까 고민이 됐기 때문이다. 교문 안으로 들어간 남자가 천천히 차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나는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몇 반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어이, 야, 너~!” 하는 식의 고함 소리는 무시해 버리기로 했다. 걸음을 빨리하여 들어오는 학생들 사이에 숨으면서, 나는 오늘의 창피한 기억을 내 인생에서 삭제해 버리기로 결심했다. “...네가 54번?” 나보다 팔뚝 하나 만큼은 더 큰 것처럼 보이는 커다란 덩치의 남학생은, 상당히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동시에 교실 안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웅성거리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내 짝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덩치의 남학생을 보며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54번.” 나를 가리키며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자, 내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녀석들까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내 앞자리라면, 나보다 앞 번호 녀석들일텐데도, 앉은 키만으로도 충분히 큰 키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덩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래서야 칠판 필기를 제대로 할 수나 있을까. 의심쩍어하면서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다. 내 짝은, 그런 나를 가늘게 찢어진 눈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내가 54번이라는 것이 무척이나 의심스러운 듯한 표정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왜 54번인지 일일이 설명해 줄 정도로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가 54번이 된 이유가, 너희들보다 키가 커서가 아니라 소집일 날 결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일이 말해 주기에는 심신이 너무 피로하다. 나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손으로 턱을 짚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54번이 되어서 좋은 이유는 이것 하나다. 제일 끝 자리, 창문가에 앉게 되었다는 것 말이다.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담임은, 키 순대로 번호를 매긴 모양으로, 번호 순대로 자리에 앉은 아이들은 모두 가지런하게 정렬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만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나는, 반쯤 졸다가, 급기야는 책상에 고개를 처 박았다. 그 때, 옆에서 나를 툭툭 건드리는 손이 느껴졌다. “담임 왔어.” 나는 하품을 억지로 참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과연, 시끄럽던 교실은 어느새 조용해져 있었고, 교탁 앞에는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저 할아버지가, 이번 담임 선생님인가. “다시 봐서 반갑다. 다들 내 이름은 알고 있지?“ 선생님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소집일 날 내 소개를 했으니, 오늘은 시간표만 말하고, 청소한 후 집에 가는 걸로 하자.” 할아버지 선생님이 허허거리며 하는 말에, 여기저기서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나 역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마음이 즐거워졌다. “그런데, 거기 학생. 못 본 얼굴 같은데...왜 거기 앉았지?“ 할아버지 선생님은 고개를 앞으로 내밀면서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동시에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해 돌려진다.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것을, 나는 상당히 싫어했다.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가 좋지 않은 것일 때에는 더욱 그렇다. “54번입니다. 소집일 날 안 와서요.” 나는 떨떠름하게, 그리고 최대한 책 잡히지 않을 정도로 예의바르게 대답했다. 내 말에 할아버지 선생님은 손뼉을 소리나게 쳤다. “아, 그럼 학생이 바로...” “이 은성입니다.” 머뭇거리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지 뒷말을 우물거리는 선생님에게 재빨리 대답했다. 선생님은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학생이 이번 신입생 차석으로 입학했지.” 이 쯤에서, 나는 내 불행의 기운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어. ...하지만, 설마... “허허, 학생이 이번 임시 반장을 해 주면 되겠군.” ...역시나다. 중학교 3년간 학급 임원을 했던 지긋지긋한 과거가 떠오른다. 동시에 초등학교 6년간 임원을 했던 불행한 과거가 연속타로 생각난다. ...설마 이번 고등학교 3년도... “그럼 반장, 일어나서 인사하도록.” 아아, 정말 싫다. 왜 내가 반장이 되어야 하는 거지? 대체 왜...? 속으로 절규를 하면서도, 인사하도록, 이라는 말에 익숙한 내 몸은 차분하게 일어나 구령을 붙여 “선생님께 경례!” 라는 말을 외치고 있었다. 이 지긋지긋한 노예근성...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의미가 다를지도 모르지만... 에휴, 하고 자리에 앉다가, 나를 바라보는 몇몇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마주쳤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곧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앞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나는 꾸물거리며 선생님이 불러주는 시간표를 받아 적었다. 가을은 아니지만,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고, 그리고 나는... ...졸려 죽겠는 날씨다. 아직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교실 안에는 히터가 틀어져 있었다. 덕분에 뒤에 달려 있는 히터를 정면으로 받고 있는 나는 따뜻하다 못해 더울 지경이었다. 나는 후아암, 하고 터져나오는 하품을 참다가, 결국은 반쯤 눈을 감고 볼펜을 끄적거렸다. “그럼 반장은 청소 후에 와서 검사 맡도록. 반장, 인사 해라.” 어서 교실을 나가고 싶으신지, 갖고 온 출석부를 옆에 끼고 나를 재촉하는 선생님에게 인사를 한 후, 늘어지듯이 자리에 앉았다. ...이대로 한 시간만 자면 소원이 없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청소라는 과업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나를 재촉하듯 바라보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품을 참으며 교탁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금부터 청소 시작한다. 다들, 일찍 집에 갔으면 좋겠지? 그럼 조용히 하고, 내가 구역 정해 줄 테니까, 각자 맡은 곳만 빨리 하고 끝내자.“ 다년간 단련해 온 노하우로, 아이들을 향해 또박또박 말한 후, 몸을 돌려 칠판에 번호 순대로 각각 청소해야 할 구역을 적어 놓았다. “자, 주목. 여기 칠판에 쓰여진 대로 청소를 한 후, 거기 너.“ 나는 손가락으로 내 짝을 가리켰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짝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되면 53번, 그러니까...” “정 이훈.” 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짧게 말했다. 왠지, 짝이라는 녀석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자꾸 든다. “그래, 정 이훈에게 말해. 그리고, 정 이훈, 너는 아이들이 청소를 끝내면 나에게 연락 좀 해줘.“ 나는 칠판에 내 핸드폰 번호를 갈겨 썼다. 마지막으로 조용해진 아이들을 둘러 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그럼, 청소 빨리 끝내자.” 멍하니 나를 보는 아이들을 무시하고, 교실 문을 열고 나왔다. 그래도, 이번에 나와 같은 반인 아이들은 순진한 것 같아서 안심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작년의 같은 반 녀석들이었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 것이다. 반장, 너는 청소 안하고 어디로 도망가는 거야? 라고 외치면서 나를 잡으러 뛰어다녔겠지. 후후,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올라와서 딱 하나 좋은 일이 생긴 셈이군. 나는 이번에는 숨기지 않고 하품을 하면서 한 숨 잘 곳을 참아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잠이 덜 깬 목소리로 핸드폰을 열고 말하자, 핸드폰 너머의 상대는 잠시동안 침묵했다. “이 은성...?” 미심쩍어하는 목소리에, 끄덕임으로 대답해 주다가, 상대편에게 내 모습이 보일리 없다는 것에 뒤늦게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요?” “...청소, 끝났다.” ...청소라...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나가던 학생들 몇몇이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의자에 누워서 자는 학생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렇게 유심히 보는지 모를 일이다. 뭐, 유난히 왕성한 호기심을 가진 학생들을 굳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갈게.” 던지듯이 말하고 통화를 끊었다. 얼핏 보았던 핸드폰 시계는 11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까 종례가 끝난 것이 10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으니... ...거진 1시간이 넘게 청소를 한 셈이다. 역시나, 이번에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학생들이 있는 반에 들어간 모양이다. 이 상태로 1년을 지낸다면, 그건 나름대로 편하고 즐거운 일이겠는걸. 나는, 태평하게 생각하면서 반으로 향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내 생각이 모두 성급한 낙관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우울함에 젖어들어야만 했다. “너만 청소하면 우리 반 청소는 끝이다.” 그 녀석,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나의 짝은 내게 걸레를 내밀면서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잠시 침울한 표정으로 걸레를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레, 작년의 반 아이들이 떠오른다. 그 녀석들도 이랬지. 내가 청소를 할 때까지, 모두 집에 안 가겠다고 버텼었다. 정말, 지긋지긋한 놈들이었다. 그래, 작년 같은 반 녀석들은 내 인생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놈들이다. “어서 해라. 그래야 집에 가지.” 나는 눈을 의심하면서 내 어깨에 친한 척 손을 올리는 녀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눈 앞의 상대는 변함이 없다. “...너도, 이 반이었냐?” 불안감을 담아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해 보았다. 그러자, 작년 같은 반이었던 박 영훈은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너 또 잊어먹었냐? 나는 5반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기억할래?“ 한숨까지 내쉬며 말하는 영훈의 뒤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나타났다. “야, 포기해라. 그래도 너는 얼굴 마주대고서, 누구세요?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은 없잖아?“ 도연은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말했다. 그러자 민섭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끼어들었다. “너희들은 그나마 양반이다. ...너네는, 길거리에 버려지고 간 적은 없잖아?“ 민섭의 말에, 도연과 영훈은 불쌍하다는 듯 민섭을 바라보았다. 민섭의 저 말은, 나의 사소한 실수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몇 달 전, 비가 오는 날이었다. 나는, 그 날 따라 더욱 피곤해하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비가 와서인지, 또는 자정이 되어 가는 시간 때문인지, 내가 탄 전철 안에 사람들이 몇 몇 없었기에, 나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잔다는 행위에 열중할 수 있었다. 그래, 민섭이 핸드폰으로 전화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여보세요...” 귀찮아하며 전화를 받자, 민섭은 대뜸 내게 묻기부터 했다. “너, 지금 어디야?” “응?” 졸린 눈을 깜박이며, 나는 잠결에 내가 어디에 있는지 술술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시간도 늦었으니까, 내가 마중나가줄게. 지금 역으로 나가고 있으니까, 출구 앞에서 꼭 기다려라.“ 그 말에, 내가 대답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직까지 그 사실 여부에 대해,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우기고, 민섭은 대답을 했다고 우기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민섭은 우산을 쓰고 역까지 나를 마중나왔으며, 나는 그 사이에 꾸벅꾸벅 졸면서 택시를 집어타고 집으로 가 버렸다. 집에 도착한 후, 핸드폰을 던져 버리고 잠이 든 덕택에, 민섭은 새벽 2시까지 내가 나오기만을 전철 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길래, 누가 그런 미련한 짓을 하랬냐고 말하다가, 민섭과 영훈, 도연에게 된통 얻어맞을 뻔했다. 민섭은 아직까지 그 사건에 대해 내게 한을 품고 있었는데, 그건 지금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귀기서린 민섭의 눈동자만 봐도 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어쨌든, 청소해라.” 영훈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선언하듯이 말했다. 잠깐, 내가 왜 청소를...?! 게다가, 너는 우리 반도 아니잖아? 나는 간절하게 우리 반 녀석들을 둘러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같은 반 학우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려지더니,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의 시선을 피해버린다. 도연이 내 옆에서 깔깔거리며 말한다. “벌써,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말했다. 네가 어떤 녀석인지. 그러니 땡땡이 칠 생각하지 말고, 어서 청소나 하시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나. 나는 조용히 분노하면서 나와 친구라고 우기는, 웬수같은 녀석들을 노려보았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손을 툭 쳤다. “자, 어서 해.” 차갑게 말하는 그 사람은 나의 짝이었다. 일진이 너무 안 좋다. 나는 더러운 걸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결심을 굳혔다. “잠깐만, 화장실 좀 갔다 올게.” 이대로 반 아이들을 다정다감하게 설득할 수도 있지만, 불행히도 그건,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저 세 명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은 방법이었다. 차라리 이럴 때는 담임 선생님에게 가서 청소를 다 했다고 말한 후, 집으로 튀는 것이 낫다. “아니, 청소 먼저 하고 가.” 내 옷을 탁 잡아채면서 말하는 영훈을, 나는 잠시간 노려보았다. 영훈은 끄떡도 하지 않고 유들유들한 얼굴로 내 시선을 받아내었다. 정말이지, 할 일도 더럽게 없는 놈들이다. 나는, 또다시 우울해졌다. 왜 이녀석들은 남의 반까지 와서 행패를 부리는 걸까? “너희들은 다른 반이잖아? 그런데 이렇게 남의 반에 막 들어와도 되는 거냐?“ 일단 우리 반을 보호해야 할 반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물어 보았다. 내 말에 도연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래서?” 조용히 되묻는 건 영훈이었다. 나는, 영훈과 민섭, 그리고 도연의 얼굴을 둘러보고, 내 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시선에는 모두, ‘저 녀석이 청소를 하는 꼴을 반드시 보고 말겠어~! ’ 라는 강한 의지가 서려 있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짝은 내 손에 걸레를 떨어뜨리듯 주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짝 녀석은 걸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온다. 나는 필사적으로, 교무실이 있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설마 내가 도망칠 줄은 몰랐다는 듯, 뒤늦게 “잡아~!” “너 죽었어!” 라는 식의 고함이 교실 안에서 터져나온다. 나를 따라 뛰는 거센 발걸음을 들으며,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잡히지 않고 아슬아슬하게 교무실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다행히, 담임 선생님은 문에서 가까운 자리에 놓여진 책상 앞에 앉아 계셨다. “선생님...” 헉헉대는 숨을 고르며 말하자, 할아버지 선생님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여전히 내 이름을 알지 못하시는 것 같아 예의바르게 말씀드렸다. “반장입니다. 청소 다 끝났습니다.“ 선생님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창문도 다 닦고?“ 나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창문을 닦았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성실한 우리 반 학우들이 맡은 바 임무를 잘 해냈으리라고 믿고 있다. “허허, 그럼 이만 집에 가 보라고 말해라. 반장이 알아서 잘 했겠지.“ 선생님은 인자하게 말씀하신 후, 신문에 있는 오늘의 운세란을 들여다보셨다. 역시, 아까 내가 생각했던 대로 반에 별반 관심이 없으신 선생님 같아 다행이다. 나는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교무실 문 앞에는, 역시나 기세 등등한 표정을 한 아이들이 나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최대한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께 청소 다 했다고 말씀드렸어. 자, 이제 집에 가자.“ 그 말에 우리 반 아이 몇몇이 멍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게 몸을 움직였다. “그럼 내일 봐.” “가긴 어딜 가? 너는, 오늘 청소 하기 전까지는 못 가.“ 단호한 영훈의 말에 아이들은 다시 눈을 형형히 빛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철천지 원수 보듯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에, 나는 다소 민망해지면서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대체 이것들이 청소에 목숨을 걸었나,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 나라면, 누가 청소를 하던 말던 상관하지 않고 그냥 집으로 뛰어가고 말겠다. 2. 그 때였다. “어? 야, 여기서 뭐해?” 손을 들어 인사까지 하면서 친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을 나는 잠시 동안 노려보듯이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일단 생긴 것이나, 옷 입은 것이나, 여타 다른 것을 살펴보더라도 눈 앞의 존재는 선생으로 분류되는 사람으로 추정된다. 저 사람이 친한 척 구는 상대가 내가 아닐까, 의심쩍지만 일단 지금은 그에 관한 것은 젖혀두자. 아이들의 관심이 눈 앞의 선생에게 쏠린 사이에 도망칠 궁리를 했지만, 나를 잡고 있는 영훈의 손은 단단했다. “그래. 반은 잘 찾아갔어?” 서글서글하게 말을 거는 선생님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아무래도, 이 선생님이 말을 거는 사람은 나인 것 같다. 그런데, 대체 이 사람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네...” 어물거리며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 보려 했지만, 선생님은 내 앞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몇 반인데? 야, 그렇지 않아도 네가 반을 잘 찾아갔나 걱정되서 오늘 다른 반을 돌아다녀 보기까지 했었다.“ “...그러세요.” 생각났다. 오늘 아침의 끔찍했던 기억들이 스물스물 머릿 속에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별 특징 없게 생긴 20대 후반의 남자를 유심히(실제로는 노려봤을지도 모른다.) 바라보았다. 지워버리라 결심했던 악몽을 다시 생각나게 한 남자, 아니, 선생님이 달갑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 손을 꽉 잡은 영훈이 침착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선생님은 당황한 듯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표정 변화를 민감하게 잡아내면서 당장 선생님께 달라붙었다. “선생님, 지금 집에 가시는 길입니까?” 제발 집에 가는 길이라고 해, 제발~! 내 소리없는 절규가 통한 듯 선생님은 어리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도 집에 가려고? 왜, 집까지 태워 줄까?“ 방금 전 선생님의 그 말로, 오늘 아침의 악몽은 행운으로 바뀌었고, 나의 선생님에 대한 친밀도는 급상승을 해 버렸다. “고맙습니다.” 당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영훈이 손톱으로 내 손등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훗, 아무리 그래 봤자, 학교 안에서 네가 공권력에 대항 할 수 있을 것 같냐? 나는 당당히 선생님의 권력을 등에 업고 거만하게 반 녀석들을 둘러 본 후, 가방을 들고 교실을 나섰다. 나를 향해 입만 벙긋거리는 민섭이, 한숨만 푹푹 내쉬는 영훈이, 그리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대는 도연이의 모습들이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진다. 덧붙여 등을 꼿꼿이 세우고 서서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짝꿍의 모습도, 경악한 표정을 하고 있는 반 아이들의 얼굴도... ...모두 정말 보기 좋다. 내 수년 간의 경험과 이론에 따르면, 자고로 한 번 한 일은 두 번 하게 되어 있다. 오늘 저 녀석들에게 못 이겨, 억지로 청소를 하게 되면, 내일도 청소를 하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이번에는 다행히 빠져나왔지만, 내일 아침에는 성실한 반 학우들과 내가 왜 청소를 하면 안 되는지에 대해 다정한 의견 교환을 해 봐야겠다. “집이 어디야?” 선생님은 나를 힐끗 돌아 보면서 물었다. 그리고는 연이어 왜 옆 좌석에 앉지 않는지 물어본다. 나는 무뚝뚝하게 집 주소를 불렀다. 옆 좌석에 앉지 않은 이유는, 집에 가는 동안 선생님과 쓸데 없는 잡담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지만, 그런 말을 일일이 할 필요는 없겠지. 방금 전까지 그나마 유쾌했던 기분이 갑작스레 푸쉬쉬, 급격한 소리를 내면서 가라앉는다. 나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푹신한 시트에 등을 기댔다. 이렇게까지 스스로의 감정이 급하게 변화될 때면, 나 스스로도 예전 민섭이가 중얼거렸던 조울증이라는 병명이 상당히 의심스럽게 여겨지곤 한다. 조용한 차 안에서 차가운 창문에 이마를 기대고, 나는 버릇처럼 졸기 시작했다. “흠, 거의 다 왔는데...” 그런 나를 힐끔거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까닥하면서 자세를 고쳤다.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뭐가 있더라...? 멍한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의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 화면을 힐끗 보자, 화면에 찍혀진 김 민섭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보나마나 내가 이런 식으로 도망친 것에 대해 화를 내는 전화겠지 싶어, 아무렇지 않게 다시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벨소리, 다운 받는 것 싫어해?” 그 때, 선생님이 나를 돌아보면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 핸드폰은 누가 전화를 하던, 기본음 1번 벨 소리를 낸다. 그건, 내가 벨 소리를 다운 받기 싫어해서가 아니었다. “싫은 건 아닌데...귀찮아요.” 뚱하니 대답하자, 선생님은 능숙하게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대꾸했다. “그래? 핸드폰 번호는 몇 번인데?” ...아까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 선생님, 굉장히 참견이 심하다. 곤경에서 구해 준 것은 고맙지만, 더 이상의 접근은 사양이었다. “설마 그것도 모르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곤란해 하는 기색을 알아챘는지, 선생님은 씨익 웃으면서 이죽거리듯 말했다. “...태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저는 이 쯤에서 내릴게요.” 나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뱀처럼 유들유들한 선생님도, 억지로 강요당하는 청소도, 모두 내 여린 마음을 너무 지치게 만든다. 오늘은,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고 푹 쉬자. 그렇게 결심하면서 차 문 옆에 달라붙어 내릴 준비를 끝마쳤다. 선생님은 그런 나를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면서, 차의 속도를 줄이고 갓길에 차를 대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형식적으로 인사를 하면서 차 문을 열자, 선생님은 운전석에서 몸을 틀어 나를 바라보며 짖궂게 말했다. “네 핸드폰 번호 알려 주기 싫으면, 내 번호라도 알려 줄게. 부를 테니, 받아 적어라. 0xx-xxx-xxxx니까, 필요할 때 연락해라.“ 나는 멀뚱히 서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 다시 말해 줘?” 귀여운 척 눈을 깜박이며 다시 핸드폰 번호를 부르려는 선생님을 외계인 보듯 바라보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몸을 뒤로 물렸다. “오늘 아침을 생각해 볼 때, 네가 앞으로도 종종 오늘과 같은 상황을 연출할 거라는 예감이 드는데? 그러니, 지각할 것 같으면, 전화 해라. 마침 나도 이 쪽으로 통학하니까, 가는 길에 태워주마.“ ....저 선생님, 전쟁 발발 지역에 사는 누이 동생이라도 있는 걸까. 왜 저리 박애 정신이 넘쳐 흐르는 거지? 누군가가 내게 이유 없는 도움을 줄 때는, 우선 경계하고 의심부터 하라고, 군대를 간 큰 형은 내게 누누이 말하곤 했다. 나는, 진지하게 나를 바라봤던 큰 형의 각진 얼굴을 떠올리고, 주저없이 핸드폰을 꺼냈다. “다시 한 번 불러주세요.” 선생님이 불러주는 번호를 핸드폰에 저장시킨 후, 아까와는 다르게 진심이 담긴 예의바른 인사를 건네고 몸을 돌렸다. 앞으로 자주 신세를 질 사람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없다. 터벅터벅 길을 가면서, 나는 몇 주 전에 어디론가 가출한 대학생 둘째 형을 떠올렸다. 미안해, 큰 형. 하지만 말이야. 나는 지금쯤 밥도 굶으며 거지처럼 돌아다니고 있을 둘째 형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어. ...누군가가 네게 이유 없는 도움을 줄 때는, 그 사람을 너의 봉이라고 생각해라. 꺼칠한 수염을 매만지며 그렇게 말하던 둘째 형이 유난히 그리운 날이었다. 예전에, 누군가가 내게 진지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너, 정말 병 있는 거 아니야? 라고 말이다. 그 녀석은 그 말 끝에, 그렇게 잠을 많이 자는 것도 병이래, 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때 그 녀석을 한 번 바라봐주고, 그대로 무시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후, 분노한 그 녀석에게 머리를 얻어맞았다. ...생각해 보니, 그런 괴상한 질문을 던지고, 혼자서 열받아 하며 내 .머리를 때렸던 괴씸한 녀석이 도연이였던 것도 같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떻게 했더라? 맞다. 다음날 민섭이 한방 의학 책을 집에서 훔쳐 들고 왔었지. 내게 그것을 안겨 주며, 비슷한 증세가 있는지 한 번 읽어보기라도 하라고 애원하던 민섭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생생할 만도 했다. 두껍고 깨끗했던 한방 의학책을 들고, 단골 헌책방 집에 갔을 때 받았던 빠닥거리는 지폐들의 감촉을 생각하면 말이다. 마침, 헌책방의 단골 손님 중에 내가 들고 온 책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고마우신 분이 계셔서, 나는 그 분과의 적절한 상거래 끝에 노동에 알맞은(솔직히 그 무거운 책을 헌책방까지 들고 가느라 힘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받은 돈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금액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친구의 책을 멋대로 팔아 꿀꺽할 만큼 양심없는 놈은 아니었다. 내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그 돈을 썼다면, 나중에 억울해하지도 않았을 거다. 마침 민섭이들이 놀이 공원으로 놀러가자기에 나는 솔선수범해서 공동자금으로 그 돈을 내 놓았다. 그 때 분명히 녀석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잘 놀면서, 나에게 돈 더 없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래 놓고 나중에 나를 향해 그럴 줄 몰랐다느니, 너무하다느니, 하면서 화를 냈던 것을 생각하면... 그 때의 끔찍했던 상황을 떠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는 것 같다. ...아니, 지금 실제로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는 건가? 꾸물꾸물 몸을 뒤척이다가, 후덥지근하고 습기찬 방 안의 공기에, 나는 미약한 구토증세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추운 바깥 공기를 차단시키기 위해 꼭꼭 닫아놓은 창문 때문인지, 방 안은 숨 막힐 정도로 텁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눈을 비비면서 벽에 걸린 네모난 시계를 바라보았다. 예전에 시골에서 올라오신 할머니가, 이 곳에 머무르는 동안 심심하다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주워오신 황금빛 시계는, 모양은 촌스럽지만 대단히 튼튼해서 아직까지 고장 한 번 나지 않았다. 저 시계의 단점은, 시간이 5분 일찍 가며, 또한 정상 시간보다 빠른 분침을 제대로 조절하기 위해서는 시계 자체를 모두 뜯어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라고, 우리 집안 사람들은 내게 설명하고 있다. 나는 내 지각의 주된 원인으로 시계를 꼽으면서, 종종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는(특히 담임 선생님의 전화를 받은 후에) 아버지에게 나 자신을 변호하곤 했다. 사실, 내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내 방의 시계가 정상 시간보다 5분이나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아침에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해도, 언제나 5분간의 시간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11시 43분. 실제 시각은 11시 반이 넘었으리라는 것은 더하기 빼기를 하지 않아도, 눈짐작만으로 대강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다. 조금 더 자고 싶지만, 지금 자면 내일 아침에야 눈을 뜨게 될 테니, 이만 일어나는 것이 나을 듯 싶었다.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몸을 일으켜 옷을 차려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기며 마지막으로 두꺼운 코트를 걸치자, 대충 밖에 나갈 모양새가 만들어졌다. 나는 주머니에 mp3를 넣고 음량을 조절한 후,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문을 열었다. 그대로 나가려다가, 핸드폰을 놓고 나온 것이 생각나, 다시 한 번 방에 들어가 핸드폰을 들고 나왔다. 불이 켜져 있는 거실은,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적막한 거실을 둘러보고 있자니, 갑자기 외로운 기분이 든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은성아, 이렇게 늦은 밤에 또 어딜...” 소리없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걱정스레 말하는 아버지 때문에, 한순간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버렸다. “잠깐 산책 좀 하고 올게요.” 놀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히며 무뚝뚝하게 말하자, 아버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몇 신데...” 아버지는 거실의 시계를 바라보며 말 끝을 흐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미소지었다. “갔다가 금방 올게요.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그런 건 없는데... 그럼 되도록 빨리 오고, 어두운 곳은 피해 다녀라. 핸드폰은 갖고 가지?“ 내 오랜 취미를 알고 계시는 아버지는, 결국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께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정지시켜 놓았던 mp3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크고 강렬한 사운드가 내 주위를 가득 채운다. 나는 현란한 음악의 박자에 맞춰 걸음 속도를 조절하면서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밤의 산책은, 내 오랜 취미 중의 하나이다. 내 이런 취미 생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은, 야밤의 체조도 아니고 뭐하는 짓이냐고, 비꼬는 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밤에 나 홀로 산책을 하는 것이 좋다. 나를 향해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도 알아 듣지 못할 만큼 볼륨을 높이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거리를 걷는다. 그럴 때에는, 내 머릿 속의 생각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나는 내가 꿈 꿔왔던, 공상해왔던 것들이 현실인 것마냥 눈 앞에 선명하게 떠올리게 된다. 내 앞에서 주황색 가로등은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나는 가로등을 지나쳐 걸으면서 차갑고 맑은 밤의 공기를 음미한다. 밤의 산책은, 내게 일종의 꿈과 같은 것이었다. 그 꿈 속에서, 나는 자유롭게 여행하는 방랑자에 다름없었다. 나는 밤의 산책 중에 멈춰서는 것을 싫어한다. 걸음을 멈추면, 그 즉시 환상이 깨지고, 낮 동안에 겪었던 나의 현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신호등이 없는 강둑길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걷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 끝까지 걸을 때마다 20분 정도가 걸리는 강둑 길은, 1,2 번만 왕복하면 1시간은 거뜬히 지날 정도로 긴 거리였다. 그 강둑길을 몇 번이나 걸었을까. 30곡이 넘게 저장시켜 놓은 mp3의 음악 리스트가 두 번 정도 반복되었을 때, 나는 비로서 슬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서야 겨우, 강둑 길 끝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는 한 순간 이대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몸을 돌려 달아날까, 하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여어.” 그러기에는 방금 마주친,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저 시선이 마음에 걸린다. 앙심을 품으면 며칠, 몇 달이고 잊지 않는 쪼잔한 성격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오늘 이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면 내일 학교에서 저 녀석의 징징거림을 하루 종일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겨우 알아챘냐.” 민섭은 한숨을 내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어린 녀석이, 이렇게 한숨을 남발하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는 않아,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민섭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은 폼으로 가지고 다니냐. 주머니에 넣고 있으면서, 받지 않는 건 또 뭐냐? 게다가, 이어폰 볼륨 크게 틀으면 귀에 좋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어?”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민섭은 삐딱하게 말을 걸었다. 이 녀석이 왜 이러나 싶어, 나는 잠자코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었다. “...그 사람, 뭐야?” 민섭은 발 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면서. 고개를 숙이고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그 사람...? 얼굴을 노골적으로 찌푸리자, 민섭은 곧, 아까 너랑 같이 집에 간 선생님, 하고 덧붙였다. 아, 그 사람...하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본론이구만. 그러고 보니, 오늘 그런 식으로 도망친 것에 대해, 민섭이 화가 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조용히 화를 내는 영훈이나, 또는 대놓고 날뛰는 도연과 비교해 볼때, 민섭의 화는 상당히 오래 가며, 또 그 독기가 남다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 하나하나에 민섭의 지난 분노가 모두 농축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은, 결코 나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민섭의 음험한 눈빛을 대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오늘 도망친 걸로 또 삐졌군, 이 녀석, 하다가, 잘못한 것은 사실 내가 아니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다시 떠올리니 또 기분이 나빠진다. 대체 왜 새학기 첫날부터 남의 반에 들어와 청소를 하라 마라, 하느냔 말이다. 우리 반 아이들이 성실하고 착한 건 또 어떻게 알아가지고,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선동하다니. 만약 이 녀석들이 앞으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는 중학교 3학년 때와 같은 암울한 나날을 보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온 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다. “...누구냐니까?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내가 작년을 떠올리며 불행해 하는 사이, 민섭은 고개를 들고 낮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선생님.” 고개를 양쪽으로 갸웃거리며 대답하자, 민섭은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몇학년의, 무슨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 이름은? 그리고, 어떻게 만났어?“ 머리가 어지럽다. 한 번에 하나씩만 물을 것이지, 라고 불평을 늘어놓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내 대답이 너무 빈약하다. “몰라. 우연히 만났어.“ “...보통, 우연히 만나고, 또 이름도 모르는 사람 차를 타고 함.께. 집에 가냐?” 민섭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말에 날카롭게 가시가 서 있는 것을 보니, 또 무언가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같은 학교 선생이잖아.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 태연히 대꾸하자, 민섭의 눈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다시 한 번 하아, 하고 절망에 찬 한숨을 내쉰다. “...그래, 내가 말을 말아야지.” 민섭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래도, 아까와는 달리 얼굴 빛이 많이 누그러져 있어, 나는 민섭을 지나쳐 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민섭은 익숙하게 나를 따라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학원, 지금 끝난 거야?” 민섭을 향해 묻자, 민섭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까 끝났어. 집에 가는 길에, 너한테 전화했는데 핸드폰을 받지 않아서...너네 집으로 전화했더니 너희 아버지가 너 산책나갔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여기로 와 봤지.“ 대체 왜 왔냐는 질문은 그냥 속으로 삼켜버렸다. 그러니까, 민섭이라는 놈은, 늦은 시간에 밖에 나와 있으면 큰일 나는 줄로만 아는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밤에 길을 가다 깡패에게 성금을 헌납한 쓰디쓴 경험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밤길에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민섭은 내가 밤 늦게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러다 보니, 밤산책을 나간 나를 마중나온다면서 찾아오는 녀석의 모습을 대하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어서, 새삼스레, 왜 찾아왔어? 라고 묻는 것도 어색한 일이다. 나는 입을 벌려 하얀 입김을 뿜어 내면서 고개를 약간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예전 부모님이 어렸을 적에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하얀 별들이 총총히 떠 있었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밤하늘을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내가 본 밤하늘은, 노란 달 하나, 그리고 인공위성인지 별인지 의심이 가는 하얀 물체 한 두개가 박혀 있는 것이었다. “하늘이 예쁘다...”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섭의 센티멘탈한 발언에, 나는 잠시간 어이가 없어졌다. 물론 민섭이, 상당히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은 녀석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순간, 만약 민섭이 나와 얼굴을 마주 보고 이런 말을 했다면, 그대로 때려 버렸을지도 모른다, 라는 괴로운 생각이 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저 덩치를 하고, 거뭇거뭇한 수염 자국이 남아 있는 얼굴로, 그런 감상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분명한 범죄다. 나는 마침 앞에서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을 피해 어깨를 움츠리며 민섭의 발언을 머릿 속에서 떨쳐냈다. 다행히 민섭은 그 후,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걸음을 빨리했다. 민섭과 같이 있는 것은, 이런 점에서 좋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이 녀석과 공유하는 침묵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다. 억지로 떠들 필요도 없고, 또 어색함을 이기지 못해 상대방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나는 뻐근한 목을 옆으로 돌리며 주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까, 음악을 들으며 정신없이 걸을 때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모습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온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중년의 아저씨, 깔깔대며 지나가는 짧은 스커트의 여학생, 그리고 유한 마담처럼 생긴, 뚱뚱한 아줌마, 아줌마와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큰 덩치의 남자... ...응? 방금, 분명히 아줌마와 같이 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내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지금 남자는 나를 강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의심스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 남자는 길 건너 블록에서 걸음까지 멈추고 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 가늘게 찢어진 남자의 눈은, 작은 차도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상태에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어떤 종류의 악의를 품고 있었다. “야, 왜 그래?” 내 발걸음이 느릿해지자, 민섭은 이상하다는 듯이 내 팔을 툭하고 건드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과 눈이지만... 뭐, 신경쓸 필요는 없겠지. 기억나지도 않는 타인이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갖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설사 상대방이 내게 악의를 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보다는, 좀더 건설적인 생각에 몰두해 보자. 집에 가면... ...음, 우선 한 숨 자고, 그리고... 3. 아침형 인간이 되자~! 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것은, 그렇게 말을 한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침형 인간이 되어 생기는 장점들에 대해, 머릿 속으로는 수긍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실제로 강요받는 것과는 또 달라서, 나는 아침에 무언가를 하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었다. 따라서 나는, 내가 나중에 교육부 장관이 되는 일이 생기면, 꼭 우리 나라의 등교 시간을 늦춰보리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하면... 오늘도 지각이다. 아니, 아직은 준 지각의 상태이지만, 이대로 뛰어가면 분명히 지각이다. ...잠시 생각 좀 해 보자. 인자해 보이는, 느릿한 움직임을 선보였던 할아버지 담임 선생님은, 지각에 대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내 예리한 직감이, 느긋하신 담임 선생님은 분명 지각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해온다. 그럼, 여기서 나는 또다시 곤란함에 처하게 된다. ...K 고등학교는, 교문 앞에서 지각생을 잡을 것인가, 아니면 교실에서 담임 선생님이 지각생을 잡도록 할 것인가? 전자라면, 지금 당장 택시를 잡아야 하고, 후자라면, 미친 척하며 뛰어가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정말 고민된다. 이 것은, 밥을 먹을까, 라면을 먹을까, 하는 문제보다 더 심각한 주제의 것이다. 신호등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벨소리를 낸다. 짜증 섞인 몸짓으로 핸드폰을 꺼내다가, 나는 멈칫했다. 액정에 찍힌 이름을 한 번 보고, 멍한 얼굴로 이 사람이 누구더라, 하고 생각하면서 전화를 받았다. “지금 앞에 있다. 신호등 바뀌면 빨리 건너와라.” “...누구세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되물었던 것은, 순전히 그 시간이 아침이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나는, 아침에는 잠이 덜 깨어서 평소보다 더 멍한 상태가 된다...라고, 나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다. 잠시, 핸드폰 너머의 상대는 말이 없었다. 그 때, 신호등이 팍, 하고 바뀌었다. 녹색 불을 보자마자, 나는 서둘러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넜다. “여기야, 여기. 지금 네 바로 왼쪽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차 창문 너머로 내밀어져 흔들리고 있는 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야, 어서 타라.” 그리고 얼굴 하나가 불쑥 차의 창문 너머로 나타나서 그렇게 말했다. ...일단 타고 보자. 차의 뒷문을 열고, 자리에 앉으면서 서둘러 목적지를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 K 고등학교로 가 주세요.” 그 말에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던 운전사가 멈칫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저기...혹시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고등학교 선생이거든?” 떨리는 음성으로 슬며시 물어보는 운전사를 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차의 창문에 얼굴을 대고 반쯤 졸면서, 이와 비슷한 상황이 전에도 있었던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오늘 목도리까지 하고 나온 것은 조금 오바였던가. 목이 따뜻하니 더 졸린 것 같다. 차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있다가, 그만 창문에 콩, 하고 이마를 부딪히고 말았다. 그 소리가, 졸고 있던 내 귀에는 천둥 소리처럼 크게 느껴져서, 나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어제 늦게 잤니?” 그런 나를 향해, 앞에 앉은 운전자가 묻는다. 뭐야, 저 사람은... ...대체 나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 친한 척인가...하다가, 그만 생각해 내고 말았다. 그랬다. 운전사는, 나와 같은 학교 선생님인 사람이었고, 또 앞으로 내 등교 길의 편안함을 약속해 주었던, 내가 필연적으로 잘 보여야만 되는 상대였다. 나는 당장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니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가, 혹시나 운전...아니, 선생님이 기분이라도 상해하실까봐 서둘러 말을 고쳤다. “조금 피곤해서요.” 힐끗 눈치를 보니, 선생님은 방금 전까지의 내 태도가 그리 기분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던지, “내일부터는 너 혼자 가라.” 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나는, 그 뒤로 얌전히 입을 다물고, 학교까지 무사히 도착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앞에 앉은 선생님은 별로 그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대체 몇 반이야?” 그렇게 물으며, 연신 말을 거는 것이다. ...차라리 택시를 탈까 보다.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다. 시간을 보니 아슬아슬하다. 이대로 3분만 더 늦으면, 지각, 이라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나는 서둘러 차에서 내리며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다행히,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선생님의 모습에, 안도감이 느껴진다. 그래, 내일 또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보험 하나 들어둔 셈 치자. 계단을 올라가면서, 나는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고 올라가고 있자니, 이대로 쓰러져서 한 숨 자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피어나온다. 하지만, 안 돼. 참아야 하느니... ...만약 여기서 쓰러져 잠들 경우, 뒷일은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굳은 의지로 겨우 교실에 들어와 우선, 제일 뒷자리, 내 의자에 쓰러지듯 앉은 후 고개를 책상에 파묻었다. 다행히, 아직 담임 선생님은 오시지 않은 것 같다. “...반장.” 하지만, 세상은 그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나는 누운 상태로 약간 머리의 각도를 틀어, 눈만 위로 치켜떠 보았다. 다행히,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누운 상태에서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내 모습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리고 머뭇거리는 상대방을 보아하니, 무언가 할 말은 있는데 차마 말 하기 난처해 하는, 그런 모습이다. “...할 말 있다잖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는 내 옆구리를, 누군가가 쿡, 하고 찔렀다. 다시 눈을 틀어 옆을 바라보자, 커다란 덩치의 남학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옆에 앉은 것을 보니, 내 짝이구나. 짝꿍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안 일어나냐?” 나는 그제서야 미적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한 번, 거세게 한숨을 휴우, 하고 내쉬자, 앞에 선 남학생의 몸이 소심하게 움찔거린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노골적으로 이마를 찌푸려보았다. 얼굴을 찡그리고 말 없이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자, 상대방은 불안하게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싸우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보고 있다가, 나는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 고개는 대책 없이 아래로 꺾여져 있었고, 눈은 깜박거리며 감겨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들 자리에 앉아라.” 담임 선생님이다. 출석부를 들고 들어온 할아버지 담임 선생님은 교탁을 출석부로 탁탁 치더니, 교실 안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모두 왔군. 오늘은 별다른 종례사항이 없다. 1교시가 무슨 시간이지?“ 앞에 앉은 누군가가 조그맣게 국어요, 하고 대답한다. 담임 선생님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용히 자습하고 있어라. 반장, 아이들 자습시키고, 무슨 일 있으면 교무실로 올라와라, 알았지?“ 반을 다시 한 번 휘익, 돌아본 후, 담임 선생님은 바쁘게 교실을 나가셨다. 나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다가, 퍼뜩 오늘 학교에 와서 꼭 하리라고 다짐했던 일을 떠올렸다. 마침 1교시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조금 남아있다. 나는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앞으로 걸어나갔다. 갑작스레 앞으로 나가는 나를 향해 아이들의 시선이 모아진다. 나는 그런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교탁 앞에 서서, 다소 삐딱하게 반을 둘러보았다. 나는 아이들이 모두 나를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우선 단호하게 말을 꺼냈다. “나는, 반장 일을 하기 싫다.” “...” 반 아이들의 표정은, 딱 그것이었다. 저 놈이 미쳤나, 하는 어이없는 얼굴 말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반장의 일을 해야 할 테니,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임시 반장을 떠맡게 됐지만... ...내가 원해서 맡은 것이 아니니까, 절대 나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마라. 물론, 나는 고등학교 1학년씩이나 되어서, 자기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반장에게 뭔가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어린 아이는, 우리 반에 없으리라고 믿고 있어.“ 점점 아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는 느긋하게 그 얼굴들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을 위해서 희생하는 반장의 일을 떠맡은 이상, 나에게도 그에 걸맞는 이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아마,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내 말에 동의할 거다. 따라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앞으로 청소하는 사람들의 명단에서 내 이름이 빠지기를 건의한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만에 가득 찬 음성이 들렸다. “그렇게 반장을 하기 싫으면, 너에게 반장을 하라고 시킨 담임에게 직접 찾아가서 하기 싫다고 말하지 그래?” 그 말에, 몇몇 아이들의 고개가 세차게 끄덕여졌다. 나는 여유있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내 짝꿍을 바라보았다. “내가 미쳤냐?” “...” 짝꿍의 표정이 순간 허물어졌다. 순식간에 덩치 큰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어 버린 짝꿍을 향해, 나는 친절하게 부연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너라면,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서 그렇게 말하겠냐?” “...” 아직도, 짝꿍은 표정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반 아이들을 둘러보며, 우호적으로 물어보았다. “내 제안에 불만있는 사람은, 머뭇거리지 말고 지금 말해 줘. 만약,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알고, 이만 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듯,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공중으로 치켜 올려진 아이의 손을 보고 있자니, 한참 수업 중인 선생님이 된 듯한 기분이다. 나는 그 아이를 향해 상냥하게 말했다. “의견을 말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것이고, 그건 권리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내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내가 친히 청소 반장을 시켜주지, 매일 청소반장을 하면서, 내가 청소를 하는지 안 하는지 감독하는 것도, 그 사람이 원한 일일 테니까.“ 천천히, 공중에 치켜 든 손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보고, 나는 더욱더 반 아이들에게 호감을 느꼈다. “자, 의견을 말해 볼 사람?” 이봐, 나는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을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우리, 서로의 의견을 가탄없이 나누면서 아름다운 3반을 만들어 가자니까? 하지만 역시나 착한 우리 반 학생들은, 내가 청소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아무런 불만을 가지지 않은 듯 손을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럼, 네가 임시 반장에서 물러나면 그 때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를 악물고 나에게 물어보는 짝꿍에게, 나는 잠시 생각을 해 본 후에 대답했다. “그건 그 때 가서 이야기하지.” 다시 한 번 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는지 물어보았지만, 반 아이들은 그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나는 내 자리로 들어가면서, 잠시 감회에 빠져들었다. ...작년, 이맘때 쯤, 그러니까 중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그 때도 반장이었고, 역시 지금과 비슷한 말을 앞에 나가서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의 같은 반 녀석들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 반의 착한 학생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녀석들은 그 자리에서 나를 향해 이를 갈면서, 청소 반장, 청소 부반장, 청소 감독관을 선출했고, 1년 내내 나를 잡으러 뛰어다녔다. ...젠장할, 우울한 과거를 생각해 내다니... 이런 때는 자는 게 상책이다. 책상으로 고개를 숙이는데, 뒷문이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온다. “어, 뭐야? 너네 반은 왜 이렇게 조용하냐?” 소곤거리며 나에게 묻는 민섭을, 나는 우울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냐? 반 아이들 표정이 왜 이래?” 도연이 의아한 듯 말하다가, 갑자기 아차, 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노려보았다. “너, 어제~!”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는 도연을 향해, 나는 진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너네 왜 자꾸 남의 반에 들어오냐?” 내 말에 도연의 손이 그대로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이 자식이 진짜·~!” 길길이 날뛰는 도연을, 영훈이 한숨을 내쉬며 잡아 눌렀다. “머리는 때리지 마라. 여기서 더 나빠지면, 나중에 또 너에게, 누구세요? 하고 물을 테니까.” “그것 뿐이면....” 그 말에 민섭은 다시금 예전 일이 생각난 것인지, 콧방귀를 뀌면서 음침하게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꿋꿋하게 민섭의 눈초리를 견뎌 내며, 조용히 말했다. “너희들 때문에, 우리 반 학생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는...” 출입을 자제해 줘, 하고 말하려는데, 영훈이 중간에 내 말을 싹둑 잘라먹으며 끼어들었다. “너, 혹시, 또 아이들에게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한 건 아니야? 이를테면, 반장이니 청소를 빼 달라던가...“ 그 말에, 앞에 앉은 녀석의 몸이 뒤로 휙, 하고 돌려졌다. 동시에 짝꿍의 길게 찢어진 눈초리가 다소 풀려졌으며, 여기저기서 끼긱, 거리는 의자 끄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대체 뭘까, 이 열렬한 반응은. 나는, 얼굴을 찡그리면서 영훈을 바라보았다. 그게 어째서 얼토당토 않은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허 참, 맞아, 그런 게 있었지. 그 때 얼마나 황당했던지... 야, 설마 이 녀석이 또 그런 말을 했겠냐.“ 도연이 조금쯤 화가 가라앉은 얼굴로 중얼거리자, 민섭이 그 옆에서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맞아, 정말 황당했지. 내 말에 불만 있는 놈은 청소 반장을 시켜 주마, 라고 말할 때는 정말... ...내 살다 살다 이런 놈은 정말 처음이라니까.“ ...네가 몇 년이나 살았길래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내뱉냐, 하고 말해 주려고 했는데, 그보다 더 빨리 영훈이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대체 또 무슨 짓을 한 거냐.” 침착하게 묻는 영훈의 모습은, 범죄자를 취조하는 베테랑 형사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이 녀석들이 진짜...! 점점 열이 받기 시작하고 있는데, 반 아이들 중 한 명이 제꺽 입을 열었다. “글세 반장이...” [ 띵 동 ] 종이 울렸다. 나는 잽싸게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면서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아. 하. 하, 이제 곧 수업이 시작할 텐데, 이만 각자의 반으로 돌아가지.” “...분명 뭔가 있어.” 조용히 중얼거리는 영훈의 뒤에서 민섭과 도연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녀석들이 의심쩍어 한들, 학생인 이상 수업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교실 문을 열고 나가는 녀석들을 보면서, 나는 다음 쉬는 시간에는 ‘다른 반 아이들의 우리 반 출입’ 문제에 대해 반 아이들과 다정한 설득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했다. “차렷, 선생님께 경례~!” 들어온 국어 선생님께 인사를 한 후,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다가 나는 한순간 멈칫했다. “에, 내가 1반부터 6반까지 국어를 가리키게 된 선생님이다. 이름은 이 정...응?” 출석부를 내려놓으며 인사를 받은 국어 선생님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선생님을 향해 눈을 크게 떴다. 이렇게 말하면, 선생님이나 내가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단호히 말해서, 지금 선생님과 내 얼굴 표정은 확실히 틀리다. 선생님의 경우가 반가움이라면, 나의 경우는 황당함 내지, 뭐 이런 일이~! 라는 수준이랄까. “아, 네가 3반이었구나?” ...더 이상 말하지 말아 줬으면...아니, 선생님이 이대로 못 본척 나를 외면해 주시면 더욱 더 고마워질 것 같다. “하하, 그런데 그렇게 뒤에 앉으면 불편하지 않니?” 하지만 국어 선생님은 나를 손으로 지적까지 하면서, 계속해서 말하고 있었다.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는 국어 선생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대로 현실을 도피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대로 엎어져서 한 숨 푹 자고 일어났으면... 멍한 얼굴로 생각하는 사이, 국어 선생님은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쓱쓱 적어가고 있었다. “이름은 이 정훈, 앞으로 너희들과 친하게 지냈으면 한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보고, 알았지?“ 내 쪽을 바라보며 웃음을 한 가득 날리는 것이, 무언가 굉장히 압력을 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럼 앞으로 수업 방식은...” 나는 국어 선생님의 시선을 피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어제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역시 우리 반의 히터는 유난히 따뜻하다. 게다가, 내 책상은 적당히 높아서, 공부보다는 이대로 머리를 대고 자기에 알맞게 설계되어 있었다. 역시나, 이번의 반은 정말 마음에 들어... ...물론 몇몇 가지는 제외하고 말이다. -4- 뜬금없지만, 나는 산을 좋아한다. 물론, 이 말은 내가 산을 집보다 더 좋아해서, 주말이면 산으로 등산을 하러 간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나는 지금 내가 도시락통을 옆에 끼고 학교 운동장을 끼고 있는 산으로 올라가고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었을 뿐이다. k고등학교는 약간 높은 언덕길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운동장은 학교의 제일 위쪽에 위치해 있어, 운동장에서 바로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오늘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 나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점심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나는 중학교 때에도 홀로 도시락을 옆에 끼고 학교 뒷산에서 점심을 먹는 것을 즐겨했었다. 그랬던 내가, k고등학교에 있는 산을 멀거니 바라만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산으로 올라가는 길에 설치된 나무 계단을 올라가 산 중턱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위를 둘러보는데 추운 바람이 휘잉, 하고 거센 소리를 내면서 불어온다. 나는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고개를 숙이고, 소나무 아래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덜덜 떨리는 손을 애써 무시하면서 살얼음이 낀 땅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가 버린 과자 봉지 하나가 바삭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내 모습을 보면, 분명히 웬 궁상이냐고 말하겠지만, 나는 떳떳이 내 취미를 고수하련다. 자고로, 밥은 좋은 환경에서 먹으라고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와 풀들을 눈앞에 두고 먹으면, 차갑게 식은 밥이라도 분명 진수성찬으로 느껴질... ...까? 조금씩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나는 젓가락질을 하다 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역시, 이 추운 날씨에 밖에 나와 점심을 먹는다는 것은... ...무리였나?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나는 부정의 의미로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내 움직임에 맞춰 목 뼈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운동이라도 해야 할까... 나는 반찬을 입에 집어 넣으며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했다. 사실, 나는 그다지 건강한 편은 아니다. 또한 운동을 잘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운동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내 취미인 밤의 산책은, 운동이라기보다는... ...그래, 누군가의 말에 따르면 자학에 가까운 행위라고 들었다. 자학... 나는 우울하게 그 말을 곱씹었다. 입 안에서 돌아다니는 차가운 밥알이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내일은, 보온밥통에다가 밥을 싸 올까. 불연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내일부터는 따뜻한 국까지 싸 달라고 말하면 안 될까...? 따뜻한 국...생각만 해도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황홀한 단어다. 따뜻한... 그러다가, 나는 내가 왜 이 추운 날에 따뜻한 교실을 버리고 여기 앉아 있을 만큼, 산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내고 말았다. 나에게는 가슴아픈 첫사랑의 추억이 있다. 사실, 순수하고 천진난만했던 과거의 나는, 이성에 대해서 뒤늦게 호기심을 가졌고, 또 그랬기에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도 중 2, 그러니까 15살이 되어서야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소녀는, 나와 같은 학년의 말이 없는 여자아이였다. 그녀는, 내 눈에 누구보다도 예쁘게 보였으며, 또 실제로도 청순하고 얌전한 문학소녀였다. 두꺼운 책을 가녀린 팔로 힘겹게 받치면서 도서관에 서 있던 그녀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나는 볼일도 없이 도서관을 드나들곤 했다. 사실, 얌전한 성격의 나에게, 그녀에게 교제 신청을 한다던가 하는 것은 상당히 힘겨운 일어었다. 무엇보다, 그 시절의 나는, 그녀와 사귀는 것보다는, 그림처럼 조용한 분위기를 가진 그녀를 지켜보는 것이 더 좋았다. 그러다가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그녀와 내가 한 반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남몰래 기쁨에 들떠 잠을 설쳤었다. 내가 잠을 설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라, 나 자신에게도 내가 잠을 설쳤다는 사실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로 인해, 마침내 자각할 수 있었다. 나는 정말로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같은 반이 된 그녀는, 내가 보아왔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참으로 여성스러운 소녀였다. 그녀의 교복 주머니에 곱게 다려진 체크 무늬 손수건이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감격해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사실은, 누구나 떡진 머리가 되어 달려오는 중간 고사 아침, 그녀 혼자 반질거리는 생머리를 푸르고 왔다던가, 또는 다른 여자아이들처럼 고춧가루 낀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 보이는 일이 한 번도 없다던가,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로 인해 더욱 증폭이 되었다. 그랬던 내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갔던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운명의 그 날, 나는 도시락을 들고 산 속에 앉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늦봄, 나는 따뜻한 햇살을 즐기며 열심히 도시락을 먹고 있다가, 나무들 사이로 팔랑거리며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을 얼핏 보았다. 잠시 내가 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 나는 도시락을 덮고, 그녀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녀 역시 산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구나,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까...? 그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걷다가, 나는 바닥에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다. 그래, 우선 첫 말은 무난하게 인사가 좋겠지. 나는 발걸음도 가볍게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좋은 점심.” 생긋, 웃으면서 그녀의 앞에 섰다. 그리고, 나는 느꼈다. 그녀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잠시간 망설였다. 그대로 허공을 바라보며 산을 내려가고 싶었지만, 진하게 풍기는 냄새가, 내 대뇌의 사고를 저지시켜 버렸다. 고개를 내렸을 때, 나는 나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과 정통으로 시선을 마주쳤다. “...휴지 줄까?” 나는 그녀에게 상냥하게 물었다. 그녀의 입술이 양 옆으로 굳게 다물어졌다. 나는 그녀의 발 사이로 보이는 대변 한 덩이를 애써 무시하면서 밝게 웃었다. 아무리 그녀를 좋아하는 나라고 해도, 그 자리에 더 이상 서 있는 것은 무리라는 이성의 경고음이 들려왔다.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양 옆으로 흔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교복 주머니 사이로 언뜻 보이는 체크무늬 손수건을 발견하고 전반적인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번득이는 눈빛을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청솔모 한 마리가 흙바닥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와 나를 보고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그녀와 나 사이에 시원하게 불어닥쳤다. 바람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앙다물어진 입술이 작게 벌어지더니 나를 향해 흰 이를 번득인다. 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은 후,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날, 터벅터벅, 산길을 홀로 내려오며, 나는 슬픔과 안타까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청순한 그녀, 얌전한 그녀. ...얼마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으면 그랬을까. 그래도 대변 정도는 화장실에서 해결해도 됐을 텐데. 여자는 엉덩이를 차갑게 하면 안 좋다고 책에서 읽었는데... ...그녀, 운 나쁘게 치질에 걸리지나 않았으면... 아니, 그보다 나중에 뒤처리를 손수건으로 해결하기에는, 손수건이 너무 작지 않을까. 그 날, 나는 그녀로 인해 두 번째로 잠을 설치게 되었다. 다음날이었다. 잠을 설쳐 늦잠을 자게 된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발걸음도 무겁게 학교안으로 들어갔다. 지각을 한 죄로, 담임 선생님에게 머리통을 쥐어박히고 교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의식적으로 그녀를 쳐다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내 눈은 어느새 그녀의 뒷모습을 쫓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가라앉은 분위기의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느끼지도 못하고, 나는 침울하게 의자에 앉았다. 그 때 내 손은, 첫 번째 수업 시간에 들어야 할 교과서를 미리 꺼내 놓기 위해, 책상 안을 헤매고 있었다. 겨우 교과서를 찾아 책상 서랍에서 꺼내다가, 나는 손을 멈칫했다. 책상 속 교과서들 사이에 끼워진 분홍색 편지 봉투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가장자리가 레이스 모양으로 처리된 연분홍색 편지 봉투는, 누군가를 그대로 연상시키게 하는 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누가 볼새라, 서둘러 편지 봉투를 뜯어 편지지를 꺼냈다. 쉴 새 없이 쿵쾅거리는 심정은, 어제 그렇게 어색하게 헤어진 그녀가 내게 어떤 내용의 편지를 보냈는지 궁금하다고 말해오고 있었다. 편지지는 하늘색에 흰색 구름이 그려진 것이었다. 그녀다운 얌전하고 여성스러운 편지봉투와 편지지이다. 그리고, 편지지에는 역시나 그녀를 그대로 빼닯은 단정한 글씨체로 한 마디의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닥 쳐.] ...그녀는, 그 후 졸업할 때까지 내게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그녀에게 나는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으며, 또한 첫사랑에 큰 상처를 입게 된 나 역시, 그녀를 의식적으로 피하곤 했다. ...다시 한 번 내 가슴 아픈 첫사랑을 생각하자,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매서운 바람을 얼굴로 받아내며,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온 기념으로 내 슬픈 첫사랑의 기억을 가슴 속에 묻어 버리고 새 출발을 하고 싶은 마음에, 산으로 올라와 이 고생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나는 순수한 문학소년이었어. 나는 정체 불명의 감회를 느끼며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더 이상은 너무 추워서 못 먹겠다. 자리에서 일어나 산을 내려가려다가,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 화면에 찍힌 부재중 통화 목록과 문자 메시지들이 내 시야를 어지럽힌다. 나는 물끄러미 부재중 통화 목록을 눈으로 흝어보았다. 민섭, 영훈, 그리고 도연... 이 세 명이 번갈아가며 전화를 한 모양이다. 특히나 압도적으로 많은 민섭의 이름을 보고, 나는 민섭이 왜 이렇게 전화를 많이 했는지 잠시 궁금증을 품었다. 이대로 부재중 통화 목록을 무시해 버리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어제와 오늘, 이틀 사이에 이 녀석들이 나에게 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악감정의 양들이 만만치 않다. 차라리, 이 쯤에서 녀석들을 도닥거려, 이 세 명이 남몰래, 내 암살 모의라도 획책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영훈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 상대로는 역시, 주구장창 잔소리를 퍼부을 민섭이나, 화부터 내고 볼 도연보다도, 침착한 영훈이 낫다. “...지금 어디야?” 통화음이 몇 번 울리기가 무섭게 영훈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씨발, 소리를 연발하는 도연의 말과, 어디래? 어디야? 하고 물어대는 민섭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세 명이 함께 있는 듯 싶었다. 야, 뭐래? 하고 소리치는 민섭과, 핸드폰 이리 줘 봐, 하고 외치는 도연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져간다. 아무래도 영훈이 핸드폰을 들고, 다른 두 명에게서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는 것 같았다. 봐라, 이런 사실 하나를 두고 봐도, 영훈이 다른 두 명보다 이성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에도, 영훈은 도연처럼 욕을 퍼 붓거나, 또는 민섭처럼 걱정을 빙자한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저, 영훈은 “내 목소리 들려? 지금 어디 있어?” 하고 태연히 물어보았을 뿐이다. 나는 도시락을 옆에 끼고, 천천히 산을 내려오며 말했다. “...응, 나는 지금 운동장 옆 산이다.” 내 말이 끝났을 때, 영훈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씹,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너 지금 당장 안 내려와?” 갑작스런 영훈이 고함 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깜짝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저만치로 멀리 떼내었다. 예상치 않았던 일이라 그런지 가슴이 다 벌렁거린다. “대체 산에는 왜 올라가?! 너 거기에서 또 변태 만나면 어떻게 하려고~!“ 변 태. 그 소리에, 나는 비로서 잊고 있었던, 영훈에 대한 특기 사항을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내려...” 가고 있다고 말하려 했는데, 이미 잔뜩 흥분한 영훈은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장 내려와~! 아니, 내가 운동장으로 간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 핸드폰에서 통화 종료음이 흘러나온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깜박 잊고 있었던, 영훈과 변태, 그리고 산과의 상관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음, 그러니까... 우선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은, 내가 얼굴치라는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누구인지 대충 구별만 되면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든 상관 없다는 주의를 가지고 있다. ...사실, 이건 얼굴치라기보다는, 단순히 상대방에게 무관심한 것이라고 언젠가 타박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나는 상대방의 외모에 대해 상당히 무감각한 편이어서, 영훈이나, 또는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 생겼나,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지내면서, 주위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외모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영훈은, 건드려보고 싶은 타입이었다. 이 건드려보고 싶다...라는 말은 참 함축적인 언어여서, 얼핏 들으면 다른 의미로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를테면, 이유없이 한 번 때려보고 싶다거나, 또는 놀려보고 싶다거나, 혹은 찔러보고 싶다거나... 사람들이 영훈에 대해서 말하는 ‘건드려 보고 싶다’ 는 것은, 불행히도 그 중에서 ‘찝적거려 보고 싶다.’ 라는 종류의 것에 속했다. 하긴, 내가 봐도 영훈이 조금 재수없는 부류이긴 하다. 언제나 어른스러운 척, 침착한 척은 혼자 다 하는, 영훈의 말끔한 얼굴을 태연히 마주 대한다는 것은, 보통의 성격으로는 어려운 일이다. 일명 ‘ 맏형 같은 모범생 타입’ 으로 불리우며, 사람들에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영훈은, 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유달리 변태에게 시달렸다. 도연의 말에 따르면, 영훈은 ‘ 잘 걸리는 모양 ’ 이었다. 무엇에? 하고 순진하게 묻는 민섭에게, 도연은 대답 없이 영훈을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물론, 도연이 민섭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던 이유가, 영훈이 너무 불쌍해서였다던가, 혹은 민섭이 그 상태로 순진하게 있어주기를 바래서...일 리는 없었다. 다만, 도연은 그 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영훈의 모습에 기가 질렸을 뿐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영훈의 말끔한 외모에 속아서, 녀석이 정말로 성실하고 어른스러운 녀석인 줄 알고 있지만, 진실은 전혀 달랐다. 무엇보다, 폭주한 영훈이 웃으면서 의자를 들고 창문을 깨부수던 모습을 목격했던 학생들이라면, 절대로 영훈을 만만히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운 나쁘게도 도연과 나는 영훈의 폭주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했던 학생들 중의 한 명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훈이 ‘ 잘 걸린다’ 라는 말을 하면서도, 영훈의 더러운 성질머리에 가려진 그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최초로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은, 역시 학교 뒷산에서였다. 그 때, 나는 아직 첫사랑의 실연을 당하기 전이었고, 영훈과 민섭, 그리고 도연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세 명을 피해, 마음의 안식처를 찾아 도시락을 들고 산에 올라갔다가, 역시나 나를 쫓아온 세 명에게 둘러싸여 이를 갈면서 도시락을 먹던 중이었다, 느릿하게 도시락을 먹다가, 나는 아래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 소리를 들었다. 풍부한 성량과 고음, 그리고 히스테릭한 떨림... 민섭과 영훈은 당장 비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미스 장이다~!” 민섭이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는 이미 도시락 뚜껑을 덮고 있었다. 미스 장, 그녀가 누구인가. 중학교 안에서 여왕으로 군림하며, 덩치 큰 남학생들의 엉덩이를 각목으로 두들기는, 우리 학교 최장신, 그리고 최고령의 노처녀 체육 선생님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녀로 인해 부러진 각목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녀로 인해, 그리고 엉덩이의 아픔으로 인해 매일 밤 잠 못드는 남학생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그랬던 그녀가, 유도 선수도 때려 눕힌다는 그녀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중대한 사건이었다. 서둘러 산을 내려가던 도중, 우리는 그녀가 비명을 지른 원인으로 짐작되는 ‘무언가’ 와 부딪혔다. 털이 수북히 난 맨 다리, 그리고 다리 사이에서 덜렁거리는 흉측한 무언가, 우리를 보고 놀란 듯 떠지는 작은 눈, 수염으로 뒤덮인 까만 얼굴... 그 ‘무언가’ 는 실로 괴이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잠시 패닉 상태에 빠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영훈은 역시 많이 접해 보았던 탓이었는지, 그 ‘무언가’ 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 내었다. “변태...” 말꼬리를 흐리며 이를 부득 가는 영훈의 팔을 붙잡은 것은, 본능적인 일이었다. 그저, 이대로 영훈을 내버려두면, 변태의 몰골이, 영훈의 집어던진 의자와 창문 꼴이 될까봐( 둘 다 수리 불가능한 상태로 망가졌다.) 나는 차마 영훈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이대로 영훈이 소란을 피우면, 옆에 있던 나까지 덤탱이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도연 역시 영훈의 다른 팔을 붙잡았다. 그 때, 변태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가 없다. 영훈을 잡고, 말 없이 변태를 바라보고 있는데, 변태의 다리 사이에서 달랑거리고 있던 것이 점점 커지면서 위로 올라갔다. 그 순간의 당황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지만, 나는 애써 태연한 척, 끝까지 변태를 지켜보았다. 사실,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막 이성에 눈 뜬 시기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의 것은 어떻게 생겼나..?, 내 것과는 많이 다를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변태의 것은, 까만 빛이 감도는 붉은 색을 하고 있었다. 털이 난 변태의 그 곳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는데, 뒤에서 민섭이 다급하게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이게 미쳤나 싶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민섭을 밀어내었다. 하지만, 민섭은 막무가내로 나를 뒤로 잡아끌었다. 그리고 그 때 들리는 익숙한 신음 소리... ...그랬다. 변태는, 우리 앞에서 마스터베이션, 일명 자위라고 불리는 것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때부터는 도연도 영훈을 말리는 것을 포기했던 듯 싶다. 다음 순간, 내 귓가로 격렬한 타격음과 함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버둥거리며 무슨 일인지 보고 싶어하는 나를 잡아 끌면서, 민섭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겨우 민섭에게 풀려났을 때에는, 이미 사건이 종료된 후로, 영훈과 도연은 널부러진 변태 옆에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변태를 끌고 내려가, 미스 장의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나온 다른 선생님들에게 변태를 넘기면서도, 영훈은 미처 화가 다 풀리지 못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일로, 우리가 아침 조례 시간에 불려나가 표창장을 받았던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영훈이 얼마나 변태들을 싫어하고, 또 변태라는 것 자체를 증오하는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후로도 영훈은 종종 우리 앞에서 변태들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변태의 종류는 실로 다양해서, 일상적인 바바리 맨을 비롯해, 츄리닝 맨, 빤쓰 맨, 그리고 망토 맨까지... 거기에, 드물다는 여자 치한까지 섞여 있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런 사연들로 인해, 영훈은 유달리 변태라는 말에 민감했고, 또한 산에 올라간다는 것을 싫어했다. 녀석이 얼마나 산에 올라가는 것을 싫어했는지는, 그 후 내가 산에 올라가 점심을 먹을 때마다, 화를 버럭버럭 내면서 나를 쫓아왔던 사실들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하며 운동장으로 내려왔을 때, 나는 나를 향해 예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영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 녀석, 또 화가 났나 보다. 물론 영훈이 변태를 싫어하고, 또 산을 싫어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런 자신의 감정들을 내게까지 강요하는 것은, 내게 있어 이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만약 내게 산에 올라간 일로 뭐라고 말을 한다면 맞서서 화를 내 줘야지, 하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는데, 영훈은 아무 말 없이 더 짙어진 미소를 띄고 나를 보기만 했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을 했을 때는, 언제나 내게 안 좋은 일만 생겼던 듯 싶은데... 라고 생각을 하기도 전에, 등 뒤로 다가온 도연이 거칠게 내 뺨을 잡아 흔들었다. “그래, 혼자서 산에 올라가서 먹으면 밥 맛이 좋냐? 좋아?” “어어...” 순식간에 당한 일이라,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뺨을 잡혀 버린 나는 얼얼하게 아파오는 뺨을 붙들고 도연을 노려보았다. ...지금 이 녀석이...! 왈칵 화를 내려다가, 여전히 웃음 짓고 있는 영훈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 주춤거리며 이 상황을 분석해 보았다. ...왠지, 무언가가 불길하다. 도연에게 팔을 잡혀 걸어가면서, 나는 이 괴상한 상황이 무엇인지 열심히 생각해 본 결과, 결국 내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야...” 말을 하려는데, 옆에서 영훈이 생글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산에 올라간 거야? 혹시, 앞으로 점심은 교실에서 먹자고 했던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잊었다, 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민섭의 표정이 어둡게 바뀌었다. “...그건 또 뭔 말이야?” 의외의 말에 멍청히 대꾸하자, 민섭이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잊었어. 또 잊은 거지? 그렇지?” 체념한 어조로 말하면서도, 왜 민섭이 나를 가라앉은 눈으로 보기 시작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니, 애시당초, 고등학생 씩이나 된 사내놈들이 왜 우르르 뭉쳐서 밥을 먹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내 주위에는, 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증거로, 도연이 우두득, 소리를 내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영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어제는, 집에 잘 갔어?” 어제 일을 꺼내자, 민섭의 눈빛이 한층 우울해졌고, 도연은 이를 빠드득 갈아댔다. “그런데, 은성아. 아버님은 잘 계셔?” ...이제 이 녀석이 무슨 속셈인지 알겠다. “...잘못했다.” 나는 힘없이 사과했다. 기필코, 다음 말이 나오게 해서는 안 된다. “뭘?” 능글거리며 웃는 영훈의 모습이, 쥐어박고 싶으리만큼 얄밉다. “아. 하. 하. 그야 이것 저것...” 나는 서툴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속으로는, 되지도 않는 말과 웃음을 지으려니 열불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남몰래 이를 갈면서,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를 어색하게 지었다. “그러고 보니...” 말꼬리를 흐리는 민섭을 보면서 나는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영훈의 이 말 같지도 않은 수작은, 모두 내 아버지로 인한 것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상당히 자상하신 분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여성스럽다’ 라고 분류되는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영훈이 이 녀석은, 그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이상스러우리만큼 중년의 아주머니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그 것에는 아버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영훈을 ‘믿음직스러운 아이’ 라면서 무척이나 좋아했고, 전에는 언제든지 집으로 놀러오라고 영훈에게 말하기까지 했다. 물론, 나는 집으로 다른 누군가가 찾아오는 것은 질색이었다. 평소에는, 이런 내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집으로 찾아오는 일이 드물었는데, 오늘은 세 명 모두 단단히 화가 났으니, 이대로 집까지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버지는 ‘은성이 친구들이 오다니...’라고 상냥하게 웃으며 말씀하시겠지. 평소 집 안이 적적해 쓸쓸하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아버지가 이 녀석들을 반갑게 맞이할 것이라는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다. 그 예로, 아버지는 전에 이 녀석들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아예 자고 가라고 붙잡으셨던 적도 있으시니까. 하지만, 단호히 말해서, 나는 녀석들이 내 집으로 찾아오는 것도, 또 나의 밤 시간을 다른 누군가에게 침해 받는 것도, 모두 싫었다. “흐음...” 아직도 웃고 있는 표정을 한 영훈을 슬쩍 노려보며, 나는 떨리는 입가를 진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뭐, 그렇게 사과할 것까지는 없는데...” 상황을 감 잡은 도연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 녀석들에게 어떻게 되갚음을 해야, 잘 했다가 소문이 날까? 나는 푸들거리다 못해 경련이 일어나고 있는 얼굴을 슬쩍 숙여 녀석들의 시야에서 나의 표정을 감추었다. -5- “학교 생활은 재미있니?” 저녁 시간에 아버지는, 식사를 하시다 말고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반쯤 졸면서 음식을 먹고 있던 나는, 미처 아버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대답 대신 입 옆으로 국물을 주르륵 흘렸다. “...은성아.” 아버지는 그런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시선에는, 자식을 이해할 수 없는 부모의 고뇌가 구구절절 묻어 있어서,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학교에서는 어떻게 지내니?” 아버지는 그런 나를 조용한 눈길로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지셨다. 천천히, 아버지가 지금 무슨 질문을 하셨는지, 멍한 머리로 고민하다가, 나는 퍼뜩 잠에서 깨어나 생각에 잠겼다. 학교라... “담임 선생님은 어떤 분이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고민하는 나를 보다 못해, 아버지는 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질문을 하셨다. 담임 선생님...? 내가 할아버지 담임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일명 렛츠 고 선생님. 담임 선생님의 담당 과목은 영어였는데, 담임 선생님은 수업 첫날부터 우리에게 강렬히 기억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반 최초로 별명을 받은 선생님이 되었다. 처음, 담임 선생님이 카세트를 옆에 끼고 들어오실 때부터, 나는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감지했었다. 그 사실은, 담임 선생님이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자, 그럼 진도를 나가볼까.” 하는 말을 함으로써 더욱 확실시 되었다. 사실, 학기 첫 수업부터 진도를 나가는 선생님은 무척 드물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원성을 감수함과 동시에 선생님 자신의 귀찮음을 무릅쓸 만한 매리트가, 첫 날 진도 나가기라는 것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던 말던, 수업을 나가는 일명 독종, 이라고 불리는 선생님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첫 수업 이후로 학생들 사이에서 바닥을 도는 인기와, 또한 온갖 험담이 나도는 뒷소문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내가 이상한 느낌을 가진 부분은, 첫 수업부터 진도를 나간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1학년 3반의 담임 선생님이 누구였던가. 반에 관심을 보이지 않다 못해, 아예 자신이 담임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유유자적, 내 인생은 내가 산다, 라고 온 몸으로 외치는 듯한 너그러운 할아버지 선생님이, 바로 우리 반의 담임이었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안 되는 것은 안 되게 놔 두어라, 또한 하기 싫은 일은 하지 말자. 일이 이렇게 되어도, 저렇게 되어도, 모두가 귀찮으니 그냥 놔 두자, 라고 말하는 담임 선생님은... ...내 존경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학급의 모든 것을 임시 반장인 나에게 맡기고, 교무실에 앉아서 신문에 나온 오늘의 운세를 꼼꼼이 정독하시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가히 내가 꿈꿔왔던 이상형과 닮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보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그 이유는 담임 선생님이 언제나 멍한 얼굴로 자신만의 상념에 빠져 있기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실은 삼신 할미교라는, 우리 나라 토속 종교에 심취해 있으며, 또한 그 종교에서 시술하는 최면술에 걸려 저렇게 된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모든 것에 무관심한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의 욕을 먹어가면서, 첫날부터 수업을...? 만약 누군가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면, 나는 대단한 농담을 들었다고 콧방귀를 뀌면서 말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교실 앞에서 진도를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나의 존경하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은, 믿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우리 반의 다른 아이들 역시, 교과서를 펴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경악해 우우~! 하는 소리를 질러댔지만, 담임 선생님은 끄떡도 하지 않고 특유의 인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자. 교과서를 펴도록.” 그렇게 말하며, 담임 선생님은 카세트의 전원을 켰다. 아이들은 불평을 내 뱉으면서도 할 수 없이 교과서를 펼쳤고, 담임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둘러보며 카세트의 play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우리는 듣게 되었다. “Everybody student, Let's go~!" 담임 선생님의 육성으로 외치는, 그 영어 문장을 말이다. 렛츠 고~! 하고 외치는 마지막 말은, 그대로 메아리가 되어 교실 안을 멤돌았다. 교실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조용해졌고, 우리는 미처 표정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카세트를 바라보았다. 담임 선생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자, 그럼 카세트를 들으며, 모두 열심히 공부하도록. 반장.“ “...아, 네.” 나는 한 박자 늦게 담임 선생님의 부름에 답했다. 아무래도, 정신적 공황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에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 네가 책임지고 조용히 시켜라.” 담임 선생님은 이 말을 남기고, 교실 앞 쪽 창문 가에 서서 하염없이 어떤 상념에 잠겼다. 이미 현실 세계를 떠나, 자신만의 알 수 없는 망상에 빠진 듯한 담임 선생님의 얼굴은, 일견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Listen, and repeat~!" 하고 외치는 카세트의 영어 발음을 들으며, 조용히 자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의 영어 수업은 아직까지도 변함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 그래. 담임 선생님 말고...반 아이들은 어떠니?” 대답을 하지 않고, 숟가락 대신, 젓가락을 입에 문 나를 바라보며 아버지는 어색하게 다시 물었다. 대화가 필요해, 라는 얼굴로, 나를 간절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응시하며,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을 떠올렸다. 솔직히,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착하고 얌전한 편이었고, 말썽을 부리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 반 아이들 중에서도, 내 신경을 거스르는 녀석이 두 명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내 짝이었는데, 만난지 며칠 만에, 내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얄미운 녀석이었다. 사사건건 내 말에 시비를 걸면서 눈을 가늘게 접으며 나를 노려보는 짝꿍의 모습은, 사실 내게 그리 위협적이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상한 녀석, 할 일도 더럽게 없네, 하고 치부해 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한 녀석에 있었다. “...은, 은성아?” 떨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눈을 깜박거리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말하기 싫으면 말고...” 아버지는 소심하게 중얼거리면서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 드셨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 이빨에 긁혀 칠이 벗겨진 젓가락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 녀석을 잠시간이나마 생각했더니 다시금 뒷골이 당겨온다. 그러니까... 오늘도 역시, 그 녀석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국어 선생님의 차를 타고 반쯤 잠에 취해 등교한 후, 책상에 누우려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얼굴을 굳히고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내게 이런 행동을 하기 시작한 때가 언제였더라... “...반장.” 그래, 이렇게 내 자리 앞에 서서 나를 부르는 짓거리를 했던 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지금까지 충분하리만큼 참아왔다는 사실이다. “...뭐해? 부르잖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짝꿍이, 내 옆구리를 툭, 하고 치면서 이죽거렸다. 젠장, 불렀으면 말을 해야 할 것 아니야~! 하지만, 내 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은, 언제나처럼 오늘도, 나를 부르고는 손만 꿈지럭거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너.” 나는, 처음으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말이 뭐야?” 내 질문에, 앞에 선 녀석이 소심하게 얼굴을 붉히며 머뭇거린다. “반장, 저, 그게...” 임시 반장이 나라는 것은, 녀석이 그렇게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 귀찮아.” 나는 냉정하게 말하고, 고개를 책상에 파 묻었다. “...야.”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담임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푸욱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씹~!” 덜컹거리며 쓰러지는 책상을, 나는 풀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지금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네가 그렇게 잘났어?”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녀석의 모습 역시, 나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나는 일단 잠자코 쓰러진 책상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책상 위에 엎드려 보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서, 이 상황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야~!” 찢어지듯이 외치는 고함 소리가, 내 귓가를 맴돌면서 나의 숙면을 방해한다. 곧이어, 나는 거칠게 멱살을 붙잡혀 자리에서 일으켜졌다. “...네가 뭔데 나를 무시해?” 언제나 내 이름을 부른 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던 이름도 모르는 녀석은, 이를 바득 갈면서 나에게 물었다. 나는, 잠시간 고민했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시한 건, 너였잖아?” 결국,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의아한 듯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을 응시하며, 나는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이 녀석에게는 비웃음으로 들렸던 듯, 녀석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언제나, 나를 부른 후 용건을 말하지 않는 행위로 나를 귀찮게 했던 건, 너였잖아?” 내 말이 상대방에게 비꼬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말을 끝마치고 난 후였다. 하지만, 나는 상대방의 손에 잡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굳이 내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 일일이 내 말을 해명하는 것이 귀찮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 손 놔.” 그 때, 으르렁거리는 듯한 거친 음성이 들렸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단단한 손이, 나와 녀석 사이에 끼어들어 녀석의 손가락을 내 몸에서 억지로 떼내었다. “넌 또 뭐야~!”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잠깐, 저렇게 소리를 지르면 안 좋은데... 무엇보다... ...도연이는, 상대방이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라리면, 자신 역시 똑같이 행동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녀석이란 말이다. 대꾸도 하지 않고, 곧바로 주먹을 말아 쥐는 도연의 손을, 나는 황급히 붙잡았다. “뭐야, 결국 공주님이 폭발한 거야? 내가 뭐라고 했냐? 일주일이라고 그랬지?“ 민섭이, 씨익 웃으며 잘난 척 손을 흔드는 영훈을 흘겨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자랑이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미리 무슨 일이라도 해 놨어야지. 애 꼴이 이게 뭐야?“ ...지금 이 녀석들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내게 다가와 목가의 구겨진 셔츠를 정리해주면서 “괜찮아?” 하고 물어보는 민섭의 손을 탁, 하고 뿌리쳤다. 그 와중에, 내게서 손을 잡아 뺀 도연이 다시 한 번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만 해.” 영훈은 그런 도연을 잡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도연은 영훈을 돌아보지도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무뚝뚝하게 물었다. 날카롭게 치켜올라간 도연의 눈매를 보아하니, 녀석은 지금 싸움꾼 모드로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저럴 때는, 웬간한 것이 아니고서는, 도연을 설득하기 힘들다. “은성이가 싫어하잖아.” ...잠깐, 지금 뭐라고? 영훈의 말에 도연은 그제서야 나를 힐끔 돌아보았다. 나는, 도연을 향해 체념어린 한숨을 내쉬며 졸음에 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해. 문제 생기면, 나중에 내가 다 수습해야 하니까, 골치 아파.” “맞아. 그리고, 솔직히 이번 일은 은성이 저 놈이 잘못한 거다. 누구라도 그렇게 무시하면 열 받을 거라고.“ 단정짓듯 말하는 영훈을 나는 매섭게 노려보려다가...포기하고 졸음을 쫓기 위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너...내 이름 알아?” 그 때, 내 멱살을 잡았고, 또한 이제까지 나를 귀찮게 했던 놈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이름, 이름이라... “...너, 우리 반이야?” 나는, 일단 확인 차 그렇게 물어보았다. 내 앞에서 빈번이 얼쩡거리던 것을 보아, 아무래도 녀석이 우리 반일 확률이 크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다. 혹시, 녀석이 실은 내 선배였다던가, 또는 교복을 입기 즐겨하는 선생님이었다던가 할 수도 있지 않은가. 내 말이 끝났을 때, 주위는 조용했다. 너무나도 조용한 교실의 분위기에, 나는 잠이 조금 깨어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나를 향해 한숨을 푸욱 내쉬는 영훈과, 어이없어 죽겠다는 얼굴을 한 도연의 모습이 일단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내 앞에 서서 예의 음울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민섭과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녀석... ...그리고, 저런 죽일 놈~!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반 아이들이 보였다. 뭐야, 이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나를 악당으로 몰고 가는 듯한 사람들의 눈초리와 또한 싸늘한 표정들이 무척이나 마음에 걸린다. “...이...” 나에게 이름을 물어봤던 그 녀석은, 어깨를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이런 눈초리를 받을 만큼 무언가를 잘못했었나, 하고 다시 한 번 지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역시, 내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피해자일 뿐인데, 그런데... “으흑..씹, 뭐 저런 놈이...” 왜 저 놈이 울고 있는 걸까. 내게 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욕설을 연신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17세의 나이가 부끄럽지도 않은지 펑펑 울어제끼고 있었다. “하아, 결국은 공주님을 울려버렸군.” 영훈은 나에게 다가와 내 머리를 엉망으로 헝클어트렸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묘한 어투로 말하면서, 어쩔 수 없는 녀석, 이라는 눈으로 나를 보는 민섭의 눈초리가 재수없다. “쳇..” 이제야 싸움꾼 모드에서 벗어난 도연이 입을 삐죽거리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울고 있는 녀석과, 그리고 내 속을 뒤집다 못해 끓어오르게 만드는 세 명의 웬수들, 또한 나를 나쁜 놈 보듯 노려보는 반 아이들을 한 바퀴 빙 둘러보았다. ...역시나, 지금 상황에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자고 보자. 나는 아무 말 없이 내 자리로 걸어가, 책상에 엎드렸다. 히터를 등에 두고, 나는 곧 달콤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공주님이...” 또다. 첫째 수업 시간인 수학 시간 내내, 나는 공주님이...라는 말이 끼여진 속삭임을 내 주위 여기저기에서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속삭임 뒤에는, 여지 없이 나를 노려보는 시선들이 뒤따랐다. ...대체 뭘까. 아무래도 앞 뒤 상황으로 짐작해 보건데, 공주님이라는 이름은, 황당하게 울어제꼈던 아까 그 녀석을 지칭하는 말인 것 같다. 쳇, 그런데 나를 악인취급하는 반 전체의 분위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설마, 공주님이라는 녀석을 울려서...?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나쁜 놈이 된 것이라면, 정말 억울하다. 꾸벅꾸벅 조는 와중에도, 나는 이를 갈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공주님이라는 그 녀석은, 대체 왜 나를 귀찮게 구는 걸까. 혹시, 내가 모르는 새에 그 녀석을 괴롭힌 적이라도 있었던가...? 미처 그 일에 대해 생각할 사이도 없이,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렸다. 나는 오랜 습관에 따라, 반사적으로 일어나 선생님께 인사를 했다. 수학 선생님이 책들을 챙겨들고 교실을 나간 후에도, 아이들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랬다. 내가 착한 녀석들, 이라고 남몰래 예뻐했던 우리 반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나를 실망시키고 있었다. 나는 나를 훔쳐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당당하게... ...일단 책상에 엎드렸다. 역시, 어제 늦게까지 산책을 했던 여파가 큰 것 같다. “반장.” 그 때, 또다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잠결에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비비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공주님.” 나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내 앞에 선 녀석을 불렀다. 공주님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가진 녀석은, 얼굴을 붉히고 또다시 버벅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야, 이 녀석은. 역시나 이상한 녀석, 하고 판단을 내리며,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아, 젠장...! 내 이름은 공주님이 아니란 말이야~! 난, 신 현우라고..!“ ...누가 뭐랬나.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될만큼, 녀석은 고개까지 흔들며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신 현우, 맞지? 용건은 이걸로 끝이야?” “...어...” 녀석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신 현우라는 녀석같은 괴짜는 처음 만난다. 설마, 공주님, 아니, 신 현우라는 이 녀석은, 자신의 이름을 나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제까지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일까? 나는 꾸벅꾸벅 졸면서, 세상에는 괴상한 사람도 많군, 하고 남몰래 결론을 내렸다. “...야...” ...또다. 앞으로 휙 잡아당겨지는 힘에 의해 끌려가면서, 나는 불쾌한 감정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런 식으로 멱살을 잡히는 것은, 절대로 좋게 느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아니, 단호히 말해, 무척이나 기분이 나쁘다. “내가, 내가...” 신...뭐라고 했더라? 귀찮다. 그냥, 공주님이라고 부르자. 공주님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설마, 또 우는 건가? 나는 다소 난감함을 느꼈다. 아까처럼, 반 아이들이 나를 악당 보듯 바라보는 것은 사양이다. “내가, 너의 그 성격을 뜯어고쳐주고 말겠어~!” 공주님은 그렇게 외치면서, 씩씩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알 수 없는 투지에 불타는 공주님의 눈동자와, 그리고 울어서 발갛게 짓무른 눈가를 바라보며,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그러던지.” 내 멱살을 쥔 공주님의 손이, 힘없이 밑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나는 교복을 툭툭 털어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다시 자리에 엎드렸다. 세상에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갖가지 사건들과, 그리고 괴상한 성격의 인간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6- “좋게 말할 때, 있는 돈 다 내 놔라.” “뒤져서 나오면 각오 해.” 나는, 잠시간 고민에 빠졌다. 저런 쌍팔년도 식 깡패들의 대사는 이미 전멸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아니면, 저 협박 멘트는 특유의 참신성과, 전통성을 인정받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명언 목록 중 하나로 채택된 것인가? “돈 없어요.” 그에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얼핏 들으면 겁을 먹었다고 여길 수 있으리만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잘 들으면, 저 목소리가 조금의 떨림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협박업에 종사해 온 것으로 보이는 두 명의 선배는, 1학년 신입생의 건방진 대답을 금세 눈치챘다. “이게 씹~! 죽고 싶냐, 엉? 좋게 말할 때 내놔라, 응?“ 얼굴을 툭툭 치며 짐짓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선배의 위협에, 벽에 밀어붙여진 신입생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한다. “이게 전부예요.” 아무래도, 저 신입생은 강단이 없는 놈이던가, 또는 상황을 잘 파악하는 눈치 빠른 놈이던가 둘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처음 대답했을 때의 시건방은 어디로 가고, 지폐를 부여잡고 내밀어진 손 끝을 살그머니 떠는 모습까지 보여주는 것을 보니 말이다. 신입생의 손에 쥐어진 파란색 지폐 2장을 보고, 선배 한 명이 흠,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다른 선배는 그 정도 금액에 만족할 자신이 아니라는 듯, 눈에 힘을 빡 주고 신입생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거진 줄 알아? 엉?! 이게 지금 누굴 놀리려고 들어?” 이 외침에, 신음소리를 흘렸던 선배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이 광경을 보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 저 것은, 고함을 지른 선배가 잘못한 거다. 만약 내 친구가, 내 옆에서 저런 식으로 나를 비꼰다면, 나는 기필코 그 녀석에게... ...복수하는 것은 귀찮고... 생각해 보니, 내 일도 아닌데, 괜히 저 상황에 나 자신을 대입해 가며 생각하는 것도 우습다. 나는 생각을 중지시키고, 다시 돈 주고도 못 볼, 삥 뜯는 장면을 관람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세 쌍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이런, 들켰나. 그나저나, 얼마만큼 집중하면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도 모르게 되는 걸까. 나는 소리가 날까봐 내려놓지도 못하고 들고 있었던 프린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저린 팔을 주물렀다. 툭 툭, 하고 주먹으로 두들기자, 피로로 뭉쳐진 팔이 시원하게 고통을 호소해온다. “이 새끼, 넌 또 뭐야~!” 선배 한 명이, 그런 나를 향해 발악하듯이 외쳤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다른 사람에게 삥 뜯는 장면을 들킨 것이 어지간히 창피한 것 같았다. 나는, 선배들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음악 선생님 심부름 온 사람인데요.” 잠시, 선배들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푸들푸들 떨리는 선배들의 입가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지금 당황한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반장...!” 그 때, 벽에 밀쳐졌던 신입생이 앞으로 몸을 내밀면서 나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호칭을 내뱉었다. 짤막한 탄성을 곁들여 내뱉여진 그 말에, 선배 한 명이 비로서 정신이 든 얼굴로 고개를 흔들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호오, 꼴에 반장이라고 자기 반 학생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거냐? 어쩌지? 나는 모범생이라고 꼴갑 떠는 것들이 제일 싫거든.“ 나를 향해 건들 건들 다가오면서, 이를 드러내는 선배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깐요.” 나는 일단 손을 들어, 내게 다가오는 선배에게 정지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런 내 모습에 선배의 입가에 매단 비웃음이 더욱 진해진다. “이제와서 겁이라도 난 거야? 왜, 도망치려고?“ ...정곡을 찔렸다. 사실, 도망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조금은 찔끔하는 심정이 되었다. “너, 3반이야?” 나는 턱짓으로 신입생을 가리키면서 정중하게 물어 보았다. 내 말에, 신입생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만약 우리 반인줄 알았으면,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면, 구경이고 뭐고 때려치고 그대로 나가버렸을 텐데, 오늘은 운이 없었다. 나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내게 남겨져 있는 선택의 방법이라는 것 자체가 한정되어 있었기에, 현 처지에서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갈 무언가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나는 17년간 살면서 깡패를 공식적으로 만나는 경험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이 옆 반 아이들에게 과자를 강탈당하면서 살아갈 때에도, 초등학교 앞에 숨어 있던 중학생 형아들에게 버스 차비를 빼앗길 때에도, 신기하리만큼 내 주변에는 양아치 한 명 보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내 인생 처음으로 돈을 뺏기고 얻어맞을 것인가... ...하다가, 나는 갑자기 불쑥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애시당초, 음악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수업에 사용할 프린트를 음악실로 들고 올 때까지만 해도, 나에게는 다음에 할 계획이 철저하게 짜여져 있었다. 프린트를 둔 후에, 교실로 돌아가 히터의 따땃함을 만끽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자야지, 하고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그런데...!! “...저, 돈 안가지고 있는데요.” 나는, 일그러지는 표정을 애써 수습하며, 정중하게 현재의 내 처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역시나 당연한 수순으로 무시당했다. “없으면, 다른 걸로 갚는 수밖에.” 쌈박한 대답이다. 그 단순한 논리에, 나는 그만 감탄의 얼굴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너 이 씹새~” ~끼, 라는 욕설을, 선배가 내뱉기 전에, 나는 최대한 우호적으로 웃으며, 나와 같은 반이라고 우기는 1학년을 가리켰다. “그럼, 가서 돈 가져오겠습니다. 대신, 저 녀석을 여기에 맡겨두고 가죠.” “...” 선배의 걸음이 멈춰졌고, 1학년의 고개가 위로 번쩍 치켜올려졌다. 나는, 한 점 부끄러움도 없는 떳떳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누가 보아도, 성실하고 정직한 학생이라고 평할 법한 내 표정을 보고, 그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야, 그걸 누가 믿어~!” 선배 한 명이, 자신의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냅다 소리를 친다. 나는, 그런 선배에게 다가가 친근한 척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황당한 듯 입을 벌린 선배의 옷깃에 매달린 보푸라기를 떼어주며, 나는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저 녀석과 저는 같은 반입니다. 물론 짐작하고 계시겠죠?“ 끄덕끄덕. 아래 위로 흔들리는 고개를 확인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저 녀석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친한 친구입니다. 알고 계시죠?” 여기서, 선배는 잠시 망설이는 빛을 띄었다. 그러다가, 선배는 겨우 망설이면서 말을 했다. “그,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야, 이 씹~! 넌 저 말을 믿냐! 게다가 저런 범생이가 나가서 선생이라도 물고 오면 어쩌려고!“ 어물거리는 선배의 머리통을 세게 후려치면서, 다른 선배 한 명이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나는, 그런 수도 있었군, 하는 표정으로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줬다. “맞아, 너 이~!” “머리, 안 아프세요?” 이 틈을 타, 나는 친절하게 선배의 머리를 가리키며 물어보았다. “엉? 아... 응. “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선배에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슬쩍 말을 흘렸다. “굉장히 큰 소리가 나던데... 제가 봐도 상당히 무식하게 때리더군요.“ “...이~!” 그 말이, 결정타였던 듯 싶다. 선배는, 맞은 머리를 문지르며, 아까 자신을 때렸던 선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너, 내가 니 졸개야? 엉? 왜 툭하면 때리는 건데,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그보다, 저 녀석 도망간다.” 다른 선배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선배들의 얼굴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몸을 돌려 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 신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복도를 뛰어가려던 그 순간... ...나는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너, 죽었어~!” 씩씩거리며 나를 쫓아 달려나온 선배가 거칠게 내 멱살을 잡고 일으켜세운다. 그대로 나를 끌고 음악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선배의 뒤에서, 어이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넌 또 뭐야?” ...이 싸가지 없는 말투는, 어디선가 많이 들은 목소리다. 끼기긱, 안 돌아가는 목을 억지로 돌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큰 손이 내게서 선배의 손을 떼내었다. ...익숙한 광경...이라고 나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뭐야, 이것들은?” 도연이가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물었을 때, 선배들 역시 티꺼운 눈으로 도연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이 씹새는?” 서로가 동시에 상대방의 정체를 궁금해하고는, 이번에는 화르륵 불타오른 얼굴이 되어 상대방을 노려본다. 그리고, 선배들과 도연은, 곧 음악실 안으로 나뒹굴 듯 들어가 열심히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한숨을 내쉬면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았다. 나와 같은 반이라고 우기는, 1학년 학생이 갑작스레 시작된 싸움판을 넋이 나간 얼굴로 보고 있는 게 보인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떠 있는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여기서 더 늦으면, 1교시가 시작되기 전에 잠을 잘 수 있는 시간이 없어진다. 다행히, 승부는 곧 결정났다. “...그런데 이것들은 뭐야?” 널부러진 선배 한 명을, 발로 툭, 차면서 도연이가 그렇게 물었을 때, 나는 다소 막막한 심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나는 터벅터벅, 1학년에게 다가가, 그 앞에 서서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내 미소를 정면에서 마주 본 1학년 학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고맙지?” 내 말에, 1학년 학생은 잠시 동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마움을 느끼겠지. 그런데, 설마 맨입으로 고맙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자, 수고비는 적절한 선에서 받을게.“ 난방이 잘 된 음악실 안에, 갑자기 한기가 몰아닥쳤다고 생각한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선배들의 신음소리마저 사라진 조용한 음악실 안에서, 도연이가 소리 없이 내 등뒤로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 “야, 저기, 난 네가 다른 사람에게 맞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러니까, 깡패나 그런 사람에게 말이야. 그런데....“ “...응.”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1학년의 손을 잡아 위로 들었다. 1학년의 손에 들린 파란색 지폐 두 장이 사랑스럽다. “그런데...” 도연은, 차마 말하기 힘든 것을 고백하는 것처럼 머뭇거리며 뜸을 들였다. 나는 그 사이, 1학년 학생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어차피, 상납할 돈이었으니까, 아까울 것도 없지? 사실, 답례를 바라고 도움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네가 이런 식으로 꼭 은혜를 갚고 싶다니 어쩔 수 없지.“ 나는 다소 침울한 어조로, 답례와 은혜라는 말을 강조하며 1학년 학생의 손에서 돈을 빼앗아 집었다. 내 손에 들어온 돈을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은 후, 이번에는 선배들에게 다가갔다. 피로 얼룩진 선배들의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역시나 깍듯한 후배의 모습으로 말했다. “자, 그럼... ...어린 후배에게 기부 좀 하시죠, 선배님?“ “...어째, 네가 다른 사람들 삥을 뜯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연은, 그런 내 뒤에서 심란하게 중얼거렸다. “...허어?” 기묘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도연을 무시한 채, 나는 매점 아주머니에게 밝은 어조로 말했다. “그럼 주문한 곰보빵 54개는 2교시 끝난 후에 1학년 3반으로 배달해 주세요.” “물론이지.” 선불로 돈을 지불하고, 예쁘다고 사탕까지 공짜로 받은 나는, 기쁜 마음으로 교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 내 옆에는 도연이 바짝 붙어 쫓아오고 있었다. “...가끔씩...” “응?”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면서 도연을 바라보자, 도연은 기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됐다. 에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말을 하는 도연을, 나는 다소 음침한 눈길로 바라보며 헤벌쭉 웃었다. “...이건 뭐지, 반장?” 쉬는 시간에 배달된 빵을 앞에 두고, 맨 앞에 앉은 녀석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우선 반의 앞 뒤 문을 모두 걸어 잠근 후, 교탁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우리 반에 사는 거야. 모두 배고프지? 자, 부담갖지 말고 먹어. “ 밝게 웃으며 말하는데, 어디선가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쪽을 힐끗 바라보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낯이 익은 학생 한 명이 거세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 동안 너희들에게 미안했어. 명색이 임시 반장이 되어서, 너희들에게 제대로 해 주는 게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내가 다소 쑥스러운 듯, 볼을 붉히며 그렇게 말했을 때, 우리 반의 아이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동안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정말 미안해.” 고개를 까닥거리며 말하자, 내 눈길을 정면에서 받은 앞 자리의 녀석이 황급히 몸을 뒤로 조금 물렸다. “모두 어서 먹어.” 나는 반을 휘익, 둘러보면서 재촉했다. 어서 먹어야지, 다음 말을 꺼내지.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 반 여기저기에서 빵 봉지를 벗기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와중에서도 책상 위에 놓인 빵을 쳐다보지도 않고 가자미눈으로 꼿꼿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몇몇 인간들은 과감히 무시해버리자. 나는 맛있게 빵을 먹는, 배고픈 17세 학생들을 둘러보며, 기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앞으로 우리 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고 싶어.” 아이들은 나를 향해 신뢰가 담긴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그래, 너희들도 내 마음을 아는구나. 역시, 우리 반 아이들은 믿음직하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내 계획을 말하겠다.” 나는 교탁을 팡팡, 두드리면서 말했다. 아이들의 눈동자에 스미는 불안감을 못 본 척 무시하면서,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고 1이야. 그리고, 나는 우리 반 학생들이 입시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지금부터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고 생각해. 물론, 나는 고 1이나 되어서, 왜 공부를 해야 하냐고 반발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어. 나는 너희들에게 최적의 공부 환경을 제공해주고 싶어. 따라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타 반 학생들의 우리 반 출입을 금지할 것을 제의한다.“ 케켁, 하고 앞에 앉은 학생 중 한 명이 먹던 빵을 입에서 뱉어내면서 콜록거렸다. 그러기에 좀 천천히 먹을 것이지,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그와 유사한 기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그게 뭐야~!” 그 중 한 녀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낯이 익은 얼굴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에...그러니까...” 나는 잠시 생각한 끝에 말을 이었다. “공주님?” “아니라니까~!” “좋아, 공주님,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공주님이 아니라니까~! 으악, 내 이름, 또 잊어먹었지, 응?” 발악하듯 외치는 공주님을 옆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도닥거리며 자리에 앉힌다. “...현실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생각 안 해?” 삐닥하게 말한 것은, 내 짝꿍이다. 나는 짝꿍을 향해 여유만만한 웃음을 지었다. “어떤 점이?” “선생님의 심부름이나, 또는 물건을 빌리기 위해 오는 학생들은 어떻게 차단할 셈이지?” 나는 그 말에,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따라서는 방법이 있지. 담임 선생님의 허락 하에 출입을 통제하면 되니까. 화장실은 정해진 시간에만. 그리고 심부름하는 사람은, 미리 문을 두드리면서 용건을 말하도록. 나머지 시간에는, 우선 시범 케이스로 약 1주일 정도는 앞 뒤 문을 잠궈놓고 생활해 보는 걸로 할까.“ 거기까지 느긋이 말했을 때, 어쩐지 나를 보는 반 아이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만약에 우리들이 싫다고 할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데?” 공주님은 심란한 표정으로, 책상 위에 놓인 빵을 바라보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공주님과,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며 믿음직한 반장의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는, 사람은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 내 말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마 스스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일 거야. 그러니 나는 아마,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슬프지만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려...“ “잠깐, 난 반대해~!” 물렁한 담임 선생님께 말한다는 내 말에 여기저기서 손들이 번쩍 위로 치켜올려졌다. 나는 올려진 손들을 무시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담임 선생님께 여쭤 봐서, 그 사람의 집에 전화를 걸고 싶어지겠지. 아드님의 학업 성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말이야. 아아, 물론 귀찮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반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나는 얼마든지 귀찮음을 감수할 생각이 있어. 자, 그럼 반대하는 사람? “ 손들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고, 반 아이들은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침묵을 지켰다. “반대하는 사람 없으면, 모두들 동의한 것으로 생각할게.”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반을 한 번 둘러본 후 자리로 돌아갔다. 이 것으로, 우리 반을 자기 반처럼 출입하는, 그 지긋지긋한 녀석들을 만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간절히 바랬다. -7- “허어, 벌써부터 공부를?” 담임 선생님은, 내 짤막한 보고에 허허로운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셨다. 나는,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더군요.” 아부하듯 한 말에, 담임 선생님은 허허,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래, 좋은 일이지. 하고 싶다고 하면, 하게 둬야지, 별 수 있나.“ 그 말을 하신 후, 담임 선생님의 눈동자는 무언가에 홀린 듯 몽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 후, 담임 선생님은 어떤 상념에 빠져 말이 없었다. 나는 그런 담임 선생님에게 예의바르게 인사를 한 뒤, 교무실을 나섰다. 당당하게 교실로 들어가자, 반 학생들이 나를 불안한 눈으로 바라본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담임 선생님이 설마 내 말에 반대하실 것 같니? 하는 의미의 끄덕임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던지, 몇몇이 어우~, 하는 늑대울음 소리를 내며,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정말 할 거냐?” 의자를 빼서 자리에 앉았을 때, 짝꿍은 나를 흘겨보면서 못마땅한 얼굴로 물었다. 나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대체 왜 그래? 하는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짝꿍은 대답 대신, 생뚱맞은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반장 선거는 대체 언제냐?”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해주었다. “다음 주.” “...휴우...” 왠지, 저 한숨의 의미가 상당히 마음에 걸리는 순간이었다. “문 열어~!” “어우, 씨, 야, 책 좀 빌려 가자~!” 이런 식으로 거세게 몇 번 문을 두들기는 일이 있은 후로, 우리 반의 쉬는 시간은 별 다른 일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10분간의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문제는, 바로 점심시간이었다. 나는 느긋함을 가장한 여유로운 표정으로 도시락을 꺼냈다. 날씨가 추우니, 당분간 산에 올라가 도시락을 먹는 건 보류하자. 그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점심 시간마다 찾아와 (억지로) 도시락을 같이 먹는 그 세명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는 것이다. ...이대로 나에게 질려 떨어져 나가주면 더 좋고,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무언가 찜찜한 기분이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반장, 이건 아무래도...” 그런 나를 향해, 반 아이들 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그 때였다. “이 씨발~! 당장 문 안 열어?!” 거친 욕설과 함께 교실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게 익숙한 음성이 아니어서, 나는 반 아이들을 둘러보앗다. 반 아이들 역시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닌지, 불안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 해 놓으면 그냥 넘어갈 줄 알아?! 내 돈 뺏어간 놈, 잡히면 죽는다!“ 굉장한 사연이 깃들여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침이었다. 곧이어 금방이라도 문을 부술 것처럼, 문을 두드리는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간 고민했다. 이것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사건이었다. 내 고민을 중지시킨 것은, 짝꿍이었다. 짝꿍은 얼굴을 험상궂게 찡그리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뒷문으로 걸어갔다. “이 씨발, 너희들 다 죽었어~!” 문 밖에서 그런 소리가 외쳐졌을 때, 짝꿍은 침착한 태도로 교실 뒷 문을 열고 있었다. “잡히기만 하면...어엇?!” 갑작스레 열린 문 안으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우루루 넘어졌다. 아마, 거세게 교실 문을 두드리던 중에 갑자기 문이 열려 저 변을 당한 것 같았다. 그것은, 문을 연 짝꿍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짝꿍은 그들과 얽혀져 교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이 씹~! 어떤 새끼야?“ 그 중, 가장 나중에 넘어져 충격이 덜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마침, 그 학생과 눈이 마주친 나는, 나도 모르게 짝꿍을 바라보았다. 그 학생은, 거칠 것 없이 그대로 짝꿍에게 덤벼들었다. 마침 고개를 들고 바닥에서 일어나려고 하고 있던 짝꿍은, 침착하게 몸을 움직여 날아오는 주먹을 피했다. 그것이, 주먹을 날린 학생을 상당히 쪽팔리게 한 것 같았다. “씨발!” 그 말만을 소리친 후, 그 학생은 그대로 짝꿍과 어울려 싸우기 시작했다. “어? 무슨 일이야?” 교실 문 밖에서 웅성거리며 교실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을 제치고, 익숙한 모습들이 나타났다. 그 사람들은, 불행히도, 내가 교실 문을 잠궈서라도 내 곁에서 쫓아내고 싶었던 존재들이었다. 나는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뻗은 채, 입을 벌리고 있는 사람과 마주쳤다. “어? 씹 새끼, 너 내 돈 당장 안 내놔?!” 가슴에 달린 배지의 색으로 보아, 나의 선배로 추정되는 그 사람은, 그렇게 외치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다음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아이들은 서로 뒤엉켜, 상대방이 누구인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채 주먹을 날렸고 비명 소리가 여기저기서 교실 안을 날아다녔다. “이 새끼~!” 나를 향해 누군가가 이를 갈면서 주먹을 날렸고, 나는 침착하게 그 주먹을... ...피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그 주먹에 내 얼굴을 가져가 박은 꼴이 되어 버렸다. 그만 피하는 방향을 잘못 선택한 것이다. 거센 소리가 날 정도로 주먹에 이마를 박은 내가 주춤한 사이, 내게 주먹을 날린 상대방 역시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놀랄 만도 했다. 방금, 내가 얼굴을 주먹에 박으면서 엄청난 소리가 났었으니까. 그 때, 내게 주먹을 날린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머리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 뒤에서 민섭이 씨근덕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 얼굴이~!” ...더 이상은 말하지 마라. 쪽 팔린다. 나는 처참한 얼굴 표정을 애써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와장창~!]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나는 침착한 얼굴에 미소를 띄고, 맨손으로 창문을 깨부순 영훈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 자식은 왜 또 화가 난 거야?! 어떤 멍청한 녀석이, 가만히 있는 영훈의 뒤통수라도 때린 것 같다. 안 그러면, 영훈이 저렇게 화가 날 리가 없으니까. 얼마나 놀랬던지, 사람들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고, 모두들 영훈을 기겁해서 바라보았다.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공중에서 탁탁 털면서, 생긋 웃는 영훈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 싸이코틱하다. 저 녀석, 저 상태에서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도발하면, 그 사람을 잡아 반 죽여놓겠지. 다행히, 저 상태의 영훈을 건드리는 바보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네모난 턱의 학생 주임 선생님이 나타나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이게 무슨 꼴이야~!” 야~! 야~! 야~! 라는 메아리가 교실 안을 울려퍼졌다. 그제서야, 상황을 깨달은 아이들이 서로를 때리기 위해 쳐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리고, 바닥에서 옷을 털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얼굴을 계속해서 만져대는 민섭의 손을 탁, 하고 뿌리쳤다. 아까부터 귀찮아 죽겠다, 이 녀석. 누군가의 피를 셔츠깃에 묻힌 도연이 내 옆으로 다가와 혀를 쯧쯧, 하고 찼다. “그러기에 내가 싸움 가르쳐준다고 할 때, 순순히 배워두지.” “야, 너는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엉?” 민섭은 음울한 눈으로 도연을 노려보았다. 이 녀석들, 이젠 자기들끼리도 잘 싸운다. 나는 그런 둘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하여간, 너희들 때문에 내가 힘들어 죽겠다. “어쭈? 지금 그 표정은 뭐냐?” “...왠지, 기분이 안 좋아지려고 한다.” 저 두명의 말은 무시하자. 그보다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듯한 주임 선생님이 더 문제다. “너희들 모두, 당장 교무실로 따라와~!” 우리는, 그렇게 교무실로 죄인마냥 끌려갔다. “...주동자가 누구야?” 교무실 안에 이 많은 아이들을 모두 들여놓을 수는 없었던지, 주임 선생님은 교무실 앞에서 아이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뭐, 따로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아이들의 시선이 가서 닿는 사람들만 잡아끌고 들어가면 됐으니까. “이 녀석들, 얼른 안 들어와?!” 그런데, 왜 나까지 끌려 들어간 건지, 나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반장이라서 그런 걸까. 정말 억울해진다. “휴우...이 녀석들, 너흰 선배가 되서 부끄럽지도 않냐? 대체 왜 1학년 신입생 반에 가서 행패는 부린 거야, 엉?!“ 학생 주임 선생님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담배를 빼서 입에 물며 물었다. 그 말에, 한 쪽에 서 있던 선배들이 고개를 숙였다. 그 중 몇몇은,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며, 우리 1학년을 향해 이를 갈았다. “니네가 깡패야, 학생이야? 내가 다시 한 번 이런 일 일어나면 그 때는 가만 안 둔다고 그랬지?!” 주임 선생님은 스스로의 화를 주체 못 한 듯, 담배를 집어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만만한 1학년 괴롭히니까 좋디, 좋아?!” “이 씨, 저 녀석이 내 돈 뺏어갔단 말이예요~!” 주임 선생님이 선배들의 머리를 탁 탁, 때리면서 호통을 치자, 선배 중 한 명이 억울하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런데 왜 선배의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키고 있는 걸까. 그러니까, 저 선배는 지금 내가 선배의 돈을 빼앗아 갔다고... ...하다가, 나는 아까 아침 나절에 있었던 일을 기억해 냈다, 설마 음악실에 계신 선배였던가 싶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아뿔싸, 음악실에 있었던 선배가 어떤 얼굴이었는지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 녀석, 이젠 거짓말까지 해?!”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주임 선생님이 콧김을 거세게 뿜어내며 소리쳤다. 선배는 속이 터져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 네가 아까 내 돈 뺏어갔잖아, 응?!” “...그만 좀 해라.” 그 옆에 있던 다른 선배 한 명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 선배를 만류한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선생님. 제가, 선배님의 돈을 뺏어갔어요. 선배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그러니까...“ “...됐다. 너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그만 교실로 들어가라. 넌 양호실로 가 보고.“ 주임 선생님은 내 말을 도중에 가로막고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들겼다. ...이봐요, 선생님, 정말이라니까요? “선배 말이 맞아요. 반장이 정말로 선배 돈을 뺏어갔습니다.“ 그 때, 내 뒤에서 한 녀석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상황을 잘 아는 걸 보니, 나에게 돈을 주었던 그 1학년인 듯 싶어, 나는 옆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 주임 선생님은 심란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반장, 여기서 뭐하나?” 그 때, 담임 선생님이 커피 잔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반장인 내 얼굴은 어떻게 알아보시는 듯 싶은데, 다른 아이들이 자신의 반 학생이라는 것은 모르시는 것 같다. “...아, 선생님. 그런데, 선생님 반 반장이라면...그 들어올 때, 차석으로 입학한...?“ “아, 네. 그런데 저희 반 반장이 무슨 잘못이라도?” 의아한 듯 되묻는 담임 선생님의 앞에서, 주임 선생님은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게 아니라요...” “어? 은성이, 여기서 뭐하는 거니?” 발랄한 음성으로 나를 부르며 다가온 국어 선생님은, 무척이나 친근한 태도로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이대로 머리를 흔들어 손을 떨쳐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아침마다 차를 얻어 타고오는 것이 너무 편하다. “어? 아...이 학생, 혹시 아십니까?” 주임 선생님은 당황한 어조로 국어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웃긴 것은, 아까 우리 담임 선생님이 왔을 때에는 고개만 까닥했던 주임 선생님이, 지금은 허리까지 숙여 인사하고 있다는 거다. “예? 아, 물론이죠. 그런데, 은성이가 왜... 어? 너 얼굴이 왜 이러니?“ 국어 선생님은 웃으며 말을 하다가, 갑자기 놀란 얼굴이 되어 내 얼굴을 손으로 붙잡았다. ...정말 귀찮다. 나는 불쾌함이 묻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제가, 돈을 뺏어서 선배들이 화가 난 겁니다. 선배들은 잘못 없어요.“ 내 말에 주임 선생님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고, 담임 선생님은 허어, 하는 의미 불명의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국어 선생님은 엄청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어떤 협박을 했는지는 몰라도, 걱정하지 말아라. 이 놈들, 이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아야지.“ 주임 선생님은, 책상 위에 놓인 굵은 몽둥이를 집어 들며 선배들에게 다가갔다. ...이래서야, 나중에 나 혼자 나쁜 놈 되서 매도되기 십상인 상황이 아닌가. 나는, 다급하게 주임 선생님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제가 잘못한 겁니다. 혼내려면 저를 혼내 주세요.“ 주위가, 조용해졌다. 아이들과, 선배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절박했다. 생각해 봐라, 만약 선배들이 선생님께 맞고, 정학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선배들이 그 끓어넘치는 혈기를 참지 못하고, 나를 찾아와서 행패를 부릴 것은 당연지사였다. 차라리, 이 쯤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혼남으로써, 모든 일을 없었던 것처럼 무마시키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은성아.” 국어 선생님은 안타까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 잘못입니다.” “...아니, 그게...” 주임 선생님은 더듬거리며 말을 꺼내다가,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만 갸웃거렸다. “...저희 잘못입니다.” 그 때, 선배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서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 말에, 주임 선생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몽둥이를 고쳐 잡는 선생님의 옷을 잡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라, 제...” “...모두들 잘못했다고 하니까, 가볍게 벌을 주고, 그냥 돌려보내면 안 될까요?” 국어 선생님은 내 말 사이에 불쑥 끼어들면서, 주임 선생님을 향해 붙임성있는 미소를 지었다. 주임 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의 눈치를 보면서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아...저기, 이 녀석들이 워낙 난리를 쳐 놔서, 그러니까...” 횡설수설 거리는 주임 선생님을 향해, 국어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을 한다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뭐, 선생님께서 그러신다면야...” 주임 선생님은 차라리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는 법이지요.”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담임 선생님은, 아득히 먼 곳을 응시하면서 이 말 한 마디를 남겨두고 어딘가로 유유히 걸어가셨다. ...역시,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럼, 모두들 각오는 되어 있겠지?” 국어 선생님은 약간 풀린 얼굴로 긴장을 늦추고 있는 우리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반장, 청소 다 했어.” 나는 혼미한 상태에서 억지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국어 선생님이 우리에게 가한 처벌은, 바로 청소였다. 1학년은, 싸움으로 어지럽혀진 교실과 복도를, 그리고 2학년은 뒤뜰 화단가를 청소한 후, 점심 시간이 끝나기 전에 대표가 찾아와서 청소 검사를 맡으라고 말씀하신 후, 국어 선생님은 내게 눈을 찡긋거리며 어깨를 툭, 쳤다. ...이 사람이 미쳤나, 싶어 나는 억지로 선생님을 따라 생긋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국어 선생님은 묘하게 상쾌한 얼굴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여간, 저 선생님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나는, 청소를 다 끝냈다는 보고를 드리고 위해, 자다가 말고 일어나 교무실로 걸어갔다. “...어...” 교무실 안에는, 2학년 선배가 벌써 와서, 국어 선생님 앞에 서 있었다. “은성아, 벌써 청소 다 끝냈냐?” “...아, 예.” 나는 한 박자 늦게 대답하면서 예의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 알아서 잘 했겠지.” 국어 선생님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목을 뒤로 약간 젖혔다. “앞으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너희들도 선배가 되어서 후배들 괴롭히지 말고, 알았지? 그리고 이거...“ 국어 선생님은 말꼬리를 흐리면서, 주머니에서 밴드 하나를 꺼내서 포장지를 벗겼다. 다른 일반 밴드보다 더 큰 크기의 네모난 밴드를 내려다보며, 뭘 하려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나를 향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무심코, 주춤거리며 선생님께 다가가자, 이마에 무언가가 찰싹 와서 달라붙는다. “...아...” 순간 놀라서 작은 신음 소리를 내자, 선생님은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내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양호실이나, 아니면 약국이라도 가 봐. 알았지?“ 그 말을 끝으로, 이만 가 보라고 손을 내젓는 선생님을 향해, 나는 다시 한 번 인사를 드리고, 터벅터벅 교무실을 걸어 나왔다. ...잠이 부족하다. 이대로 가서, 잠을 자면 몇 분이나 잘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머니 속으로 무언가가 넣어졌다.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아까 교무실 안에 있던 선배가 눈을 내리깔고 내 앞에 서 있었다. “...뭐, 인사를 하는 게 낫을 거라고 다들 말해서 하는 것 뿐이야.” 선배는, 쌀쌀맞게 말하고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갔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작은 커피 캔 하나와, 초코 파이 하나가 손에 잡힌다. ...뭘까, 이 것은. ...혹시, 저 선배, 나에게 뭔가 빚진 것이라도 있었던 건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다시 주머니에서 그것들을 넣고 교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니까, 일단은 자고 나서, 생각을... -8- 오늘은, 반장 선거 날이었다. 모든 것에 무관심하다는 말을 듣는 내가, 반장 선거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칠판에 묘한 기합이 들어간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축, 반장 선거~! 아자 아자, 힘내자~!] 나는, 분홍색 분필로 칠판 한 구석에 또박또박 적힌 그 말을, 잠시간 바라보았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조금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 옆에서, 짝꿍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내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짝꿍의 눈초리에, 나는 이대로 책상에 누워 잠을 자기가 미안해졌다. “오늘, 반장 선거 날이야.” 내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이 녀석은 또 누구야. 멍하니 그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의 얼굴이 점점 샐쭉해지더니, 눈꼬리가 위로 치켜올라간다. 아, 기억났다. “공주님...”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공주님은 열이 받은 얼굴로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공주님은 다시 헤헤헤, 하고 바보같은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후후후, 잠시 후에 보자고~!” ...보긴 또 뭘 보자는 걸까. 귀찮아. 나는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이대로 잠을... ...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야, 자지 말고 나랑 이야기 하자니까.” 나는 이미 반쯤 잠에 든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갯짓에 안심한 듯, 상대방은 나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세라, 다시 책상에 이마를 박고 쓰러졌다. “야, 일어나라니까~!” ...아아, 귀찮아. 잠 좀 실컷 잤으면... “...일어나~!” 나는, 누군가의 고함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잠을 청하려고 애를 썼다. 열심히 나를 잡아 일으키려 노려하는 누군가의 손이, 계속해서 나를 귀찮게 만든다. ...일어나서, 누구인지 잡히면, 죽었... ...아니, 내가 잘못했다. 그러니까, 그냥 자게 내버려 두면 안 될까. ...나는 고집스럽게 머리를 팔 사이에 파묻었다. “선생님, 이제 반장 선거를 실시해야 하는데요.” HR시간이 되었는데도, 담임 선생님은 오늘따라 나가시지 않고 교탁 앞에 계속 서 계셨다. 지그시 눈을 감고 계시는 모습이, 또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런 선생님을 향해, 아까부터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반 아이 중 한 명이 손을 들고 주저하며 말했다. “어허, 반장 선거?” 담임 선생님은 감고 있던 눈을 살짝 뜨면서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시면서 오른 손으로 얼굴을 매만지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내 눈에는 너무나 우아하고 점잖아 보인다. “뭐하러 반장 선거를 하나. 그냥 내버려 둬도, 지금의 반장이 충분히 잘 해 나갈 텐데.” 이 소리에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란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지금, 나에게 또다시 반장을 하라고 하시는 건가, 선생님은. 이제 반장은 지겨워~! 라는 생각으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내 옆에서,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뭔가, 싶어서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짝꿍이 심란한 표정으로 책상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 모습 하나면, 원래 내 짝꿍은 이상한 놈이었어, 하고 말겠는데, 이상하게 반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와 케켁, 거리며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이마를 찌푸리며 왜 이런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지 잠시 동안 고민에 빠졌다. “예? 하, 하지만 저희는 반장 선거를...“ 그 때, 공주님이 벌떡 일어나 선생님께 더듬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지원사격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저 역시 반장선거를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내 말에, 담임 선생님은 초점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나에게 돌리며 나직이 물었다. “아니, 꼭 선거를 해야 하겠나, 반장?” ...무언가, 굉장한 압력이 느껴진다. 게다가 선거를 해야 하겠느냐고 물으면서, 나를 또다시 반장이라고 부를 것은 또 뭐냐.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는, 그런 쓸데없는 것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아함에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잠시 생각했다. 이대로 담임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얌전히 반장 선거를 하지 않았을 경우... ...나는 이 반의 반장으로서 1년간, 숙제 걷기, 각종 회의 참석, 그리고 기타 사항을 책임져야 하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야 한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면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 반. 드. 시 반장 선거를 해야 합니다. 사실 저는, 저희 반을 이끌어 나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제가 이제까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저희 반에는 저희 반을 잘 이끌어 나갈 인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공. 평. 한 선거를 통해, 저희 반을 책임질 사람을 뽑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발 나는 반장에서 제외시켜 줘~! 나는 그런 간절한 외침이 절절히 씌여져 있는 얼굴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나만 아니면, 누가 반장이 되던지 상관이 없다. 문제는, 이 문장의 대 전제이다. 그래, 나만 아니면...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이 이렇게 겸손하기까지 할 줄이야... ...그래, 반장이 원한다면, 해 봐야지. 그럼, 나는 나가 있을 테니, 반장이 주관해서 선거를 한 번 해 보거라.“ 담임 선생님은 흐뭇한 듯, 허허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교실을 나갔다. 나는, 긴장감으로 참아왔던 숨을 고르며, 나직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이제 다른 녀석을 반장으로 내세우기만 하면, 나의 고생도 끝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드는데, 어쩐지 주위 아이들의 표정이 묘했다. 나는, 그런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일단 교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럼, 이제 반장 선거를 시작하자. 우선 후보를 추천해 볼래?“ 기분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왜 이래, 자, 어서 추천을 하라니까? 그 때, 한 아이가 손을 작게 들면서 머뭇거리며 말했다. “신 현우...를 추천합니다.” 좋아, 좋아. 나는 하얀 백묵으로 또박또박 칠판에 이름을 썼다. 신 현우라는 녀석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아, 열심히 노력해 보렴. 곧 다른 아이가 또다시 손을 들어 말했다. “소 지성을 추천합니다.” 나는 그 이름도 칠판에 써 넣었다. 다시 몸을 돌리자, 이번에는 누구도 손을 들지 않고, 서로의 눈치만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 때, 짝꿍이 손을 들었다. 나는, 짝꿍을 시키며, 내심 후보는 이제 그만 받을까, 하고 따져보았다. “이 은성을 추천합니다.” [뚝.] 그만, 쥐고 있던 백묵이 반으로 부러져버렸다. 나는 생긋 웃으면서, 손 안에 남아 있는 반토막짜리 백묵을 교실 바닥에 던져버렸다. 내던져지면서 벽에 부딪힌 백묵이 교실 바닥을 데구르르, 굴러간다. 나는 조용해진 교실 안을 빙 둘러 보면서, 다시 한 번 상냥하게 물었다. “자, 후보 추천 한 사람만 더 받을게. 누구, 추천할 사람 없어?“ 아이들의 눈동자는, 왜인지 겁먹은 사람처럼, 초점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다른 백묵 하나를 집어들었다. “...누구 추천하지 않으면, 내가 아무나 써 넣는다?” 그렇게 물었을 때, 또다시 그 빌어먹을 말소리가 들렸다. “이 은성을 추천...” [딱.] 나도 모르게 들고 있던 분필로 칠판을 세게 때려 버렸다. 하얀 분필 자국이 진하게 난 칠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자, 그럼...” 힐끔, 교탁에 놓인 출석부를 본 후, 나는 제일 앞에 있는 이름을 써 넣었다. “권 오성, 너도 같이 후보로 넣을게. 그럼, 너는 투표 용지를 만들어 줘.“ 나는 제일 앞에 앉아 있는 아이를 가리키면서 그렇게 말했다. “...이 은성을...” 저 녀석,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끈질기다. 나는 주위의 소리를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이어서 말을 했다. “자, 그럼 투표 용지에는 자신이 뽑고 싶은 사람을 이름을 하나만 써 넣어. 나중에 개표해서, 가장 많이 이름이 나온 사람을 반장, 다음 사람을 부반장으로 뽑을 테니까.“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또다시 어디선가 개 소리가 들렸다. “이 은성을 추천합니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짝꿍을 노려보았다. “...너도 같이 후보로 올려 줄까?” 후보로 올라가기 싫으면, 닥치고 앉아 있어, 하는 내 눈초리를 너무나 잘 알아들은 짝꿍은 미미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이 은성을 추천합니다.” 그 때, 누군가가 내 말귀를 못 알아듣고 이런 망발을 지껄였다. ...대체 어떤 귀여운 학생일까, 싶어 고개를 돌리자, 공주님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다. “에헤헤, 칠판에 어서 안 쓰고 뭐해?” ...저 녀석 이름이 분명 뭐였더라? 나는, 공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심란한 속을 억지로 달랬다. “네 이름이...” 그렇게 막 물었을 때, 공주님의 눈동자가, 어쩐지 음침해지기 시작했다. ...저 녀석, 설마 또 울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걱정하고 있는데, 공주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공주님의 기세에 그만 눌려버린 나는, 주춤거리며 몸을 옆으로 비켰다. 공주님은, 백묵 하나를 집어서 칠판에 이름을 써 넣었다. [이 은성.] 나는, 잠시간 이 글자를 끔찍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아냐, 이 은성. 잠시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이건, 단지 후보일 뿐이야. 그래, 하하, 설마 누가 나를 뽑겠어? 나는 나를 향해 의기양양하게 웃는 공주님을 바라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반장, 용지 다 만들었는데...” 그 때, 앞에 앉은 아이 한 명이 나를 부르며 하얀 쪽지들을 내밀었다. 나는, 그 쪽지들을 받아 들고, 우선 단호하게 말했다. “자, 그럼 반장 후보들의 연설을 듣기로 하자. 처음에 이름이 씌여진 사람부터 하기로 할까? 그럼, 신 현우부터. 신 현우, 어서 나와라.“ 거듭 부르는데도, 신 현우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교실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수위를 높여 가며 차 오르기 시작했다. “신 현우, 결석이야?” “...누가 결석이야?!” ...이 녀석이 신 현우였나. 뒤에서 소리를 빽 지르는 공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있으면 말을 하지. 자, 그럼 시간 없으니까, 빨리 빨리 하고 끝내자.“ 시계를 들여다보며 무성의하게 말하자, 공주님이 얼굴을 험상궂게 찌푸리다가, 갑자기 불길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까, 저 표정은. 공주님은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사실 반장이 되는 것은 귀찮지만, 우리 반의 앞날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희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우리 반 학생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일 거야.“ 이 말에, 아이들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반의 앞날보다는, 당장의 원한이 우선이다. 자, 생각해 봐. 저 녀석이 반장이라도 안 하면, 뭘 할지“ 공주님의 손가락이 정확히 나를 가리켰다. 나는 나를 향해 곧게 뻗은 그 손가락을, 잠시간 노려보았다. ...대체 뭐 하자는 플레이일까, 이건? “분명, 아무 것도 안 하고, 1년간 뻔뻔 놀면서 학교를 다니겠지. 쉬는 시간마다 엎드려 자고, 학교 행사 있을 때에는 혼자 집에 가고... 나는, 그 꼴은 절대 못 봐~!“ 공주님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아이들을 흝어보았다. 주먹까지 굳게 쥔 공주님의 모습은,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우리 반이 어떤 꼴이 되든, 나는 저 녀석이 반장이라도 되서, 조금이라도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은... ...후후...“ 마지막으로 음침한 웃음까지 터뜨리면서 자리를 비키는 공주님을 나는 심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웬지 굉장히 좋지 않다. “...다음, 소 지성.” 떨떠름한 목소리로 다음 이름을 호명하자, 중간 정도에 앉은 아이 한 명이 일어나서 교탁 앞에 섰다. “아...저기, 나도 사실 반장 같은 것, 귀찮아서 하기 싫지만... ...굳이 시킨다면 열심히 할게.“ ...좋은 말이다. 그래, 무릇 반장 후보들의 연설이라면 이렇게 해야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듯, 약간 더듬거리는 소 지성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현우와 같아. ...무엇보다, 후...“ 소 지성은, 갑자기 아련한 눈빛을 하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모두들 알고 있는, 전설의 음악실 삥 뜯기 사건과, 교내 난투 사건의 직접적인 피해자로서, 그 때 받았던 충격이 내게는 너무 컸다고나 할까... ...후후, 그래...“ 소 지성은 아까 공주님과 꼭 닮은 음험한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쓱 흝어보았다. “고생하는 모습이라... ...후훗, 정말 좋은 말이야.“ 소 지성은 다시 표정을 싹 바꾸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게다가, 나는 은성이가 반장이 되든 안 되든, 자기가 뭔가를 하고 싶을 때, 우리 반을 잡고 흔드는 것은 여전할 거라고 생각해.” ...왜 내 이름이 나오는 거냐. 나는, 불연 듯 소 지성의 목덜미를 잡고 달달 흔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아니, 후보면 자기 PR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왜 내 이름을 들먹이는 거야?! 게다가, 우리 반 아이들은 왜, 소 지성의 말에 심히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걸까? 나는 힘없이 다음 후보를 불렀다. “...권 오성.” 그러자, 제일 앞에 앉은 작은 키의 아이 한 명이 벌떡 일어나 그 자리에 서서 말했다. “어...사실, 나는 별로 반장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또 잘 할 자신도 없지만... ...앞의 후보들의 의견과 같아.“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 앉은 권 오성을,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뭔가가 좋지 않다. “...다음은, 내가 할 차례지?” 나는 교탁 앞에 서서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우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내가 어떤 녀석인지 좀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날 반장으로 뽑으면, 후회되는 1년을 보내게 될 거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일단 생긋 미소지었다. 나를 향해,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라는 표정을 짓는 일부 아이들은 무시하자. “1학년 행사로는, 수학 여행과, 운동회, 축제가 있다. ...그 행사 기간동안, 어떤 나날을 보낼지는 너희의 선택에 따라 달라지겠지. 모두들, 행복하고 즐거운 1년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자, 그럼 나는 너희가 올바른 선택을 하리라고 믿는다.“ 나는 말을 끝마치고, 아이들을 상냥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얼굴 가득 떠오른 고민과 망설임의 모습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종이 쪽지들을 제일 앞 자리 아이들에게 적당히 나눠주면서, 한 장씩 가지고 나머지는 뒤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곧, 아이들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또는 종이 쪽지에 누군가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나 역시 종이 쪽지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썼다. 권 오성이라고. 자고로, 반장은 힘 없고, 말소리 약한 사람이 되는 게 제일 좋다. 그래야, 위급할 때 부려먹을 수도 있고, 또 평소에도 무시하기 쉽다. 나는 조금 더 기다렸다가, 공주님에게 쪽지를 걷어오라고 지시했다. 걷어온 쪽지를 막 개표하려고 했을 때, 공주님이 내 손을 저지하면서 누군가를 손짓해 불렀다. “...왠지, 네가 개표하면, 표 조작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나를 향해 그렇게 말하는 공주님을, 나는 황당함을 담아 노려보았다. “...무슨 말이냐, 그건.” “글쎄.. 그저, 네가 투표 용지에 씌여진 이름을 다른 사람으로 바꿔 부르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 되어서 말이야.” ...혹시 이 녀석,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었나. 그건,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썼던 방법인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는 말없이 그 옆에 물러섰다. 뭐, 자기들이 알아서 해 준다는데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겠지. 무엇보다, 나를 반장으로 뽑아서 스스로 고생하기를 자처할 바보들이, 우리 반에 있을 리가 없다... ...라고, 나는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은성, 이 은성, 이 은성....” ...귀가 나빠졌나. 왜, 내 이름만 계속 들리는 걸까. “이 은성, 기권, 이 은성...” 공주님은 밝게 웃으면서, 뒤로 몸을 돌렸다. “이상, 총 54 표 중 기권 6표, 이 은성 49표로, 우리 반 반장은 이 은성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건 사기다. 나는 불타오르는 정의감을 참지 못하고, 열렬하게 박수를 치는 반 아이들을 노려보았다. “어허, 벌써 투표가 끝났나?” 그 때, 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담임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허허, 뭔가, 이 결과는?” 담임 선생님은 칠판을 한 번 쳐다보신 후... ...왜인지, 무척이나 기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존경하던 담임 선생님의 저 모습마저, 지금의 나를 너무나 슬프게 만든다. “이럴 줄 알았지.” 담임 선생님은 느긋하게 말씀하시면서, 오늘 종례 사항은 없으니, 알아서들 마무리 하고 집으로 가라며 밖으로 다시 나가셨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건 사기다. “정당한 투표 결과, 이 은성이 우리 반 반장이다.” 공주님은, 굉장히 기뻐하는 얼굴로 그렇게 선언했다. ...그렇게 기쁘냐? 나는 음침한 표정으로 공주님을 옆으로 밀어냈다. 우리 반 아이들은,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나는 우선 칠판 제일 오른 쪽에 반장, 이라고 적고, 그 아래에 부반장, 총무, 학습부장 등의 이름을 적었다.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둘러보면서, 나는 담담하게 그 다음 말을 적었다. [부반장-공주님.] “...그런 이름 아니라니까~!” 옆에서 공주님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후훗,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다. [하는 일 - 숙제 걷어서 반장에게 제출, 대청소 시 청소 감독, 각종 회의 참석...] “그마안~!” 공주님은 .내 옆에 바짝 다가와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픈 귀를 손으로 덮으며, 공주님을 향해 씨익, 웃었다. “왜?” “이, 이게 뭐야? 이건 반장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 손까지 부들부들 떠는 공주님의 모습이, 조금 애처롭다. “아니, 반장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 후, 총무 옆에 소 지성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총무가 해야 할 일은, 각종 돈 관리다. 나는, 다음에는 10번, 20 번, 30 번, 40 번, 50 번을 부장 이름에 순서대로 적고, 나머지 모자란 인원은 5번 대로 채워 넣었다. 미화 부장은 우리 반 환경 미화를, 학습 부장은, 우리 반 시험 성적 관리를... ...그렇게 해야 할 일들을 적고 나니, 칠판이 글씨로 빽빽하게 가득 찼다. 나는 마지막으로 반장 옆에 [총 책임] 이라고 적어 놓았다. 백묵을 내려놓고, 손을 탁탁 털면서 몸을 뒤로 돌리자, 공주님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 잠깐...저게...” 아이들은 나를 향해 경악의 시선을 보내며, 서로 절망적인 눈길을 주고 받았다. ...그러게, 누가 나를 반장으로 뽑으래? 나는 마지막으로, 상큼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다. “참고로, 수학 여행 같은 거대 행사 때에는, 각자 알아서 행사 위원들을 뽑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러면...“ 뒷 말을 흐리며 내 자리로 들어가자, 짝꿍이 나를 향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나는 책가방을 챙겨 일어나면서 그런 짝꿍의 모습을 못 본 척, 외면했다. ...이제, 오늘 수업도 끝났으니 이만 집으로 가야겠다. -9- “써클 활동?” “응. 너는 어떤 부에 들거야?” 공주님은 입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고뇌의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래, 민섭이나, 영훈이, 그리고 도연이는 그렇다고 치자. 이 녀석들에 대해 일일이 따지는 것은, 나 스스로를 지치게 만들 뿐이니까. 그런데... “...너희는 뭐냐?” 낮은 목소리로 묻자, 공주님이 잘 못들었다는 표정으로, 응? 하고 반문한다. 나는, 다시 한 번 말해주는 대신 묵묵히 계란 말이를 집어 들어 입 안에 넣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짝꿍과 공주님, 그리고 그러니까... “...소 지성.”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자신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소 지성, 왜 저 녀석과도 같이 밥을 먹게 됐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해, 밥 안 먹고?” 영훈이 나를 바라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순순히 이 상황에 대해 따지는 것을 포기하고 반찬을 집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래, 따져서 뭐 하리. 차라리, 밥을 일찍 먹고 엎드려 자는 게 훨씬 낫다. “야...안 돼. 봄이라고는 해도, 나가서 먹기에는 춥다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민섭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산은 안 돼.” 곧이어 영훈이 나를 향해 음침하게 경고성 목소리를 낸다. ...그러고 보니, 산에 올라가서 먹고 싶긴 하지만... 나는 잠시 산에 올라가서 즐겁게 점심을 먹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한적한 산 속, 나는 조용하고 아늑한 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점심을 먹다가...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녀석들을 발견하고 기겁을 한다... ...나는 그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려 본 후, 조용히 밥을 먹는 것에 열중했다. 이 녀석들을 이끌고 산으로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빨리 밥을 먹고 자는 게 백 배는 낫다. “그런데, 그 말 들었어? 방송부 말이야.“ “아...” 민섭의 말에, 지성이 뭔가 알고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곧이어 공주님마저 얼굴을 찡그리며 갑작스레 밥맛이 떨어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궁금한 것은 못 참는 도연이, 앞장 서서 뚱한 어조로 물었다. “방송부 선생 말이야. 만주 벌판.” 그랬다. 방송부 담담 선생님의 별명은 만주 벌판으로, 담당 과목은 체육이다. 왜 그 선생님의 별명이 만주 벌판인지는, 누구라도 드넓은 선생님의 이마를 보면 쉽게 알아챌 수 있다. “그 선생, 조금이라도 예쁘장한 아이들을 보면, 협박해서 억지로 방송부에 들어가게 한다며?” 민섭이 빈정거리는 어조로 말하자, 도연이 설마, 하는 눈초리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그래도 다른 선생들도 아무 말 못하잖냐. 워낙 빽이 좋으니까.” 영훈이 시니컬한 어조로 말하며, 그 틈을 타 내 계란 말이 하나를 집어서 입 속에 넣었다. “하긴, 만주벌판은 열렬한 이사장 파니까.” 공주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다른 젓가락 하나가, 마침 내가 먹으려고 노리고 있었던 감자 조림을 집어간다. ...누구야,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그 자리에는 짝꿍이 뚱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녀석은, 상대하기가 껄끄럽다. 나는 대신 멸치 조림을 집어서 입 안에 넣었다. “...대체 왜 그런 애들을 뽑아서 방송부로 데려가는 거야?” 도연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아이들은 모두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왜 방송부로 뽑아가는지는, 생각하지 말자. 변태에 대한 이야기는, 영훈을 통해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반장은 다행이네.” 지성이 나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응? 대체 뭐가 다행이라는 걸까. 아니, 그 보다 내 이름은 왜 또 갑자기 나오는 건데. “반장은, 국어 선생님이랑 친하잖아? 국어 선생님이, 이사장 아들 친구라며?“ 나는 젓가락을 물고, 물끄러미 허공을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이야기를 어떤 것부터 반박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별로.” 결국, 나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국어 선생님과 전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등교 길에 차를 얻어타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일 뿐이다. 지성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 때, 교무실에서...” “아, 이 것 맛있네?” 지성이 막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데, 도중에 민섭이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며 끼어들었다. 나는 민섭이 들고 있는 반찬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저 반찬은... ...나는 민섭을 따라서 짝꿍의 도시락 통에 담긴 나물 무침을 집어들었다. “...맛있네.” 그것은, 인정하기 싫지만, 정말 맛있었다. 한 때, 떡볶이집 주인을 꿈꾸었던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는 사실이다. 곧 다른 사람들 모두,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잊은 것처럼, 점심을 먹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점심을 먹고 자리에 엎드렸다. 옆에서 애늙은이마냥 혀를 끌끌 차면서 나를 보는 민섭이나, 한숨을 내쉬는 영훈,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는 도연의 건방진 모습들이 마음에 걸리지만, 자고로 그런 자잘한 것에 신경쓰면 큰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주위 상황에는 신경쓰지 말고,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자자... ...라고 생각했는데, 공주님이라는 녀석이 시끄럽다. “나는 힘들게 물리 숙제도 다 걷어왔는데, 반장이라는 녀석은 자고 있냐?” 라는 예쁜 소리를 지껄여대면서 자꾸만 나를 귀찮게 군다. 나는 견디다 못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숙제, 선생님께 제출하고 온다.” 숙제를 제출하는 김에, 어디 적당한 곳에 숨어서 자고 오는 것도 좋겠지, 싶어 공책 더미들을 들고 나가려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는 공주님 대신, 다른 녀석들이 귀찮게 한다. “우리도 같이 갈게.” ...선생님께 숙제 내러 간다는데, 왜 너희가 따라온다는 거야? 나는 억지로 그 녀석들을 떼어 놓고는 도망치듯이 교무실로 올라갔다. “선생님, 3반 숙제 걷어왔습니다.” 물리 선생님께 다가가서 말하자, 물리 선생님은 반갑게 나를 맞이하셨다. “아, 3반 반장이구나. 녀석, 언제 봐도 예의 바르고 싹싹하구나. 그런데 말이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하는 물리 선생님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고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다가갔다. “네?” “우리 사진부에 들어올 생각은 없니? 내가 담당 선생인데, 네가 들어오면 특별히 잘 보살펴주마. 2.3학년들도 모두 착하고, 또 우리 부에서 사진 찍는 것도 배울 수 있을 거다. 초보라도 상관없어. 어때, 지금이라도 말만 하면...“ “죄송하지만...” 막 거절의 말을 하려는데, 뒤에서 누가 내 머리를 쓱쓱 문질렀다. “죄송하지만, 은성이는 이미 제가 찍어뒀습니다. 그렇지, 은성아? 너도, 독서부에 드는 게 더 좋지?“ ....대체 왜, 국어 선생님이 내게 친한 척을 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머리를 옆으로 움직여 국어 선생님의 손을 치우면서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저는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 잠깐...”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오려는데, 국어 선생님이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주신다. 나는 교무실을 나온 후, 미술실로 걸어갔다. 노총각 미술 선생님은, 미술실에 음침하게 처박혀 있는 것보다는, 여선생님들이 계시는 휴게실 근처를 산책하는 것을 더 선호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지금 시간의 미술실은 비어 있을 확률이 컸다. 나는 비틀거리며 미술실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술실의 기다란 의자 위에 누웠다. 문득,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보니, 알록달록한 포장지로 싸여진 사탕이 여러 개 집혀 나온다. 나는 사탕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몰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도 이번에 너희들 수학여행에 따라가기로 했다.” 국어 선생님은 그 말을 하시면서, 운전을 하시다 말고, 나를 힐끔거리며 바라보았다. 나로 말하자면, 아침이면 언제나 그렇듯, 상당히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꾸벅꾸벅 졸다 말고, 겨우 눈을 치켜떠서 국어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어찌 되었든,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거시는데, 무시하고 그냥 자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하, 뭐, 너희 반에 같이 끼여서 가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국어 선생님은 그 말을 하면서 쑥스럽다는 듯, 볼을 발갛게 물들였다. ....잠깐, 발갛게...?! 아니, 이런 시각적으로 공해적인 장면을 연출해 내다니... 나는 큰 충격에 그만 잠이 확 깨버렸다. 저 선생님, 나이가 몇이고, 덩치가 몇 인데, 볼을 붉히는... 아, 됐다.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하하, 뭐, 너무 놀라지는 말고...” 하고 횡설수설 말을 하시며, 내가 무언가 대꾸 하기를 바라시는 듯, 국어 선생님은 연신 나를 살펴보셨다. 이건, 어떤 말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분위기다. 나는 멍한 머리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잠시간 생각했다. “선생님, 이사장님과 어떤 관계세요?” 그런데 나온 것은, 상당히 엉뚱한 내용의 말이라, 나는 말을 하고 나서도 적지 않게 당황했다. 대체 왜 내가 이런 말을 한 거지? 국어 선생님은 다소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응, 그게....이사장 조카인데?”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앞을 보고 운전을 해 주시면 안 될까, 싶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은성이 네가 그런 걸 물어본다니 의외인데...?” 국어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미소지었다. 아침부터 저렇게 웃으며 떠들어대다니, 보는 내가 다 지치는 듯한 느낌이다. “다른 건 뭐 물어볼 것 없니?”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선생님은 다른 건 다 좋은데, 종종 이런 식으로 귀찮게 구실 때가 있다. “흐음...그런데 우리 독서부에 들어올 거지?” 국어 선생님은 은근 슬쩍 내 눈치를 살피면서 그렇게 물어보았다. “어차피,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의무적으로 부서에 들어야 하잖아? 우리 부는, 특별히 하는 일도 없고, 그저 부서 활동 시간에 모여서 각자 책을 읽다 가는 게 전부야. 선배들도 모두 착한 녀석들이고, 또 무엇보다, 은성이 네가 들어오면 내가 굉장히 기쁠 거야.“ ....내가 독서부에 든다고 해서 국어 선생님이 기쁠 건 또 뭐란 말인가. 아니, 무엇보다 제발... ....선생님 볼에 있는 홍조 좀 누가 지워줬으면 좋겠다. 다른 게 고문이 아니다. 이런 게, 바로 고문이고, 또한 괴롭히는 것이다. 나는 대답대신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아 씹...” 오늘따라 밥을 먹는 내내, 공주님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왜 그래?” 도연이 궁금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묻자, 공주님은 기다렸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침부터 만주벌판이 자꾸 시비를 걸잖아! 복장이 불량하다느니, 눈초리가 이상하다느니... 쳇, 그런다고 내가 방송부 들어갈 줄 알아?!“ 중얼중얼, 궁상맞게 욕설을 내뱉는 공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서 민섭이 나를 툭, 하고 건드렸다. 뭐야? 하는 얼굴로 바라보자, 민섭은 내게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은성이 너는 어느 부에 들 거야?”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물고, 잠깐동안 고개를 갸웃했다. ...부서라... 물론, 우리 학교는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부서에 들어야 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나 역시도 아무 부서나 선택해서 들어야 한다. 그렇지만, 부서라... “우리 담임선생님은 어떤 부서 담당이야?” 일단 궁금한 것을 물어보자, 아이들이 싸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또 뭘 잘못 말했나, 싶어 마주 바라보자, 민섭이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포기했다는 어투로 대답한다. “내가 너에게 뭘 바라겠냐... ...렛츠 고는 영화 감상부 담당이라고 들었어. 그 선생님한테 딱 어울리는 부서지.“ ...흐음,영화 감상부라...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 설마 거기에 들려고? 하지만, 영화 감상부는 가서 하는 일도 없는 유령 부서라고 들었는데?“ 옆에서 지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끼어들었다. 이봐, 그러니까 들려고 하는 거다. 만약 무언가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왜 그 부서에 들겠니. “흠...” 영훈은 나를 향해 나직이 신음 소리를 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장래를 생각해서 부서에 드는 게 좋지 않아? 이왕 드는 것, 아무데나 들기에는 뭔가가 아깝잖아. 아니면, 취미 생활이나, 또는 하다 못해, 내신에 도움이 되는 부서로...“ “맞아. 난 그런 면에서 방송부는 질색이라고~!" 영훈의 말에 공주님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나는 어떤 부서가 좋다느니 하는 말을 떠들어대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어쩐지, 입맛이 떨어진다. “어? 은성아, 왜 그래?” 민섭이 나를 향해 의아한 듯 물었지만, 그다지 대답해 줄 기분은 나지 않았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덮은 후,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로 교실을 나왔다. ...미술실로 가자. 거기서 조금만 자고, 그리고.. 그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복도 한 쪽에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고개를 몇 번 흔들어 보고 미술실로 걸어갔다. 하고 싶은 것, 장래를 위해... ...그런 말들이 입안에서 쓰게 맴돈다. 나는 어쩐지, 외딴 곳에 떨어져 나 홀로 끝없는 밀림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조금 쓸쓸하고, 또 많이... ...외로워졌다. 차가운 미술실 의자에 앉아 몸을 눕혀도 그런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미술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바라보는 모든 것이 차갑다. ...어른이 되는 것은 싫어. 나는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내 마음에, 피터 팬 증후군이라던가, 하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나는 내가 이 상태로 어른이 되야 한다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그렇잖아? 나는 다른 아이들처럼 무언가를 위해 부서를 선택할 수 없었다. 나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의 그 꿈 이후로, 나에게는 어른이 되서 특별히 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집착하고 아끼는 것들도 없었다. 사춘기 때에는 흔히 한다는 사랑도, 깨어져 버린 첫 사랑 이후에는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나의 첫사랑이 실은 사랑이 아니라,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녀를 사랑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연상되는 다른 것들, 이를테면 소녀다운 청순함, 얌전함, 등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다. 허탈한 한숨이 입 안에서 새어나온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어려운 것은 생각하지 말자. 그냥 눈을 감고...그리고, 모든 것은 그 다음으로 미뤄자. 지금은 일단, 내 눈앞에 펼쳐지는 잠의 세계에 취해, 현실을 지워 보자. -10- 담임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교무실로 올라갔을 때, 담임 선생님의 옆에는 나 말고도 짝꿍이 먼저 와서 서 있었다. 나는 나를 향해 아는 척을 하시는 다른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면서 담임 선생님께 다가갔다.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 담임 선생님은 어두운 안색으로 나를 반기셨다. “반장, 왔구나. ...실은 말이다.“ 담임 선생님은 머뭇거리시면서, 책꽂이에 꽂힌 학생 기록부를 꺼내 무언가를 뒤적이셨다. “안 재민과 친하니?” 겨우 무언가를 찾으신 담임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어보셨다. “...안 재민이요?” 나는 그렇게 되물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기억에 없는 이름인 것으로 보아, 안 재민은 비교적 얌전한 학생인 것으로 생각된다. 담임 선생님은 내 되물음에, 약간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며칠 동안 계속해서 재민이가 결석한 건, 물론 알고 있겠지? 그런데, 힘들겠지만, 반장이 재민이네 집에 찾아가서, 왜 재민이가 안 나오는지 좀 보고 와 줄 수는 없겠니? 내가 재민이네 집에 전화를 몇 번 해 봤는데, 재민이 부모님이 재민이가 아프다는 둥, 영 알 수 없는 소리만 하셔서 말이야.“ 담임 선생님은 그 일로 마음 고생이 심하셨던 듯,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수척해진 얼굴을 매만지셨다. 뭐, 사실 가는 게 귀찮고 싫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오늘 방과 후에 가 보겠습니다.” “잘 됐구나. 주소는 여기... 아...“ 담임 선생님은 주소를 적어서 나에게 주시려다가, 도중에 짝꿍을 바라보며 잘 됐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그러고 보니... 흠, 이훈이가 이 근처에 사는구나. 혹시 괜찮다면, 오늘 반장과 같이 가 주면 좋겠는데...“ 담임 선생님은, 짝꿍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짝꿍은, 다소 망설이는 기색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로서는, 어찌 돼든 상관없지만, 혼자 가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한 일이었기에, 무표정한 얼굴로 짝꿍을 바라보았다. 네가 알아서 거절해, 라는 의미를 담아서. 짝꿍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오늘은, 그리 바쁜 일도 없으니, 반장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짝꿍의 말에, 담임 선생님은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나와 짝꿍을 바라보셨다. 담임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무실을 나오는 그 짧은 시간에도, 짝꿍은 무언가 화가 난 것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 어색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는 공주님의 모습에, 나는 힐끔, 옆을 바라보았다.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보고 있는 짝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다른 녀석들은, 짝이 나를 노려보고 있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고, 점심을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듯 보였다. 나 역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반찬을 집어 먹었다. 예민한 신경을 가져서인지, 아니면 오지랖이 넓어서인지, 짝의 눈치를 살피며 밥을 깨작거리는 공주님의 모습이 조금 가엾다. “어? 맛있다.” 도연이 내 도시락 통에서 오징어 조림을 꺼내 먹으면서 감탄사를 내뱉자, 공주님이 다행이라는 얼굴로 서둘러 도연을 따라 오징어 조림을 집어 입에 넣었다. “...정말. 이거, 너희 엄마가 만드신 거야?“ 어떻게든 분위기를 완화시키고 싶은 듯, 중간에 감탄사까지 섞어 가며, 호들갑을 떠는 공주님을 이대로 무시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유혹이 생기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역시 소란을 떨어 식사 후 잠을 잘 시간까지 줄이게 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기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아니, 아버지가 만든 거야.” “에엣? 그럼 엄마는?” 나는 묵묵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공주님의 얼굴이 갑자기 새파랗게 질렸다. “...어...미안...” 우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사과하는 공주님을 나는 가만히 살펴보았다. ...공주님이 또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나에게 사과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에 겁부터 더럭 난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어떤 잘못을 저지른 건지 어서 말해~! 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공주님이 내 눈길을 피해 얼굴을 숙였다. “...야!” 도연이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갑작스레 내 이마를 한 대 후려쳤다. “...뭐야?!” 나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도연을 노려보았다. 밥 잘 먹고 있는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이 녀석은?! 시시한 일로 날 건드린 거였다면, 가만두지 않을 각오로 노려보는데, 옆에서 민섭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괜찮아는 또 뭐냐, 괜찮아는. 누가 들으면, 꼭 오해할 만하게 말하는 것 하고는...“ “그냥 냅 둬. 지금 은성이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있을걸?“ 그렇게 말한 후, 영훈이는 멀쩡한 얼굴로 계속해서 밥을 먹는 것에 열중했다. “엥?” 나는 누구를 노려봐야 할지 잠시 고민한 후에, 모든 것에 신경을 끊기로 결심하고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상한 소리를 내면서 나를 향해 입을 뻐금거리고 있는 공주님도, 그냥 무시해 버리자. 그래, 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게 어디 한 두 번 있는 일이어야지. “...서, 설마...” 지성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것 봐, 다른 사람들은 벌써 오해했잖아?! 야, 애네 엄만, 단지 학회 때문에 출장 가셔서 집에 안 계신 것 뿐이야.“ 도연이가 부루퉁하게 말하면서, 내가 집어든 반찬을 도중에 뺏어갔다. ....뭘까, 이 녀석은. 남의 허락도 받지 않고, 멋대로 사생활을 폭로하는 도연의 태도에 한 마디 해 주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탁.] 거세게 도시락 뚜껑을 덮은 후, 성큼성큼 걸어서 교실을 나서는 짝의 뒷모습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녀석, 지금, 우리들에게 무언가를 시위하는 거야, 뭐야? 아니, 갑자기 도시락을 큰 소리 나게 닫은 후에, 또 아무 말 없이 뛰쳐나가는 건... “...화장실이 급했나.” 공주님도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는지, 멍한 목소리로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너, 지금 우리가 식사 중이라는 건 알고 있냐? 그에 대답하듯, 비위가 약한 민섭이 잠시 젓가락을 정지시키고 공주님을 노려보았다. “이 버스를 타야 돼.” 방과 후에, 같이 가방을 들고 학교를 나온 짝꿍은,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가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니, 그것은 실상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말을 내뱉은 쪽에 가까웠다. 나는 묵묵히 짝꿍을 따라, 내 앞에 멈춰 선 버스에 올라탔다. 저녁 때라서 그런지, 버스의 좌석에는 모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남은 좌석은, 맨 뒤의 자리 뿐이었다. 나는 맨 뒤를 향해 걸어갔다. 자리에 앉자, 짝꿍이 말 없이 내 옆에 앉는다. 나는 흘러가는 경치를 조용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원래 나는, 말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짝꿍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서로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려니,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짝꿍이 불퉁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상태에서는 더욱 그랬다. 나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을 바라보다가, 그만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흔들거리는 내 머리를, 누군가가 어딘가에 기대게 해 주는 것도 같았다. 나는 잠결에 신음 소리를 흘리며, 더 편한 자세를 찾아 머리를 부볐다. 잠시, 내가 머리를 기댄 것이 흠칫, 하며 긴장하는 것도 같았다. 웃긴 꿈이다. 머리를 기대고 있는 베개가 움찔거린다니. 나는 빠져들 듯이 잠을 자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일어나.” 무뚝뚝한 목소리와, 나를 흔드는 손길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멍한 눈길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꿍은, 이미 일어나서 내 앞쪽으로 내려가 있었다. 나는 가방을 챙겨들고, 짝꿍을 따라 급하게 버스에서 내렸다. 떠나가는 버스를 보고 있자니, 이대로 조금만 더 자고 싶은 유혹이 생겼지만, 그보다는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짝꿍을 쫓아가는 것이 먼저다. 나는 짝꿍을 쫓아가면서 주소가 적힌 종이를 꺼내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선생님께 아부해서 좋은 것이 뭐지?” 그 때, 옆에서 짝꿍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짝꿍을 바라보았다. “뭐?” “그렇게 아부하는 것이, 즐겁냐? 이번 일도, 선생이 부탁하지 않았다면, 오지도 않았을 테지?“ “응.” 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짝꿍은,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짝꿍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나는 말을 덧붙였다. “왜냐하면, 나는 이 녀석이...그러니까, 안 재민이라는 놈이 우리 반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결석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지. 뭐, 이렇게 그것을 안 이상은, 명색이 반장인 이상 찾아갈 수밖에 없지만 말이야.“ 약간의 귀찮음을 참으며 대꾸하자, 짝꿍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나를 향해 빈정거렸다. “그건 그렇겠지. 그러니까, 네 말은 선생이나 어른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는 것 아니야?“ ...이 녀석, 누군가에게 사기당한 일이라도 있는 건가. 왜 이리 공격적이고 배배꼬인 건지. 나는 혀를 차면서 짝꿍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보았다. “뭐, 그런 면도 적잖아 있지. 하지만, 그것은 너도 마찬가지 아니였던가? 네가 지금 나와 같이 가는 이유가, 안 재민이라는 같은 반 학우를 걱정해서, 라는 순수한 마음 때문은 아니지 않아?“ 내 말에, 짝꿍이 정곡을 찔린 듯한 얼굴로 발끈해서 나를 노려보았다. 나를 정말로 미워하는 듯한 짝꿍의 눈동자를, 나는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쳇.” 짝꿍은 그런 나에게서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빠른 보폭으로 걷는 모습이,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도 같아, 나는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되어서인지, 벌써부터 켜진 상점가의 네온 사인이 우리 주위를 스쳐 지나간다. 짝꿍은, 어느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기야.” 퉁명스럽게 말하는 폼이, 역력하게 더 이상은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짝꿍의 옆을 스쳐 지나가, 주저없이 그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른 후에야,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나는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대답했다. “저, 재민이와 같은 반 친구입니다. 재민이를 만나러 왔는데요, 재민이 있나요?“ “...” 초인종 너머의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금 없는데요. 친구라니, 혹시 재민이 어디있는지 알게 되시면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해주세요.“ “네?” “재민이에게 이만 정신차리라고 말하면서, 더 늦으면 아예 쫓아내버릴 거라고 해 주세요. 원, 하여간...“ 여인은 잠시 못마땅한 목소리로 혀를 찼다. “아마, 그 못된 친구들과 같이 근처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거예요. 그럼.” 뚝 끊어 버린 초인종 앞에서 나는 황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짝꿍은 그런 나를 여유있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제 어쩔 거냐? 네 할일은 다 했으니, 이만 집에 가야겠지?“ 이죽거리며 나를 비웃는 짝꿍을 한 번 노려본 후, 나는 가방을 고쳐 메었다. “너, 이 근처 지리는 잘 알겠지?” “...그래서? 설마, 정말로 재민이라는 놈을 찾아다니기라도 할 거야?” “혹시 시간 괜찮다면, 재민이가 있을 법한 곳으로 안내해라.” “싫다면?” 짝꿍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짧게 물어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싫다면 나 혼자 찾으러 다녀야지.” “그러던가.” 짝꿍은 몸을 옆으로 비키며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나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설마, 저 녀석, 내가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뭐, 음침한 곳으로 조금 걷다보면, 재민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누군가가 나오겠지. 이 좁은 동네에서, 재민이라는 놈이 집을 나와 어딘가에 숨어 있다면, 그 녀석이 있을 곳이라는 곳은 뻔하다. 우리 또래의 학생들은, 부모님이나 기타 형제들의 눈치 때문에 친구를 오랜 시간 동안 집에 머물게 하지도 못한다. 그런 사정들을 다 따져 보면, 재민이라는 놈은, 아마 골목이나, 또는 버려진 건물 같은 곳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을 확률이 크다. ...뭐, 이런 것도 작은 형 때문에 주워듣게 된 것들이지만 말이야. 타박타박 걸어가는 내 등뒤에서, 다른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짝꿍이다. 그 녀석은, 아까 뚱한 얼굴로 나를 대한 주제에, 지금은 또, 집에는 가지 않고 나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래서야, 내가 안내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고 나는 잠시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어?” 막 방향을 틀어 골목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짝꿍이 이상한 얼굴을 하고 나를 보고 있었다. “...여기야.” 짝꿍은 짧게 말하고, 내 앞으로 걸어가 어딘가로 가기 시작했다. ...혹시 이 녀석, 안 재민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어느새 짝꿍이 걸음을 멈추고 한 자리에 서 있었다. “저 녀석이다.” 짝꿍은 손을 들어 누군가를 가리켰다. 그 곳은 어느 쇼핑 건물의 앞쪽으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모여서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 중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 녀석?” 확인차 묻자, 짝꿍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안경을 쓰고, 짧은 머리를 무스로 정성껏 세운 한 아이에게 다가갔다. “야.” 일단 성의 없이 그 아이의 어깨를 툭툭 치자, 녀석이 벌컥 성을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뭐야?! 어, 어...?“ 안 재민은 주춤거리면서 괴물을 만난 가련한 소녀처럼 뒤로 물러났다. “바, 반장?!” ...내가 저 녀석에게 못된 짓을 한 적이라도 있었나. 왜 저렇게 잔뜩 떨리는 가냘픈 음성으로 나를 부르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나는 안 재민에게 상냥하게 웃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많지, 아마?” “...어, 그게...” 안 재민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뭐야, 너는?” 그런 안 재민의 옆에, 다른 아이 한 명이 서서 나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이 상황에 잠시 절망감을 느꼈다. 설마하니, 지금 나는 악당으로 취급받고 있는 건가?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하지만... ...아니라고 일단 굳게 믿어 보자. 무엇보다, 나는 길 잃은 어린 양을 선도하러 온, 정의로운 반장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안 재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내 등 뒤로 스윽 다가와서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짝꿍을 발견하고, 안 재민은 다소 진정된 얼굴이 되었다. “어, 이훈이하고 같이라면...” 그런데 왜 그러면서 나를 힐끔 바라보는 것인지, 정말... 하아, 하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훈과 안 재민과 같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11- 이훈이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어느 공원의 벤치였다. 안 재민은 우리의 눈치를 보면서 어설픈 폼으로 서 있었다. 그 누구도, 앞에 놓여 있는 편안해 보이는 벤치에 앉지 않았다. 나 역시, 벤치를 한 번 스쳐 본 후, 그대로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대어 섰다. 지금 상태로 벤치에 잘못 앉았다가는, 그대로 곯아 떨어질 가능성이 너무 크다. 대신, 나는 안 재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청록색의 뿔테 안경이다. 그리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눈썹, 짧게 세운 삐죽한 머리카락들이 보였다. 어디로 보나, 평범한 남학생의 모습이다. 그 어느 곳에도, 가출을 하고, 학교를 결석하는 탈선의 흔적들은 관찰되지 않았다. “...반장이 왜 여기에...” 안 재민은 계속되는 침묵을 견디지 못한 듯, 조금은 짜증이 배인 얼굴로 머뭇거리며 물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 계속 안 들어오면 집에서 쫓아낸대. 그리고, 담임 선생님이, 이제 학교에 등교하래. 그게 다야.“ 내 말에, 짝꿍의 고개가 휙 돌려졌다. 나는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찬 짝꿍의 눈동자를 무심히 응시했다. “안 돌아갈 거야.” 예상하지 못했던, 단호한 대답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안 재민을 바라보았다. “그래?” 조금 놀라 반문을 한 번 한 후, 뒤늦게 안 재민이라는 놈이 나를 당당히 보고 있다는 사실에 감탄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안 재민은 버럭 소리를 치고는, 자신이 더 놀란 얼굴을 하고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지금 내 앞에서 이 녀석이 이런 식으로 행동을 하는 것은, 나에게 괴롭혀 달라고 하는 것인가, 싶어 나는 가볍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짝꿍이 내 앞에 나를 가로막고 서서 안 재민에게 물었다. 마치, 내 시야에서 안 재민을 차단시키는 듯한 그 행동에, 나는 아주 많이 상처를 받았다. 나도 알고 보면, 여리고 순수한 소년일 뿐인데...하며, 서러움을 곱씹고 있는데, 안 재민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 짝이, 나를 대하던 태도와는 정 반대로, 상냥하게 다시 한 번 물었다. “...그게...” 안 재민은 짝꿍의 상냥한 태도에 용기를 얻은 듯, 주저하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학교는...가족들이 걱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일부러 빠진 거야. ” 짝은 은근슬쩍 안 재민의 앞에 비스듬하게 서서 그 다음 말을 유도하기 시작했다. “가족이랑 싸운 거야?” “...엄마가...” 그러면서, 안 재민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자존심 때문에라도 우리 앞에서 눈물을 보일 수는 없다는 얼굴로, 안 재민은 손가락을 얼굴에 갖다 대는 척 하면서 몰래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다. 주위를 둘러보면서 길을 걷자, 곧 조그만 슈퍼마켓이 보였다. 나는 그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넥타이를 풀러 주머니에 넣고, 셔츠의 윗 단추를 풀렀다. 내 옷차림새를 흩어본 후, 다른 사람들의 눈초리에 굴하지 않고 아직까지 꿋꿋하게 코트를 입고 다닌 탓에, 그나마 교복이 많이 가려졌다는 것에 안도했다. 나는 슈퍼마켓 안으로 걸어 들어가 맥주 몇 병과, 소주 1병을 골랐다. 그것들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가자, 슈퍼 주인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나를 의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저, 미성년 아니야? 신분증은 있어?“ “아, 네.” 나는 가방을 뒤적거려 지갑을 꺼냈다. 작은 형의 신분증을 꺼내 내밀자, 주인 아주머니는 더 이상 추궁하기가 귀찮은 듯, 가격을 계산해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나는 지폐를 꺼내 드린 후, 거스름돈과, 까만 비닐 봉지에 담긴 술들을 집어 들었다. 봉지에 담겨진 술병들이 서로 부딪혀 딸각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공원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어?” 마침 아까의 벤치 앞에 도착했을 때, 짝과 안 재민이라는 녀석은 벤치 위에 앉아 있었다. 나를 놀란 듯 바라보는 그 둘을 지나쳐, 나는 까만 비닐 봉지를 그 녀석들 옆에 내려놓았다. “...집에 간 것, 아니었어?” 정말로 놀랍다는 얼굴로, 짝꿍은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말은, 내가 당연히 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도 들려서, 나는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지금, 이 녀석은 나보고 집에나 가라고 돌려 말하는 걸까? “...반장?!” 그 사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닐 봉지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한 안 재민이 경악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짝꿍을 바라보았다. “라이터 있냐?” 짝은 드러난 술병 더미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잠자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는 라이터를 고쳐 쥔 후, 그것을 이용해 맥주의 뚜껑을 따기 시작했다. “자.” 맥주병을 불쑥 내밀자, 안 재민은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황급히 맥주병을 받았다. 그리고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아이처럼 나에게 간절한 시선을 보내온다. 나는 그런 안 재민에게, 친절하게 다음 행동을 지시해주었다. “마셔.” 다음 술병은 짝에게 건네고,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소주병의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화악, 풍겨나오는 독한 술냄새에 졸린 정신이 조금 깨어나는 듯 하다. 안 재민과 짝은 그런 나를 이상한 사람 보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 녀석들을 무시하고, 나는 소주를 들어 홀짝거리며 마시기 시작했다. 쓰고, 또 그러면서도 어딘가를 비틀어 놓는 듯한 느낌이 내 속을 가득 채운다.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지독한 알코올 향내가 그 다음에 찾아온다. 뒤늦게, 두 녀석이 조용히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부모면 다냐...” 한 병을 금방 비우고, 칭찬해달라는 듯, 내게 빈병을 내미는 안 재민에게, 나는 말없이 다른 병을 따서 건네주었다. 안 재민은 내게서 건네받은 술병을 손에 감싸쥐고, 거칠게 내뱉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이 없어 보이냐?” 대답을 바라고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 역시, 대답을 해 주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안 재민의 옆에서 짝꿍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맥주를 조금씩 들이키고 있었다. “솔직히, 내가 그렇게 실력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또 그 일이 힘들 거라는 것도 알아.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서 한다고 그러는데... ...나한테 어리대.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모른대. 대체 누가 이런 말을 하라고 시켰냐고 묻더라. 어떤 나쁜 녀석이 너를 꼬셨니, 하면서 말이야.“ 안 재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다시 한 번 소주병을 들어 입가에 가져갔다. 입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소주를, 삼키지 않고, 입 안에서 한 번 굴려보았다. 마치, 와인을 감정하듯이. 와인의 향긋한 향과는 달리, 소주에서 느껴지는 것은 비린 알코올 냄새였다. 그렇지만, 와인이나 소주나 둘 모두 술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난 말이야...부모님 말이라면 한 번도 어겨본 적이 없어.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친구들하고 제대로 놀아 본 적도 없어. 그런데, 이번 딱 한 번만...내가 이렇게 애원하면서 하게 해 달라고 말하는데...“ 안 재민의 목소리가 떨렸다. 짝꿍이 거북한 얼굴로 벤치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비껴섰다. 나는 짝 대신 비어진 자리에 앉았다. “내 앞에서 내가 그린 그림들을 모두 태워버리더라. 이런 건, 나중에 어른이 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대. 그 때가 되면 이미 늦는다고 말했는데도, 지금 당장 너무나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했는데도... ...엄마는 나에게, 이런 건, 너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야, 라고 말했어.“ 안 재민은,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의 몸이, 조금 휘청거렸다. “반장...너는, 이런 적 없겠지?” 안 재민이 작게 속삭였다. 나는 그런 안 재민의 납작한 뒤통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 녀석은, 어째서 이런 바보같은 질문을 나에게 하는 걸까. 설마, 지금 안 재민은 스스로의 괴로움에 지쳐서,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만 힘들다고 착각하고 있는 걸까? “너는 어떤 것이든지 다 잘 하고, 또 네가... ....네가 하는 말은 모두들 들어줄 거야.“ 안 재민이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휘청거리는 안 재민의 몸을 붙잡아 나에게 기대게 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온다. 약한 녀석, 이라고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는 시시한 녀석이라고 매도할 생각도 없다. 그저 나는, 어쩐지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이건, 슬픈 걸까? 아니면, 안타까운 걸까? 안 재민이 술에 취한 와중에도 버둥거리며 내게서 몸을 떼내려고 했다. 나는 그런 안 재민의 어깨를 손으로 내리눌렀다. “영광으로 생각해. 특별히 내 어깨에 기댈 수 있게 해 줄테니까. 뭐, 내 품은, 연인에게만 허락해 줄 생각이라서, 줄 수 없지만 말이야.“ 그러니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마, 라고 덧붙이자, 안 재민이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넌, 정말 이상해. 생각했던 대로야.” 나는 키득거리는 안 재민을 무시했다. 내가 볼 때에는, 다른 사람들이, 이를테면 너 같은 존재들이 더 이상하다는 말은, 귀찮아서 생략해 버렸다. “재민아!” 거친 발 소리를 내며 다가온 사람이, 재민의 이름을 불렀다. 이 녀석의 친구인듯, 얼굴에 땀을 흘리며 서 있는 남자는, 우리 또래의 앳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취했어, 이 녀석.” 안 재민을 내려다보며 무심히 말하자, 안 재민이 발끈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누가 취했다는 거야~!” ...지금 그런 것을, 취했다고 하는 거다. 바닥에 쓰러질 듯 주저앉는 안 재민을 재민의 친구가 받아들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어쩐지 책망의 빛이 어려 있어, 나는 옷을 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안 재민의 친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라면, 이 녀석, 학교에 보내.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뭐라고 안 하겠지만, 학교에는 와야 해. 내가 고리타분한 이유들을 말하지 않더라도, 너 역시 친구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안 그래?“ “아...그게...” 정곡을 찌른 듯, 녀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곧 중간 고사야. 더 늦으면, 이 녀석만 손해야.”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재민의 친구를 향해, 예의상 물어보았다. “도와 줄까?” “아, 아니, 됐어.” 더듬거리며 거절하는 모습에, 다소 안심을 하면서 가방을 추스렸다. “그럼 이만.” 인사를 건네고 걸어가자,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뭐지? 의아함에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덩치가 내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아.” 그제서야, 나는 내가 짝꿍을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조금, 무안해졌다. “넌...” 짝꿍은 그런 나를 향해 이상한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녀석, 설마 내가 자신을 잊어버렸던 것을 알고 있는 건가 싶어, 나는 남모르게 진땀을 흘리며 무표정하게 물었다. “왜.” “...이해할 수가 없군. 이건, 위선이야? 하지만...“ ...감기라도 걸려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짝꿍은 혼자 횡설수설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짝꿍을 피해 약간 바깥쪽으로 떨어져서 걷기 시작했다. 저 멀리 버스 정류장이 보이자, 아까 먹었던 술의 취기가 돌기라도 하는 건지, 양 볼이 따땃하게 달구어진다. “아...” 나지막한 감탄사를 내면서, 짝꿍은 발을 멈추었다. 나는 짝꿍의 시선이 멈춘 곳을, 나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화려하게 차려 입은 중년의 부인 한 명이, 우리 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혹시, 짝꿍의 어머니신가 싶어, 나는 짝꿍을 힐끔 바라보았다. 짝꿍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아주머니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불연 듯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는, 표현할 수 없는 비참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다. “간다.” 그 말을 남기고, 짝꿍은 성큼성큼 어둠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남겨져 짝꿍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마침 정류장에 버스 한 대가 멈춰진 것을 보고,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오늘은 무척이나 피곤한 날이었다. ...그나저나, 술을 사면서 든 비용은, 반드시 학급비로 청구할 테다. 나는 정신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 때의 나는, 마치 신내림을 받은 무당처럼,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뚜렷한 자각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앞에서 헤엄치는 색채의 물결들을 피부로 느낀다. 회색빛, 주황빛, 노랑, 그리고 붉은 보라, 검정까지 다양한 색들이 하나로 뭉뚱그러지면서 내 뒤로 밀려 흘러간다. 나는, 그 색깔의 향연들 사이를 뚫고 지나가듯 비장하게 걸어갔다. 나의 BGM은 빠른 비트와 강한 사운드를 가진, 가사도, 제목도, 가수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떤 노래이다. 나는, 그 속을 걸으며 무언가를 바란다. 그게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또 생각해 볼 마음도 없으면서... ...그저, 왜인지 가슴이 허전하다고 생각한다. 비어있는 구멍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드나들 듯, 그렇게 내 마음 속, 어딘가가 모자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게 무엇일까 하는 것 역시, 나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정신없이 산책을 하다가, 문득 멈춰서 밤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나는 이제까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했던 쓸쓸함으로 귓가가 멍멍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 “...은성아?” 나가버린 정신을 겨우 찾은 것은, 내 어깨를 잡고 부르는 한 마디 음성 때문이었다. 나는 멍한 얼굴로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응.”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네가 너무 오랫동안 걸어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었어. 봐봐, 얼굴이 파랗잖아.“ 민섭이, 호들갑을 떨면서 내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 온기에, 나는 조금씩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왜 온 거야?” “응? 그야, 집에 가다가...“ 틀에 박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민섭의 말을 도중에 가로막으며, 나는 턱짓으로 다른 녀석들을 가리켰다. “재네는 왜 온 거야?” 내 말에, 도연이 발끈한 얼굴로 일어났다. “뭐야, 그래서 불만이야?!” ...불만이야, 이런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걸로도 차이고 넘쳤지만,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도연의 표정에, 얌전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야.” 도연은 퉁명스럽게 나를 부르고는, 내 손에 작은 캔 하나를 건네주었다. 나는 따뜻한 커피 캔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너 먹으라고 주는 것 아니야. 그냥... ...그래,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려고 했는데, 그만 잘못 사서...그래서, 네 녀석이 캔 좀 차갑게 식히고 있으라고 주는 거야.“ 도연이 나를 향해 얄밉게 말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풋, 그렇지.” 영훈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영훈의 입꼬리는 안정되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손 안에 쥐어진 따뜻한 캔을 내려다보다가, 집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 집에 가려고?” 영훈이 내 옆에 서서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캔을 차가운 볼에 갖다대고, 버릇처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하, 식혀서 도연이에게 주려고?” 영훈이 자신의 손에 든 커피 캔을 툭, 하고 따서 입에 가져가면서 키득거리며 물었다. “...너...” 얼굴이 벌겋게 되어 영훈을 노려보는 도연을, 나는 조금쯤은 심술이 나서 바라보았다. ...그래, 차가운 음료수가 그렇게 먹고 싶었냐? “아, 따뜻해서 맛있다.” 민섭이 내 옆에서 역시 커피 캔 하나를 마시면서,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도연을 힐끔 바라보는 민섭의 얼굴은, 무언가 신이 난 듯 보였다. 이제, 도연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라, 눈을 매섭게 번득이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커피 캔을 따서 빠르게 입에 대고 마셨다. 역시, 음료수는 뜨거울 때 마셔야 맛있다. “...엇? 야...!!” 도연이 뒤늦게 내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경악성을 질렀다. 흥, 그러거나 말거나... ...어찌되었건, 나는 차가운 밤 공기 사이를 걸어가며 마시는 따뜻한 커피가 눈물 나올 정도로 맛있다는 것만 생각하고 있으련다. “하핫, 그러니까 애초부터...” “닥쳐~! 네 음료수나 이리 내놔~!“ 도연은,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영훈을 도중에 가로막으며, 영훈의 손에 든 음료수를 뺏으려고 애쓰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와중에도, 영훈은 기분나쁘게 히죽거리면서 “애시당초 순순히 말할 것이지...” 하는 식의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글쎄, 말은 둘째치고, 영훈의 저 미소는, 한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쁘다. 나는 다 마신 커피캔을 마침 보이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영훈의 손에서 캔을 빼앗아 입가에 가져갔다. 먹지 않고 싸우고 있을 거라면, 차라리 내가 마셔주지. 나는 유치하게 음료수 하나 가지고 싸우는 두 녀석을 향해, 마음 속으로 혀를 차면서, 음료수를 다 마시고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영훈은, 내가 음료수를 빼앗아 마셔서 화가 난 것인지, 붉어진 목덜미를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누가 그렇게 놀고 있으랬나, 싶어, 나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이것도 마실래?” 옆에서 민섭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커피 캔을 내밀었다. “아, 응.” 고개를 끄덕이며 캔을 받으려는데, 도중에 도연이 그 캔을 빼앗아서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야!!” 민섭이 화가 난 얼굴로 소리치자, 도연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목이 말라서.” “...두고 보자.” 민섭이 음침한 얼굴로 이를 갈자, 도연은 흥,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여간, 이 녀석들은 애다, 애. 아니, 음료수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싸울 수 있다는 것도 나름대로 재능일지도... 나중에, 영훈에게 음료수 하나라도 사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바람이 차가운 이런 날... ...혼자서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나에게 왠지 모를 위안이 되었다. -12- 나는 결국, 담임 선생님을 따라, 영화 감상부에 들어갔다. 공주님은, 그렇게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송부에 들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 공주님은 굉장히 기분이 나쁜 상태였다. “...이번 수행 평가 이야기 들었어?” 그렇지만, 나와 밥을 같이 먹는 녀석들 중에, 공주님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채고, 일일이 배려해 줄 만큼 착한 녀석은,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아, 어쩌면 존재감이 희미한, 소...그러니까 뭐였더라? "...소 지성인데.“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씹고 있던 음식을 꿀꺽 삼키면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어쩌면 소 지성 정도가, 이 중에서 유일하게 배려라는 걸 아는 놈일 수도 있다. “응? 이름은 왜 말해?” 공주님이 그 모습을 보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갑자기, 아, 하고 입을 벌렸다. “설마...은성이도 사람인데, 네 이름이 뭔지는 기억하고 있을걸? 그렇지, 은성아?” 나는 공주님의 시선을 피해 반찬을 집어들었다. “...야, 너 설마...” 가라앉은 공주님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나는 성실한 얼굴로,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 기억하고 있었어.” “...” 공주님은 수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한참이나 노려보았지만, 딱히 꼬투리를 잡을 만한 게 없었던지 그냥 입을 다물었다. “...” 그 옆에서 민섭 역시, 눈을 지그시 내려깔고 나를 바라 보았다. 조금만 더 말이 나오면, 민섭의 입에서 예전 일들이 줄줄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나는 화제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다. “...수행 평가가 왜?” 자연스럽게 질문하자, 엉뚱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우리 담임 때문에 그러는 것 아니야?” 그 말에, 모두들 소 지성을 바라보았다. 소 지성은 갑자기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자,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얼굴로 설명을 시작했다. “담임 선생님 작년 별명이 평균 B였잖아.”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자, 소 지성은 덧붙여서 말을 했다. “레포트를 제출한 것으로 수행 평가 점수를 매기는데, 제일 위의 이름을 봐서, 이름이 마음에 들면 A, 마음에 안 들면 C까지 마음대로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 그리고 기말 때에는, 중간 때 주었던 수행 평가 점수를 옆에 놓고, A였던 사람은 C를 주고, C였던 사람은 A를, B였던 사람은 B를 준대. 레포트를 안 낸 사람은 D이고.“ ...그렇다면, 레포트를 내는 의미가 없지 않은가. 소 지성은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는 우리를 향해. 더욱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레포트를 살펴보지도 않으면서 레포트를 내게 하시는 이유로는... ...레포트를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라는 설과, 레포트를 이면지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어.“ 너희들은 어떤 이유가 맞는 것 같아? 하고 물어보는 소 지성의 말에, 모두들 질린 얼굴로 밥을 먹는 것에 열중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힘들여 쓴 레포트가 엉망으로 취급받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소 지성이라는 녀석의 심상치 않은 일면을 엿보게 된 것이, 소 지성은 혼자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어려운 문제야...’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모두들 그 모습을 못본 척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공주님이 멍한 얼굴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곧 수학여행을 가겠네.” 밥을 먹다 말고, 불연듯 깨달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공주님은 즐거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면서 살며시 웃는 폼이, 메마른 사막 안에서 한 줄기 단비를 만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다. 나는 그런 공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마디 말을 툭하고 던졌다. “그 전에 중간 고사를 보겠지.” 갑자기, 분위기가 암울해져서, 아이들은 모두 눈 앞의 도시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무시하고 창문 밖을 힐끔 바라보았다. 요즈음의 날씨는 상당히 따듯해서, 길을 걸을 때면, 괜시리 볼 쪽이 간질간질 해지곤 한다. 그리고, 그럴 때에 가끔씩 발걸음을 멈춰 서서, 미친 척하고 기지개를 한 번 쭉 펴 주면, 내 몸의 내장들까지 모두 기지개를 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묘하게 상쾌한 공기를 뱃 속 깊이까지 흡입하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내 머릿속은 멍한 느낌으로 맑아져와, 나는 가슴 깊이 생각한다. ...아아, 이제 겨울이 지나갔구나, 하고 말이다. “...은성아.” 내 어깨를 툭, 하고 치는 민섭의 손길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젓가락으로 밥을 약간 집어들었다. “으으, 나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 하나도 모르겠어.” 공주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운 얼굴로 말하자, 도연이가 동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어떻게 하지?” 울상이 되어 질문하는 공주님을 향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해주었다. “열심히 하면 되지.” ....또다시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이들은 다시 밥을 퍼먹기 시작했는데, 그 기세가 가히 공격적이라, 내가 다 주춤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넌 입학 차석이었지.” 공주님이 음산하게 중얼거리자, 옆에서 짝꿍이 참, 그렇지,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그게 뭐가 어때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일방적으로 저런 시선을 받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노릇이라, 나는 일단 방패막으로 영훈을 가르켰다. “저 녀석이 나보다 더 공부 잘해.” 그 말에 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하지만 머리는 은성이 네가 더 좋잖아?“ ...머리가 좋으면 뭐 하나, 노력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기, 나 지금 굉장히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는데...” 공주님이 우물거리며 말하자, 영훈이 고개를 들어 씨익 웃으면서 다음 말을 재촉한다. “어서 말해.” 그러면서 혼자서 팔짱까지 턱, 하고 끼는 영훈의 모습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거만하게 느껴진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 증거로, 지금 공주님까지 위협적으로 손을 주먹쥐고 있는 중이니까. “...아니, 됐다.” 공주님은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거드름을 피우는 영훈의 모습에 그만 질려버린 듯,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며 도시락을 바라보았다. “하하, 뭐, 내가 전교 1등이라는 것을 굳이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닌데...” 영훈은 과장된 오버 액션까지 취해 가면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사락, 하고 넘겼다. ....저 녀석이 비싼 밥 먹고 왜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영훈이 한 마디만 더 하면, 우리들 중 누군가가 영훈의 머리통을 도시락통으로 후려쳐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만해.” “닥쳐라.” 민섭과 도연이 동시에 말을 하면서 얼굴을 찌푸리는데도 불구하고, 영훈은 이미 아련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것에 열중해 있었다. “뭐, 모르는 거 있어? 자, 아무 것이나 한 번 물어 봐.“ “...그만 해라.” 옆에서 짝꿍이 더 이상 영훈의 저 꼴을 못 보겠다는 듯, 괴로운 음성으로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영훈은 한껏, 스스로에게 도취된 미소를 띄고, 우리들을 둘러보았다. “뭐? 나랑 같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사실, 내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일이긴 하지만...너희들이 그렇게 원한다면, 내가 특별히 같이 study를 해 주지. 그렇지, 은성아?“ “난 싫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영훈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고 싶은 생각에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공부라는 항목에 대해서는 속좁기로 유명한 놈이, 같이 study는 또 뭐란 말인가. 분명, 저 녀석은 나에게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원한을 이 기회에 풀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어? 은성이랑, 네가 공부 가르쳐 주는 거야?” “난 아냐.” 눈을 반짝이며 묻는 공주님을 향해, 확실하게 부정해 주었지만... ...왜인지, 어떤 누구도 나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럼 은성이랑 공부나 한 번 해 볼까.” ...도연이, 너 그 긍정적인 대답은 또 뭐냐. 게다가 내 이름은 왜 들어가는 건데...? “그럴까?” 민섭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는 모습을, 나는 끔찍한 심정으로 노려보았다. 이 녀석들이 뭐가 어쩌고 어째?! “...나는 공부 안해. 그러니까, 너희들끼리 해.“ 단호하게 선언하자, 공주님이 나를 향해 고개를 갸웃하면서 묻는다. “왜? 다같이 공부하면 재미있을 것 아니야. 너도 따로 공부할 필요 없고...응? 같이 공부하자.“ “싫어.” 나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애시당초, 나는 그다지 부지런한 성격이 못 된다. 공부에 대해서도 그렇다. 물론, 나도 학생이니만큼 공부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공부를 못 하는 학생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의 스트레스 역시, 같은 연유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들이었다. 공부를 하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공부를 하는 시간에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속 편하고, 내일 시험 공부를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밤 산책은 하고 싶다. 결국 내가 택하는 방법이라는 것은, 시험 전날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책을 중얼중얼 외우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도 밤새 공부를 하지는 못하고, 도중에 깜박 잠이 들었다가, 새벽녘에 초조한 심정으로 미친 듯이 책을 들여다보기 일쑤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스터디라니... ...다른 누가 나에게 뭐라고 해도, 나에게 공부란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끔찍했다. “쳇.” 영훈은 김 샜다는 얼굴로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에에~.” 항의의 신음소리를 내는 공주님을 무시하고, 나는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밥을 먹고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 자리로 가 엎드리자, 갑자기 기분이 묘하게 우울해진다. 언젠가 들었던 누군가의 설교가 떠오르다. 사람은 혼자 사는 게 아니야, 하고 잘난 척 나에게 말을 했었던 사람. ‘너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주위를 둘러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알아 채 줘.’ 그 사람은 또한 나에게, 이 세상은, 너 한 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게 아니잖아? 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그 때와 마찬가지로 불퉁하게 대답한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의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은, 나 한 명뿐이야. 그리고 그렇게 홀로 존재하는 나 조차도, 내 모든 것이 아닌, 반 쪽짜리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나는, 숨겨진 반쪽을 찾아 헤매는 일로도 너무 벅차서, 당신처럼 박애주의의 정신으로 다른 이들을 신경 쓸 여유가 없어. 이 대답에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감은 눈 사이로 보이는 나의 시계에는 오직, 까만 어둠만이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바닥 없는 늪 속에 빠져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국, 스터디 건은 흐지부지 되어 공주님은 한동안 불퉁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곤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험은 다가왔고, 그 때문에 아이들은 유령처럼 음침한 얼굴이 되어, 반 내에서 사소한 일로도 목소리가 높아지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도 정작 주먹다짐이 오고가는 일은 없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다가오는 시험에 대비해 체력 소모를 아끼기 위해서라고 남몰래 추측하고 있었다. 걱정했던 수행 평가는 비교적 무사히 지나갔다. 우리 담임 선생님의 수행 평가는, 이번에도 역시 레포트였는데, 대충 써서 냈던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영훈은 정말로 공둘여 레포트를 썼던 모양이었다. 그 결과 영훈은 레포트 점수를... ...C를 맞았다. 그 일로 격분한 영훈은, 한동안 누구랄 것도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노려보며 시비를 걸기에 바빴는데, 그 와중에 나에게도 와서 슬쩍 질문을 던졌다. 나는 영어 수행평가 점수를 묻는 영훈에게 담담하게 A를 받은 나의 점수를 말해 주었다. 레포트를 내기 전에, 내 레포트를 들춰 보았던 영훈으로서는 그 결과를 받아들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영훈은 밥을 먹으면서도, 이건 불공평하다는 둥, 차별이라는 둥, 교육 위원회에 신고할 거라는 둥, 듣기에 낯 뜨거운, 치사한 소리들을 중얼거렸다. 참다 참다 못참은 도연이 결국, 영훈을 향해 소리를 지른 후에야 영훈은 중얼거리는 것을 멈추고 삐진 얼굴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째서 은성이 네가 A야?” 역시 내 레포트를 보았던 공주님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공주님은 B라는 점수를 받았다고 들었다. 내 점수가,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역시 불공평한 처사로 보이는 점수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거 아니야. 그냥, 표지에 화려한 꽃 무늬를 그려넣고, 또 레포트에 썼을 뿐이야.” “...뭘?” 소 지성도 뚱한 얼굴로 내게 질문을 던진다. 분명 저 녀석도, 자신이 한 것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 속상한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 3반 반장입니다. 언제나 저희를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나는 내가 썼던 문장들을 애써 떠올리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잠시, 내 주위가 조용해졌다. 영훈은 허무한 얼굴로 도시락을 노려보고 있었다. “...밥 먹자.” 민섭이 침중하게 말하자, 아이들은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13- 우리 학교는 사립으로, 일명 이사장 친위대라고 불리는 이사장 파의 횡포가 극심한 곳이었다. 물론 이사장 파에 대항하는, 전교조 파 선생님들이 있긴 하지만, 그 수는 극히 소수였고, 또 그나마 있는 선생님들도, 이사장님의 넓으신 아량에 의해 다른 학교로 떠밀리듯 전근을 가 버리셨다. 결국, 현재 우리 학교에 남아 있는 선생님들은, 대부분 이사장 파로 분류되는 분들로서, 지금은 심심해서인지, 저희들끼리 계층을 나누어 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모두들 이사장 파라면, 결국 서로간의 우열을 정하는 기준은 단 하나뿐이다. ...누가 더 이사장과 친한가...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 기준에 따라, 선생님들은 대충 네 가지로 구분이 된다. 첫 번째, 이사장의 친인척 파. 국어 선생님이나, 또는 양호 선생님, 기타 다른 몇몇 선생님들이 이 파에 속하는데, 특징으로는 허황된 뒷 소문을 들 수가 있다. 알고 있냐, 그 선생님이 이사장의 조카의 친구의 며느리의...라는 식으로 시작되는 이 헛소문은, 결국 마지막에는, 그럼 그 선생, 이사장이랑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 하는 절규를 이끌어내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두 번째, 이사장 아첨파. 만주 벌판이 대표적인 예로, 언변이 능하고, 이사장에게 허리를 숙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강한 자에겐 강하게, 약한 자에겐 약하게를 당연하게 여기며, 보통 자기의 뒤에 든든한 자신만의 빽을 가지고 있다. 만주 벌판만 해도, 이모부가 방송국의 모 유명 PD여서, 다른 선생님들과 학교에 틈만 나면, 우리 학교의 비리를 방송국에 찌르겠다고 협박을 한다고 한다. 그 아래 세 번째, 나도 끼고 싶어요, 부류의 선생님들. 이 선생님들은 대부분 눈치가 빠르고 출세 욕구가 강하지만, 슬프게도 뒷받침해줄 강한 빽이 없으며, 또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아첨의 기술이 아직은 미약하다. 때문에 이 선생님들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의 선생님들에게 노골적으로 달라붙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네 번째, 이도 저도 아닌 부류의 선생님들이 있다. 이 선생님들은 학교의 행태에 못마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지는 못하는, 따라서 쉴 곳을 찾지 못하고 학교 안을 방황하기만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이렇게 주절주절 우리 학교 선생님들에 대해서 논하는 이유는... ...내 목덜미를 쓰다듬고 있는 국사 선생님의 만행을, 다른 사람들이 왜 묵묵히 참아 내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싶어서이다. 국사 선생님은 위에 말한 두 번째 부류에 속한 사람으로서, 교육부의 높으신 분과 친척이라는 뒷 배경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 학교 안에서 큰 제재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곤 햇다. 물론, 국사 선생님은, 그리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이 선생님든 악당이 될 만한 자질을 지니고 있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국사 선생님의 평판이 바닥을 기닌 이유는, 국사 선생님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반장, 공부하느라 피곤하지?” 말을 하면서 귓가에 숨을 훅, 하고 불어 내쉬는 국어 선생님의 행동에, 샤프를 쥔 내 손이 나도 모르게 바르르 떨린다, 나는 고개를 숙인 국사 선생님의 머리 저쪽에서 언뜻 보이는 하얀 머릿속을 응시하면서, 이대로 샤프를 국사 선생님의 머리에 꽂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뭐, 심각하게 그 결과가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는 어렸을 때 작은 형이 장난으로 내게 던진 콤파스가 이마에 꽂혀 덜렁거리는 장면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었으니, 샤프를 머리에 꽂을 경우, 샤프가 머리에 꽂힌 채 위 아래로 조금씩 움직이는 광경을 충분히 상상해 낼 수 있었다. “반장, 쉬어가면서 공부 해야지.” 국사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손으로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역시, 기분이 나쁘다. 국사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만지는 일이 많았는데, 그 뒷 배경에는 아주 가슴 아픈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국사 선생님에게는 우리 또래의 아들이 한 명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로, 국사 선생님은 우리의 모습에서 아들을 보고, 이렇게 친근한 스킨쉽을 시도하곤 한다...라는 것이 그것이었는데, 이 근원지를 알 수 없는 소문에 대해 많은 아이들은 강력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우선, 나부터도 한 마디를 던지고 싶은게... ...국사 선생님은 자신의 아들도 이런 식으로 만졌을까? 적어도,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한 적이 없었다. “아, 씨발!” 갑자기 옆에 앉아 있던 짝꿍이 사납게 욕설을 내뱉으면서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 “아니, 저 놈이...!” 이렇게 무례한 태도를 처음으로 겪어 본 국사 선생님은, 가슴을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고 파르로 떨리는 음성으로 짤막한 호통을 치셨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짝꿍은 그대로 복도를 걸어가....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하여간, 이래서 개나 소나 학생이라고 모두 받으면 안 된다니까!” 국사 선생님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해, 크게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떴다. 그 날, 교실을 나간 짝꿍은 끝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은 제발 그냥 집에 있어라.” 잠을 자다가 일어난 후, 시계를 보고 옷을 차려 입을 때, 나는 나를 향해 다짐했던 민준의 말을 얼핏 떠올리며 잠시동안 망설였다. 민준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내일은, 중간 고사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나는 당연하다고 여겨질만큼 뻔뻔스러운 태도로, 아직까지 중간고사를 대비한 공부를 해 놓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진득하게 책상에 주저앉아 공부를 하는 게 마땅한 일일 텐데도... ...가슴이 왠지 답답해서, 방 안에 있기가 싫어졌다. 어차피, 산책을 하는 몇 시간을 집에 있는다고 해도, 내가 그 시간동안 열심히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밖에 나가서 걷다가 오자. 나는 그렇게 결심하며 습관처럼 mp3와 핸드폰을 주머니 속에 챙겨넣었다. 나는 밤 거리를 걸으며 숨을 들이쉬었다. 내 주위를 빙빙 도는 거리의 불빛, 그리고 내 머리 위에 펼쳐진 까만 밤하늘... ...저 색은 아마도, 흑청색이라 불리우는 색깔이겠지.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의미 없는 한 마디를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 대한 것조차도, 지금 이 순간에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이어폰에서 흘러 나오는, 이름 모를 여가수의 매끄러운 고음이 나를 향해 속삭인다. [저를 부드럽게 안아 주세요~.]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이것은, 단순한 말일 뿐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못한. [당신의 옆에 있고 싶어~어~!]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절규하듯 여자가 노래부른다. 쿵쾅거리는 빠른 비트의 음악이, 그 여자의 심장소리처럼 고동치며 흘러나왔다. [언제나 나의 곁에에에!]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마치, 울부짖는 이 여인의 노랫소리에서 도망치듯이,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공기를 가로지른다. 어쩐지, 가슴 한 쪽이 욱신거린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나에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째서...- 나는 다음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어떤 누구도 나에게 말을 하지 마. 나의 행동을 이상하다고 비난하지 마. 나에 대해서, 수근거리며 평가하지 마. 내가 결정하고, 내가 행동했다. 내가 생각했고, 또한 내가 느낀 것들이었다. 내 모든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 것에 대해, 타인의 알량한 평가 따위는, 듣고 싶지 않았다. 설령, 내가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타인의 말이 옳은 것이라 하더라도... ...나의 세계에서 옳은 것은 나였다. 왜냐하면, 나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 한 명뿐이었으니까. ...생각하지 말자. 아무것도, 떠올리지 말자. 나는 고개를 흔들고 mp3플레이어를 조작해 다음 곡을 흘러나오게 했다. 아까와는 다른,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못한 앳된 청소년들의 목소리가 발랄하게 튀어나왔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 이 세상은 너무 답답해!] 빠른 비트, 강렬한 음악, 의미 없는 가사들. 그 모든 것들에서, 나는 도망치듯이, 혹은 어딘가로 전진하듯이 빠르고 씩씩하게 걸어나간다. “...안녕.” 그런 내 어깨를, 누군가가 잡아 제지시켰다. 나는 퍼뜩,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이 되어 앞을 바라보았다. “흠...이 근처에서 살아?”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내 앞에 서 있어서, 나는 혼란에서 쉽게 빠져나오는 것이 조금 더 어려웠다. “...아...” 대답 대신 멍한 신음 소리를 한 번 흘려보낸 후에야, 나는 현실은 인지했다. “내일이 시험 아니었나? 그런데 이렇게 전날 밤에도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역시 모범생은 틀리네.“ 짝은, 그렇게 말하면서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짝에게서 풍겨나오는, 역한 술냄새가 바람을 타고 나에게까지 전달되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볼게요.” 짝은 옆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정중하게? 아니, 그 말은, 일견 예의바르게까지 들리는, 부. 탁. 이었다. 짝은 옆을 향해 상냥하게 웃기까지 했다. 무언가, 깨는 기분이라, 나는 덩달아 짝꿍이 바라보는 옆을 쳐다보았다. 그 곳에는, 한 중년 여인이 손을 흔들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다정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부유해 보이는 아주머니. ...이 녀석의 어머니라고 보기에는, 뭔가가 이상하다. “어때? 이대로 집에 갈 거야?“ “...응.” 아까까지 나를 휘감고 놓지 않았던 감각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가라앉아 버렸다. 이제 그만 집에 돌아가 시험 공부를 해야 할 것만 같아,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시간 있으면, 우리 집에서 쉬다 가지 않을래?” 짝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짝꿍을 한참동안 찬찬히 살펴보았다. 이 녀석, 어디로 보나, 술에 완전히 쩔어 제 정신이 아닌 듯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평소와는 달리 번쩍번쩍 거리는 눈매와 (물론 원래부터 음침한 녀석이긴 했지만.), 한 쪽 입꼬리를 올려 비뚜름하게 미소지은 얼굴 표정은, 나에게 심각한 위화감을 안겨 주었다. ...이러다가 이 녀석, 내일 수사 25시 같은 곳에 나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된다. 요즘 취객을 노린 범죄도 많다고 하던데... 어울리지도 않는 걱정을 잠시 해 보다가,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짝꿍의 집에 찾아가 이 녀석을 던져 놓고, 부모님에게 이 녀석이 머리통을 얻어맞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일 것... ...아악, 재미고 뭐고, 이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내가 집까지 따라가야 하는 건지... 하면서도, 나는 할 수 없이 녀석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래서, 반장 같은 허울만 좋은 직책은 맡고 싶지 않았다. 쳇, 하면서 나는 귀에 꽂은 이어폰을 뒤늦게 잡아 빼어 주머니 속에 넣었다. “...mp3?" 짝이 흥미롭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은... ...뭐랄까. 적응이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평소에는 나를 개 닭보듯 했던 짝꿍이, 하루에 한 두 마디 하는 것도 듣기 힘들던 그 짝꿍이 나에게 이렇게 친한 척 구는 것이, 영 이상하게 느껴졌다. “있잖아,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나른한 어조로 말을 하는 짝꿍의 말꼬리가, 미묘하게 꼬여져 있어, 나는 이 녀석이 지금 술에 취해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속으로는 몇 번이나, 이 녀석, 술 처먹고 와서 어디서 꼬장이야~! 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어쩌겠는가. 술에 취한 녀석은, 개도 안 건드린다고 했다. ...아니, 이 말이 아니었던가?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옆에서 짝꿍의 헛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는, 내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지?” 한순간, 발걸음이 멈춰졌다. 하지만 나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태연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쪽 방향 아니야, 바보.” 옆에서 짝이, 쿡, 하고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짓더니 능숙한 걸음으로 앞장서서 걸어간다. “왜, 화가 나?” 짝은 나를 향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담담히 대꾸했다. “아니.” 짝의 걸음이, 조금 빨라졌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든 mp3를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갑자기, 강둑으로 다시 돌아가 mp3의 음악을 들으며 산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생겨났다. “...그렇겠지. 계속해서 생각했어. 너는 그 날, 그 모습을 봤어.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지. 왜 그랬을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깊게 생각할 것도 없는 거였어. 안 그래? 네 녀석은, 위선을 보이는 상대보다, 더 질이 나빠. 너는, 분명 그 모습을 보고서도,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왜? ...관심이 없으니까.“ 혼자서 말을 하고, 혼자서 대답을 하며, 짝꿍은 키득키득, 비틀린 냉소를 연신 지어댔다. “...집이 어디야?” 어서 빨리 이 녀석을 집에 처 박아 놓고 가고 싶어,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짝은 걸음을 멈추어 나와 나란히 서더니, 나를 향해 눈을 심술궂게 번득였다. “내 이름을 말하면 알려주지.” ...핸드폰이라도 꺼내서 이 녀석의 머리를 후려치고 싶다, 라고 나는 한 순간 생각해 버렸다. 곧, 그 생각이 범죄와도 같다는 것을 깨닫고, 가슴 깊이 묻어두는 선에서 그쳐 버렸지만 말이다. “너는, 봤잖아?” “그래.” 자고로, 술 취한 사람에게는 반박하지 말라고 위대한 옛 주당들이 말씀하신 바가 있다. 나는 걸음을 빨리하며 적당히 대꾸를 해 주었다. “...언제, 그 일을 가지고 날 협박할까, 기다렸지. 네가 소문을 내지 않기에 왜 그럴까, 하면서 생각했는데... ...이제는 알겠어. 너는, 모든 걸 다 가진 녀석이야. 안 그래?“ ...만약 짝꾸이 나보다 10cm만 키가 작았어도, 나는 이대로 돌맹이라도 주워 짝꿍의 머리를 후려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짝을 그대로 파출소 앞에 버려두고... ....잠깐, 지금이라도 이 녀석을 파출소 같은 곳에 버려두고 가면 안 될까? 그 엄청난 유혹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히 고이기 시작했다. “택시.” 나는 손을 들어 지나가는 택시 하나를 불러세웠다. 그 택시 안에 억지로 녀석을 밀어넣고, 조금은 짜증이 어린 목소리로 녀석을 잡고 흔들었다. “야, 주소 말해, 어서.” 다행히, 녀석은 순순히 주소를 말한 후, 잠이라도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나는 주머니 속에 든 돈을 세어보면서, 짝꿍을 힐끔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그렇게 힘든지, 짝꿍의 얼굴은 많이 지쳐보였고, 또 그만큼 핼쓱해져 있었다. ...술을 그렇게 퍼마시니까 그렇지.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내버려두고 갈 수 없는 책임감 강한 내 모습이 슬프다. 나는 택시가 어느 곳에 멈춰설 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땀이 난 손바닥을 바지에 슬며시 닦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야.” 짝꿍은 택시에서 내린 후, 골목길 사이로 몇 분 동안 걷더니, 몸을 뒤로 돌려 배우처럼 희곡조로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아무리 보아도 혼자 사는 이들의 원룸 자취집, 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주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학생들의 취미에 맞춘 듯, 알록달록한 페인트가 칠해진 주택은 아기자기하고 귀엽기까지 했다. “왜? 우스워?” 우습긴 대체 뭐가 우습다는 건지, 나는 영 이해를 하지 못해, 그저 짝꿍을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집에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보자.” 적당히 인사를 하고 이 자리를 피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럴 사이도 없이 짝꿍의 손이 내 손목을 거세게 쥐어잡았다. 나는 인상을 쓰면서 저릿한 고통을 호소하는 팔목을 내려다보았다. “...네 녀석이 어머니 운운하면서 말장난을 칠 때, 내가 어떤 생각이었는지 아냐? 내 엄마는, 너와는 달리 정말로 죽어서 이 세상에 없거든.“ 짝꿍이, 가면처럼 빙그레 미소지었다. 만들어낸 것 같은 그 미소가, 어쩐지 기분이 나쁘면서도 나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알아? 네가 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지나칠 때... 나는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었다. 너는, 그런 것 모르겠지. 나는, 네가 즐겁게 살아갈 때, 술주정뱅이 아버지 밑에서, 동생과 같이 살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몸을 팔았어. 그래서, 더럽냐?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나는 무심한 눈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 거지? 내가 동정해 주기를 원해?“ [짝-.] 거센 타격음과 함께 볼 한 쪽, 아니 얼굴 전체가 얼얼해지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내음이 뒤늦게 입 안을 감돌았다. 나는 흔들리는 시야를 바로잡기 위해, 잠시 비틀거리는 몸을 다잡았다. “...넌...” 이를 악물고 있는 짝꿍의 얼굴은, 어딘가 분한 것처럼 보였다. 딱 그거다.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을 손에 쥐지 못해, 안달이 난 철부지 어린아이. 녀석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 번 이를 갈았다. “아니면, 무슨 말을 원하는 거지? 나는, 네 이름도 몰라.“ 잔인하다고 해도, 할 수 없다. 내 말에 짝은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녀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무언가를 겁내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너는, 내가 너를 미워하고 경멸하기를 원하는 거야?” 내 무심한 질문에 짝은 묘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나는 뒤늦게, 녀석이 달빛을 정면으로 받고 있어, 얼굴이 더 새하얗게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너를 몰라. 그리고, 너도 나를 모르겠지. 그러면서, 왜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하지?“ “...너는...” 짝이 알 수 없는 말들을 웅얼거렸다. ...아아, 정말로 확실하다. 이 녀석은, 아직도 술이 덜 깬 상태였다. 나는 짝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이름을 알리고 싶으면, 네 이름을 똑바로 말해. 경멸받기 싫으면, 나에게 그렇다고 말해.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내 귀에 들리는 것만 듣는 사람이니까.“ 다들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저 17세, 평범한 고교생의 한 사람일 뿐으로, 무기력하고 게으른 성격의 소유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밥은 먹었어?” ...뭐, 우리 반 녀석들 눈에는 내가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이는 듯도 싶었지만... 저번에 그 안...뭐였더라? 하여간 그 녀석 일도 그렇고, 지금 짝꿍의 말도 그렇고, 대체 이 녀석들의 시선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비치는 건가 조금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어...” 짝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나를 뚫어져라 보는 모습이, 나사 풀린 인형과도 같다. 그래도, 밥을 먹었다니 다행이다. 빈 속에 술을 마시면, 다음날 숙취가 장난이 아니니까. “힘든 게 있으면 말해. 귀찮지 않은 이상, 들어줄 테니.“ “...아...” 이 녀석, 아까는 유창하게 지껄여대던 놈이, 갑자기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어, 아, 하는 신음소리만 흘려보낸다. 지금 이건, 다른 사람이 들으면, 꼭 내가 녀석을 협박하고 있는 장면처럼 오해될 법도 한 상황이었다. 나는 짝의 얼굴에 비치는 환한 달빛을 힐끔 바라보며, 짝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하고 쳤다. “...내일이 시험이다. 시험 공부 열심히 해.“ ...뭐, 일단 녀석이 성적이 떨어졌을 경우, 귀찮아지는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래서, 반장이라는 직책이 힘들다. 반 한 명, 한 명을 책임져야 하니까. 나는 그대로 걸어가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어머니 일은...미안하다.” 걸어가는 동안, 입 안의 상처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내음이, 나에게 내내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14- “...이번 안건은 수학 여행이다.” 중간고사가 모두 끝나고 2주 후, 나는 HR시간에 그렇게 말을 하고,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의 눈동자에는 견딜 수 없는 흥분과, 그리고... ...불안함이 가득 차 있었다. 불안함...? 하여간, 우리 반 아이들은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한다. “...반장, 설마, 수학 여행을 책임질 간부를 뽑자는 식의 말을 하는 건...” 지성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나는 지성을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내가 그러겠니.” 무엇보다, 수학 여행 때에는 할 일도 별로 없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 “다만, 오락 부장은 뽑아야 한다고 생각해. 모두, 이의 없지?“ 아이들을 둘러보며 묻자, 아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말을 속삭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반대해도, 어차피 할 거잖아.” 볼멘 소리를 내는 공주님은, 이대로 고이 무시해버리자. 나는 아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자, 그럼 우선 추천을 받지. 만약, 추천이 없을 경우에는 내가 뽑는다.“ 무작위로 뽑아 버리는 내 성격을 잘 아는 아이들은, 곧 서로의 눈치를 보며 몇몇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부반장에게 이후의 회의 진행을 맡겨버리고, 편한 마음으로 창가에 의자를 갖다대고 졸기 시작했다. 수학여행 당일, 국어 선생님은 놀랄 정도로 들떠 보이셨다. ...하여간, 보면 볼수록 독특한 선생님이다. “하하, 은성이 너는 어때? 기대되지 않아? 자고로 수학 여행하면...“ 국어 선생님은 나를 힐끔 바라보셨다. “...모든 사람의 로망이지.” 그러면서 씩 웃으시는데, 오늘따라 그 미소가 무척이나 수상쩍었다. 나는 졸린 눈을 하고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조금 후에 버스에 탈 때 말이야. 우리 같이 앉지 않을래?“ ...내가 왜 선생님과 같이 앉아서 수학여행지인 경주까지 가야 하는 걸까, 싶어 나는 물끄러미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안 되면 말고. 그래도,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든지 옆에 와서 앉아라. 내가 맛있는 것 많이 줄 테니까.“ ...거듭 생각하는 것이지만, 저 선생님의 뇌리 속에 나라는 사람의 이미지가 어떤 것이길래, 저런 발언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대꾸하기도 귀찮아져 대충 고개만 끄덕인 후에, 다시 꾸벅거리며 졸기 시작했다. “반장~!” 이 녀석 또한, 벌써부터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웃음을 지으며 내게 뛰어오는 공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원 체크 다 했어. 그리고...” 그래, 이제는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구나. 조금 기특해져서 공주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자, 공주님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에 그만 머쓱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어...” 공주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옆에 답싹 달라붙었다. “...귀찮아.” 공주님은 몸을 흔드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연신 웃고 있었다. ...수학여행을 간다는게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버스에 올라탔다. “아...” 나를 어색하게 바라보는 짝꿍의 옆자리에, 털썩 앉은 후에야, 깨달았다. ...습관적인 행동으로 그만 짝꿍의 옆에 앉아 버렸다. 하지만 짝꿍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곳으로 가서 앉으려는 것 같아, 나는 짝꿍이 일어나서 비어 있는 창가자리로 꾸물거리며 몸을 옮겼다. 그러자 짝꿍은 기다렸다는 듯, 내가 있던 자리에 앉았다. ...방금 뭐였지? 의아한 얼굴로 생각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인원 점검을 했는지 물어보신다. 인원이 많기 때문에, 우리 반에서 몇 명은 다른 버스로 가서 앉아 있는 상태였다. 나는 공주님의 말을 떠올리며 담임 선생님께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버스에 못 탄 녀석이 혹시 있더라도, 스스로 알아서 쫓아오겠지. 묵게 될 호텔 이름도 알고 있겠다, 굳이 내가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누구누구 왔니? 하고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뭐?“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으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공주님은 애교있게 미소지었다. “자지 말고 같이 놀자, 응?” “싫어.”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웃고 있는 공주님의 이마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노래라도 한 곡 불러.” “싫어.” 나는 싸늘하게 말한 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일어나라니까...!” ...이 녀석, 나와 전생에 원수라도 되나,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지? 나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곡만 부르면 되는 거지?” “응. 애들아, 반장이 노래 부른대. 자, 박수~!” 공주님의 선동에, 아이들은 요란하게 박수를 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제일 앞에 앉은 국어 선생님은, 아예 몸까지 돌리고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공주님의 손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어떤 노래 부를 거야?” “반주 없이 그냥 부를게. 이 노래는 오래 된 것이라서, 아마 노래방 목록에 없을거야.“ 그 말에 눈만 깜박이는 공주님을 무시하고, 나는 목을 가다듬은 후,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느냐. 셋이면 셋이지, 넷은 아니야. 랄라랄라랄라랄라~“ “...그만해~!” 하얗게 질려버린 아이들의 얼굴을 둘러보며 나는 즐겁게 웃었다. 후훗, 들어는 봤는가, 무한 리필 송을. 부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몇 시간이고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궁극의 노래를, 나는 즐겁게 이어서 불렀다. 막, 스물이면 스물이지 스물 하나겠느냐, 까지 불렀을 때, 공주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내 손에서 억지로 마이크를 빼앗아 가 버렸다. 뭐, 이걸로 더 이상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겠지, 싶어 나는 고개를 흔들면서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일단은 무시하자. ...왠지 앞으로 2박 3일의 수학 여행이 고단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도중에 몇 번씩 멈춰서서 여러 곳에 들려 구경을 한 후, 겨우 도착한 여관처럼 생긴 호텔 안에서, 나는 잠시간 침묵했다. “...왜 우리 방은 이렇게 인원이 적지?” 분명 한 방에 9명씩 배정이 되기로 했는데, 우리 방은 아무리 세어봐도, 6명이 전부엿다. 설마, 이 기특한 공주님이, 편하게 잠을 자자는 심보에 권력을 남용해 우리 방의 인원 수를 줄였나 하는 생각에 나는 공주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하지만 공주님은 백치처럼 눈만 깜박깜박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라요, 라고 말하는 듯한 공주님을 무시하고, 나는 소 지성을 바라보았다. 그나마 이 녀석이 더 믿음직하게 느껴진다는 이 현실이 슬프다. “9명 맞아, 나머지 3명은 조금 후에...아, 지금 들어온다.” 나는 문을 열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들어오는 영훈, 민섭, 도연의 세 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참담한 심정으로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심호흡까지 해 보았는데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너희들, 재네는 다른 반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거냐.” 주저하면서 묻자, 다른 녀석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뭐, 그랬어? 하는 질문을 던져온다. ...세상에, 저 세 녀석이 얼마나 우리 반에 들락날락거렸으면, 우리 반 녀석들이 같은 반인 것으로 착각까지 한단 말인가. 한 순간, 저 세 녀석이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세 놈은 내 기막힌 심정을 하나도 알아채지 못했는지, 저희들끼리 숙덕거리며 짐을 내려놓고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 받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 대부분은 오늘 밤의 파티에 대한 것이었는데... ...수학여행이라면 늘 그렇듯, 술로 지새우는, 이른바 죽어보자가 목표인 광란의 밤이, 이 녀석들의 주된 관심사인 듯 했다. 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할 일을 찾아 방황하는 아이들을 붙잡고 짐 정리와 방 청소를 시키기 시작했다. “자, 마시자.” 영훈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의심스러운 각종 술병들을 꺼내놓으며 말하자, 아이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둥글게 모여 앉았다. 나는 민섭에게 이끌려 억지로 그 자리에 끼여 앉았다. ....그냥 잔다는데도, 어지간히 귀찮게 군다. 이 녀석, 예전에는 이렇게 막무가내는 아니었는데...싶다가,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공주님을 노려보았다. 혹시, 민섭이 이렇게 억지로 행동하는 것을, 공주님에게 배운 것은 아니겠지? “빼는 사람은 없는 거다.” 영훈이 저렇게 웃으며 말하는 것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도연이 벌써부터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가서 안주 가져 올게.” 누군가가 촐싹거리며 말하더니, 곧이어 안주랍시고 새우깡을 비롯한 각종 과자 봉지들이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아, 술마실 때, 우유를 먼저 마시면 숙취가 덜한다더라.” 공주님이 어디선가 주워들은 어설픈 상식을 떠들어대자, 도연이 매달리는 듯한 눈으로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정말?” “응.” 공주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 도연은 방에 비치되어 있는 냉장고에서 누군가가 넣어둔 흰 우유를 꺼내 와 자신의 잔에 따랐다. “...뭐냐, 그건.” 영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질문을 던지자, 도연이 당당하게 대답한다. “나는, 우유에다가 술 타서 먹을 거야.” ...뭐, 자신이 원한다는데 굳이 말릴 필요는 없지 싶다. 영훈 역시 나와 동일한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한 번 흔들어 본 후, 술병을 따기 위해 병따개를 들었다. “야, 학주 뜬대~!” 누군가가 복두에서 요란스럽게 소리치자, 곧 “지금 소리친 녀석 누구야!” 하는 학생 주임 선생님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반은, 자나?” 학생 주임 선생님이 우리 방 문을 열고 그렇게 물었을 때, 우리 방은 술병이나 기타 이상한 물건들이 완벽하게 치워진, 취침 5분 전 상태를 취하고 있었다. “네. 선생님, 안녕히 주무세요.” 내가 대표로 생글거리며 고개를 숙이자, 학생 주임 선생님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3반 반장이 이 반이군. 그래, 너희들도 잘 자고...이 방은 걱정할 필요 없겠군.“ 선생님이 다음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문고리를 돌려 잡은 후, 소리 안 나게 방 문을 잠궜다. 몸을 돌렸을 때, 이미 이불은 저리로 걷어치워져 있었고, 영훈은 맥주 병을 따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 옆에서 소 지성이 소주병을 비틀어 따고 있었으며, 민섭은 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었다. 각자의 손놀림이 모두 예사롭지 않아 보일 정도로 능숙해서, 나는 잠시 녀석들의 과거를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연은 다른 사람들의 경악에 찬 시선을 무시한 채, 꿋꿋한 얼굴로 우유 잔에....소주도 아닌 맥주 몇 방울을 타서 홀짝거리며 마셨다. 공주님은 도연보다는 자존심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지, 맥주를 반 컵 정도 따르고는 다 마시지도 못하고, 도연과 같이 나란히 앉아, “하늘이 어지러워...” “나 막 취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지?” 등등의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하여간,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주위 사람들을 심심하게 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자.” 영훈이 씨익 웃으며 나를 향해 컵을 내밀었다. 컵에서 풍겨나오는 이 냄새는... ...소주다. “나는 참이슬이 더 좋은데...” 각자의 술을 홀짝거리며 마시다가, 조용히 중얼거리는 소 지성의 말에 주위 녀석들이 기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저 녀석, 아까부터 술병 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더니만, 실은 숨은 주당이었던 듯 싶다. “이대로 마시는 건 썰렁하지 않아? 우리 게임이라도 하자.“ 한 녀석이 그렇게 제안하자, 곧 여기저기서 동의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깐.” 나는 손을 들고 침중한 목소리로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술에 취해서인지 간덩어리가 부은 녀석들이 불만에 찬 눈초리로 나를 바라본다. “...왜?” 나는 고갯짓으로 아까부터 헤롱거리는 두 녀석을 가리켰다. “저 녀석들 먼저 치우고 놀아.” “...” 공주님과 도연은 그 사이,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서로의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울고 있었다. “그래, 네 맘 다 알아. 나도 얼마나 힘들었다고~” “역시...정말 나쁜 놈이라니까...” 하면서 나를 힐끔 노려보는데... ....아무래도 나를 욕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 “그래도 우리 힘내자,” 라는 식의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목덜미라도 후려쳐서 기절시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 마음은, 다른 녀석들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아이들은 두 녀석을 한 덩어리로 뭉쳐서 이불에 둘둘 말아 방 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게임이 무르익어갈수록, 즉 시간이 지날수록, 뻗어가는 녀석들이 늘어났다. 웬만큼 술을 마시는 민섭이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쓰러졌을 때, 멀쩡히 남아 있는 것은, 나와 영훈과 지성 뿐이었다. 뭐, 우리 세 명도 멀쩡한 것은 아니었지만... 애시당초, 게임을 통해 술을 먹게 하려는 것부터가 불공평한 것이었다. 지금의 결과는, 우리 세 명이 특별히 술이 센 편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게임을 잘 하는 세 명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쓰러진 녀석들을 둘러보며, 방 인원이 지금 전부 방 안에 안전하게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세어도 한 명이 모자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짝꿍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겨우 알아챘다. ...이 녀석은 또 어디를 간 건지... 찾으러 가야 하나,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자, 영훈이 나를 따라 일어났다. “나가려고? 같이 나가자.“ 지성은, 무슨 힘든 일이라도 있는지, 혼자서 자작을 하며 남은 술을 마시는 것에 열중해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지성을 가리켰다. “아냐, 너는 여기서 다른 아이들하고 같이 있어. 함부로 밖에 못 나가게 하...응?‘ 술에 취해 널부러졌던 녀석들 중 한 명이 부스스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이어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황급히 영훈과 같이 녀석을 부축해서 화장실로 데려갔다. 변기 앞에 내려놓고 몇 번 등을 두들겨주자, 녀석은 몇 번 신물을 토해내더니, 성대하게 토하기 시작했다. 끙끙대며 녀석을 자리에 눕히고 수건을 물에 적셔 입가를 닦아 주는데, 그 옆에서 또 공주님이 비척거리며 일어난다. “...술, 술 더 가져와~!” 그러면서 냅다 고함을 지르는데..., ....나를 비롯한 영훈과 지성은 모두 기겁을 할 정도로 놀랐다. 혹시 선생님이 들으실까 싶어 황급히 공주님의 입을 막는데, 술 취한 녀석이 어찌나 힘이 센지, 그 몸부림에 영훈이 나가 떨어질 정도였다. “술 없어?!” ...다시는 이 녀석과 같이 술을 마시나 봐라. 나는 남몰래 굳게 다짐하며 공주님을 잡고 얼렀다. “자, 자, 착하지? 조금 후에 줄 테니까... 그 때까지 자고 있어, 응?“ 등을 토닥거리며 말하자, 공주님이 갑자기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 미운 것 알아?!” ...정말 난감하다. 이 녀석을 기절시켜 재울 수도 없고 해서, 나는 푸들거리는 입가를 애써 진정시키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알아. 자, 여기에 누워서, 응?“ 옆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기절할 듯한 얼굴로 웃고 있는 영훈과, 헛것이 보여...라고 중얼거리는 지성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그래, 재미있냐, 이게?! “흑, 맨날 나만 구박하고...” “...미안해. 그럼 조금만 자자...자, 눈 감고...“ “내가 할게.” 영훈이 아직도 웃음을 참지 못한 얼굴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진작에 그랬으면 오죽 좋아? 하여간 얄미운 녀석, 이라고 영훈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나는 황급히 공주님을 영훈에게 넘겨 주었다. -15- 아직도 뭐라고 칭얼거리고 있는 공주님을 뒤로 하고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역시 다른 방의 아이들도, 모두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우선 우리 반에 배정된 방들을 하나하나 열어 보았다. “...에엣, 반장?!” 화투를 치고 있던 첫 번째 방의 아이들이 나를 향해, 원망 반, 안도심 반의 얼굴로 무슨 용건인지를 묻는다. 나는 멋쩍은 생각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역시, 없다. 대체 짝꿍,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이마를 찌푸리며 나가려는데, 내 손을 아이들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우리하고 잠깐만 놀다 가라, 반장, 응?” ...이 녀석들도 술에 취해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단호히 팔을 뿌리쳤다. “안 돼.” “에엣~!” 잠시 항의성 소리들이 질러지더니, 곧이어 말간 액체가 찰랑거리는 종이컵이 나에게 내밀어졌다. “가려면 이것 다 마시고 가.” ...이 방의 녀석들은, 소주 파인가? 나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한 번 둘러본 후, 종이컵을 들어 소주를 마셨다. 실망의 얼굴로 우우, 하는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나는 다음 방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짝꿍을 발견한 것은, 방들을 순례하는 일을 마치고, 알딸딸하게 달아오르는 몸을 애써 가누면서 로비 쪽을 돌아보기 시작했을 때였다. 녀석은, 간도 크게 계단 쪽의 어두운 복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짝꿍의 손에 든 컵 하나와 그 옆에 놓여진 술병 두어개가 녀석이 지금까지 무얼 하면서 앉아 있었나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짝은 내가 녀석에게 다가갔다는 것을 아직 알아채지 못했는지, 기계적인 동작으로 술병을 들어 잔에 술을 채워넣고 있었다. 나는 빠르게 다가가, 녀석의 손에서 잔을 낚아채 그것을 단숨에 마셔버렸다. 피잉, 하면서 머리가 한순간 어지러움을 호소해 온다. ...오늘은, 정말 막무가내로 많이 마신 날이다. 이 정도면, 내일 숙취를 느끼기에 충분한 양이었다. “...어...” 짝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뒤늦게 멍한 신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여긴 어쩐 일로...? 설마, 네가 나를 찾으러 나온 것은 아니겠지?“ 기분 탓인지, 짝의 비꼬는 음성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대답 대신 녀석의 옆에 앉으면서 짝을 향해 잔을 내밀었다. 얼떨결에 잔을 받아든 녀석에게 옆에 놓인 술병을 들어 잔에 반 정도 차도록 술을 따라주었다. “마셔.” 신주단지 모시듯 잔을 손에 쥐고만 있는 녀석에게 친절히 말해주자, 짝은 술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난...” 나는 짝꿍을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짝은 무언가를 우물거리며 말하려고 하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잔을 들어 술을 들이켰다. 잔을 바닥에 내려놓은 후, 짝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 역시 굳이 말을 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들어가자, 라고 말을 하기에는 무언가가 어색하다. 나는 그 대신, 복도 저 쪽의 어두운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어렸을 때에는, 저 안에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괴물은, 마음에 드는 꼬마가 지나가면,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꿈 속에 나타나, 꼬마를 머리부터 아그작거리며 씹어먹는다고, 작은 형은 겁주듯이 내게 말 하곤 했다.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는 무서운 괴물이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나는 어쩐지 괴물의 존재를 믿었던 어린 내 모습이 가끔씩 그리워지곤 했다. 그 때의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은, 꿈 속에 나오는 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 자신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었다.... “...나를 동정해?” 짝은 작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 주길 원해?” 그 말에, 짝꿍은 대답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가, 싫지 않아? 밉거나...하지 않아?” 나는 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너에게 화가 났으면 났지, 싫거나 미워할 일은 없는 것 같은데.” 진지하게 대답하자, 녀석은 초조한 손길로 잔을 집어 손 안에서 한 바퀴 돌렸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종이컵을, 나는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네가 미웠어.” 시작은, 담담한 그 말 한마디였다. 그 뒤 계속된 짝꿍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에게 하는 독백에 가까웠다. “알아?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미웠어.“ “알아.” 나는 아직도 녀석의 손 안에서 돌고 있는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아니, 너는 모를 거야. 처음 봤을 때부터...네가 나를 너무나 담담하게, 조용한 눈으로 바라봐서...그래서 나는 네가 싫었어. 차라리 네가 내 일을, 내가 아줌마에게 빌붙어서 몸을 팔아 돈을 번다는 것을, 소문내거나 하면, 나 역시 너를 비열한 놈, 쓰레기 같은 녀석이라고 경멸해 줄 수 있을 텐데... ...나는, 네가 미워.“ “그래.” 내 대답에, 짝은 다시 한 번 조그맣게 되풀이했다. “나는 네가 밉다고, 정말 미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차라리, 너와 친해진 후에, 네 뒤통수를 후려쳐서 네가 울부짖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는데... ...너란 놈은 정말 알 수가 없어. 정말이야. ...엄마는...“ 짝꿍의 눈에, 눈물 하나가 툭, 하고 매달렸다. 녀석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고 있지 못한 듯했다. “...힘들어.” 그 말은, 조용히 흘러나왔다. 짝은 당황한 듯이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이제야 술이 깬 듯, 확연히 놀란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마치, 내가 짝의 엄청난 약점을 쥐고 협박이라도 하고 있는 듯한,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몸을 돌렸다. 슬며시, 녀석의 뒤 쪽에 가서 녀석을 쿠션처럼 기대고 앉았다. 바싹 긴장하는 녀석의 근육들이, 얇은 옷 사이로 확연히 느껴진다. 나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술병을 집어들고 조용히 술을 홀짝거렸다. 밝게 켜진 복도의 백열등이 붉은 까펫이 깔려진 바닥들을 비추고 있었다. 어디선가 밝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투닥거리며 싸우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녀석은, 오랫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짝의 등을 타고 전해오는 떨림을 무시하면서, 술을 조금씩 들이마셨다. 입 안 가득 느껴지는 술의 쓴 맛은, 비릿하고 또 아리다. 그러면서도 술은, 내 몸 어딘가를 마비시키는 이상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동안 기묘한 모습으로 복도에 앉아 있었다. “내 이름은....정 이훈이야.”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말하는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다. 나는 술병을 소리 없이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 이훈이라... 뭐, 이대로 잊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기억하도록 노력은 해 보지. “아, 속 쓰려.” 배를 움켜잡고 말하는 도연을, 밤새 한 무리의 주정꾼들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영훈과 소 지성이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보았다. 나 역시 어이가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우유 한 잔에 맥주 몇 방울 떨어뜨려서 마시고 뻗은 녀석이, 숙취는 무슨 숙취란 말인가. 숙취라는 말은, 오히려 내가 써야 옳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은성아 괜찮아?” 묘하게 상쾌한 얼굴의 공주님이 내 등을 두드리면서 물었다. 나는 대답해 줄 정신도 나지 않아 헛구역질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 그렇게 짝꿍...그러니까 정 이훈과 앉아 있다가, 비명 소리에 뛰쳐 나가보니... ...아아, 그 자리에는 우리 반 녀석 하나가 술에 취해, 연신 주임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고 돌아섰다가 다시 몸을 돌리며, “안녕하세요, 선생님.” 하고 인사를 하는 그 녀석을, 주위 아이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선생님들과 거하게 술을 한 잔 한 학생 주임 선생님은 그 때마다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미쓰 김, 오늘따라 예쁜데? 술 한 잔 따라 봐.“ 라고 말했다. ...결국, 학생 주임을 따라나온 다른 선생님들에 의해 녀석과 학생 주임 선생님은 나란히 어딘가로 끌려갔다. ...나는, 그 녀석 때문에 선생님들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빌다가... ...선생님들께 붙잡혀 새벽까지 술을 마셔야만 했다. 정말, 젠장할 심정이다. “오늘은, 정말 죽어보자~!” 그런데도 지치지 않았는지, 이 귀여운 녀석들은 오늘도 술로 밤을 지새우자, 라는 깜찍한 음모들을 나누고 있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관광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기운없이 버스 안에 늘어져 있는데,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에게 기운내라며, 몰래 오징어를 한 축 쥐어주고 갔다. ...어째서 오징어인지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나와 같은 방인 웬수들은, 오징어를 보고 굉장히 기뻐했다. 오늘 밤 술안주는 이걸로 OK~! 하고 소리치는 녀석들을 노려보며, 나는 미친 듯이 핸드폰으로 남은 수학여행 시간을 분과 초로 계산해 보고 있었다. 오늘도 역시 어제와 다름 없이 벌어진 술파티를 무시하고, 애써 잠자리에 들었다가 결국 질질 끌려나온 나는... 어디 한 번 두고보자는 심정으로 미친 듯이 녀석들에게 술을 먹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 녀석들이 술을 먹고 뻗어 자는 게, 오히려 나에게는 낫다. 이 놈들이 술에 취해 자기 시작하면, 문을 잠가 놓고, 아무도 나가지 못하도록 지켜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아무래도 만만치가 않다. 이대로는 내가 먼저 뻗겠지 싶은 위기감이 드는 순간, 누군가가 방을 똑똑 두드렸다. “반장, 있나?” ...담임 선생님이다~! 우리들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술을 감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이 술에 취한 공주님이 벌건 얼굴로 일어나더니 쪼르르 달려나가서 제꺽 문을 열어 드려버렸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니, 특별히 술이라도 마시며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지.” 담임 선생님의 손에 들린 맥주병이 우리는 한 번 놀라버렸고, 담임 선생님의 말씀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담임 선생님이 인자하게 웃으면서 방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우르르 들어오는 국어 선생님과 그리고 우리 반 아이들... ....이 좁은 방 안에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옹기 종기 앉아 있으려니 갑갑해서 죽을 것만 같다. 누군가가 그 사이, 후환이 두렵지도 않은지, 쓰러져서 자고 있는 도연을 발로 밀어서 구석에 밀쳐 놓았다. “자, 그럼.... 모두들 한 잔씩 받지?“ 나는 나를 향해 우선 술을 따라 주시는 담임 선생님과, 양주로 추정되는 커다란 병을 품에 안고 있는 국어 선생님, 그리고 술 병 하나씩을 안고 있는 반 아이들을 겁에 질려 바라보았다. ...나의 불길한 예감이, 거의 언제나 들어맞는다는 사실에 몸이 오싹해진다. 차라리 무당이나 될까...? ....아악, 이렇게 현실도피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은가~!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담임 선생님의 해맑은 눈동자를, 울고 싶은 심정으로 쳐다보다가... ....술잔을 들어 술을 마셔버렸다. 술잔을 털은 후, 담임 선생님께 술을 따라 드리자, 기다렸다는 듯 국어 선생님이 내게 다른 잔 하나를 내민다. ...그래, 뭐 오늘 한 번 죽어 보자. 나는 암담한 심정으로 포기하듯 스스로에게 뇌까렸다. “...은성아, 수학여행은 재미있었니?” 현관문 앞에서 나를 맞이하며 묻는 아버지에게 나는 대답대신 장렬하게 헛구역질을 한 번 한 후, 내 방으로 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수학여행은... ...앞으로 이름을 고쳐야만 한다. 술 학(學) 여행이라고. -16- “...국어가?” “응. 어휴, 쓸 말 없어서 죽는 줄 알았어.” 수학여행을 다녀온 후, 무언가가 달라졌다. 콕 찝어, 정확히 어떤 것이 달라졌다, 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랄까, 아니면 시선이랄까... 그런 것들이, 조금 더 친근감을 갖게 되었고, 또한 부드러워졌다. 그것은, 점심을 먹고 난 후, 나누는 이런 소소한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 ...역시 술을 마심으로써 돈독한 친분을 나누게 된 것이 아닐까... 하다가 나는 그 때의 속쓰림이 되살아나는 듯해 하얗게 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국어 수행 평가가 정말로 힘들었던 듯, 도연은 머리까지 싸 쥐면서 아직까지 괴로워하고 있었다. “글쎄, 그게 말이 돼?!” 고개를 들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도연을 향해, 영훈이 침착하게 말했다. “어떤 것이었는데?” “...종이를 나눠 주고, 나의 이상형은...이다, 라는 것을 비유법을 들어 적고, 또한 그 이유를 타당하게 설명하라고 하더라. 10줄 내외로.“ “...정말 힘들었겠다.” 공주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불쌍하다는 눈으로 도연을 바라보았다. 이봐, 하지만 그 힘든 수행 평가를 너는 물론,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다 해야 한다는 건 알고나 있는 거냐? 모두 다 해야 하는 수행 평가를, 미리 끝냈다고 해서, 불쌍하다느니 하는 동정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그건 그나마 낫지. 이상형이라...뭐, 까다롭긴 하지만 말이야.“ 그 때, 민섭이 모든 것을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나직이 말했다. 저 녀석은, 굉장한 일도 아닌데, 늘상 분위기 이상하게 말을 꺼내서, 사람을 궁금하게 만든다. “...너는 뭔데?” 지성이가 우물거리며 묻자. 민섭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허무한 눈동자를 했다. “나의 집 화장실은...이다. 이 것을 비유법을 들어 말하고, 또한 이유를 들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타당하게 설명하시오. 물론 10줄 내외로.“ ...화장실... 정말 난감하다. “그래서 너는 뭐라고 했는데?”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얼굴로 영훈이 물어보자, 민섭은 아까 도연의 모습처럼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쥐어뜯기 시작했다. “아악, 그만~! 떠오르게 하지 마!” 뭔가, 굉장한 말을 써 넣은 것 같다. “풋.” 짧은 웃음 소리에, 나는 잠시 놀라서, 스스로의 청력을 의심하며 옆을 바라보았다. 짝, 아니, 이훈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럼 그렇지. 저 녀석이 웃었을 리가 없지. 기가 허해졌나 보다. 역시, 잠을 못 자서 그래. “어엇, 야, 자지 마~!” 조금만 잠을 자고 일어나려는데, 공주님이 그 새를 못 참고 내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그만 좀 해. 일어난다, 일어나~!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는데도, 공주님은 내 어깨를 놓지 않았다. “어엇, 이건 뭐야?” 오히려 내 얼굴까지 손을 올려 계속해서 여기저기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나를 깨우고 싶었던 게 아니라, 단순히 이 상황을 즐기는 것 같다. “그만, 공주님. 은성이는 내버려 두고, 우리랑 놀자?” “에엑?!” 다행이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민섭이 공주님을 데리고 같이 놀기 시작했다. 뭐, 공주님 얼굴이 꼭 싫어하는 사람처럼 일그러져 있다만, 내가 상관할 것은 아니겠지 싶어, 나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눈을 감은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국어 선생님은, 오늘 수업을 하러 들어올 때부터 유난히 얼굴에 능청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싱글벙글 웃는 그 모습에, 나는 정체 불명의 불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불길함은 국어 선생님의 말에 의해 정확하게 적중했다. “이번 수행 평가는, 내가 하기로 했다. 자, 쉬운 걸로 내 줄 테니까, 모두들 걱정하지 말도록. 알았지?“ 국어 선생님은 수행 평가라는 소리에, 얼굴부터 찡그리고 보는 아이들을 둘러보면서 다시 한 번, 불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행 평가는 지금 실시한다. 모두 책을 서랍에 집어넣도록.“ ...이 소리에, 미처 정보를 얻어 듣지 못했던 아이들 몇몇이 에엑~?! 하는 괴상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책을 서랍에 집어넣고 필통에서 샤프를 꺼내, 샤프의 뒤꼭지를 눌렀다. “지금 나눠주는 종이를 한 장씩 갖고 맨 위에 3cm정도를 접어라.” 국어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다음의 행동을 지시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충 눈 짐작으로 종이의 윗 부분을 반듯하게 접었다. 옆에서 이훈이, 나를 따라 종이를 대충 접는 것이 보였다. “그 접은 부분에, 반, 번호, 이름을 쓰고 이렇게 종이를 접어 덮는다. 이름이 보이지 않게 말이야.” 국어 선생님은, 무척이나 즐거운 듯 보였다. 여기저기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혹시 자 가지고 있냐? 하고 물어보는 깔끔쟁이들의 물음이 들린다. “그리고 종이에는 이렇게 문장을 쓰도록. 나는 ...이다. 라고 비유법을 써서 말이야. 아래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를, 타당하게 설명하도록 한다. 길게는 쓰지 말고, 열 줄 내외로 간략하게 정리해서 써라. 자, 그럼 시작.“ 이게 무슨 수행평가야, 하고 여기저기서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다. 국어 선생님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나는 샤프를 한 번 공중에서 돌린 후, 잠시 고민했다. 나는... ...이다...? 나는...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것은, 파란 하늘과 그 하늘을 떠다니는 흰 구름, 그리고 백금색의 햇빛, 펄럭이는 국기, 반듯한 선을 지닌 건물들... ...하늘을 가로질러 작은 새 하나가 서둘러 어디론가 날아갔다. 저 아래에서 형체없는 바람이, 나무 가지를 흔들어 나뭇잎을 떨구는 것이 보였다. 또... 나는 샤프를 다시 한 번 손가락 사이로 돌렸다. 나는... ....이다. 나는, 샤프의 꼭지를 다시 한 번 누른 후, 너무 많이 나온 샤프심을 손으로 눌러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리고, 나는 샤프를 고쳐 쥐고 하얀 종이에 사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까만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자, 그럼 이만 뒤에서부터 앞으로 종이를 전달하도록.” 국어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글을 다 쓰고 놀고 있던 아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종이를 앞으로 건네기 시작했다. 나 역시, 공중에서 팔랑거리는 종이를 앞에 앉은 녀석에게 건넸다. 종이를 다 받은 선생님은, 종이 뭉치를 교탁에 놓고 탁탁, 소리를 내며 가지런하게 정돈한 뒤, 흐음, 하는 소리를 내며 글들을 읽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흝어본 종이들을 교탁 위에 내려놓다가, 선생님은 문득 히죽 웃으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이건 재밌는걸. [나는 아이스크림이다. 나는 걸을 때마다 땀을 너무 많이 흘린다. 나는 무언가를 할 때도 땀을 흘리곤 한다. 나는, 이런 내가 무척이나 싫었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땀은, 기분나뿐 것이 아니라, 네가 무언가를 열심히 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하나의 증표란다. 녹아서 달콤함을 나타내는 아이스크림처럼, 너는 땀을 흘림으로써 너 자신의 성실함을 나타내는 거야. 나는, 그 후로, 내가 땀을 흘린다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아이스크림처럼, 나의 몸을 녹여 나의 성실함을 표현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누구지? 흠...“ 국어 선생님은 희극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종이 맨 위에 접은 부분을 들추었다. “1학년 3반 24번 박 인환.” “와~.” “오올, 뭔가 말 되는데..?” 아이들은 부끄러움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박 인환을 바라보며 낄낄거리며 웃었다. “이건 또 뭐야? [나는 자동차이다. 그 이유는 내가 명품족이기 때문이니까...?] ...대체 이런 식으로 써서 수행 평가를 써 넣으려는 사람은 누구냐? 엉? 자칭 명품족, 손 좀 들어봐라?“ 국어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국어 선생님 특유의 말투로 그렇게 말을 하면, 누가 들어도 어이없어 하는 느낌이 확실하게 전달될 테니까 말이다. 국어 선생님은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나는 너희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최소한의 성의는 보였어야지. 이런 식으로 쓴 녀석들은 수행 평가 점수가 어떻게 나올지 각오하고 있었겠지?“ 프라이버시를 위해 신상 공개는 하지 않으마, 라고 말하며 국어 선생님은 다시 종이를 넘겨 교탁 위로 올려놓기 시작했다. “어? 이건 괜찮은데...” 국어 선생님은 턱을 쓰다듬으며 종이 한 장을 들고 글을 읽어내려가기 사작했다. [나는 돌멩이이다. 나에게는 무언가를 할 손도, 원하는 곳을 향해 걸어 갈 발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무언가를 위해 고함을 지를 입조차도 없다. 내게 있는 것은 거친 표면의 몸 뿐이다. 나는 거센 바람, 세찬 빗방울, 그리고 나를 걷어차는 발길질에 휩쓸려 많은 곳을 뒹굴어 다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몸은 점점 둥글게 변하고, 또한 작아진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결국 나는, 내 진짜 모습을 잃어버리고 이렇게 점점 작아져서 없어지게 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작고 둥글어지는 내 모습은, 진짜 나를 조각하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일까? 나는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를 동경하며, 누군가가 내게 올바른 미래로 가는 방법을 말해주길 기대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내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는다. 아니, 나는 누군가가 내게 말을 해 주었을 때, 그 말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들리지 않는 대답을 찾아, 또 다른 곳을 뒹굴어, 스스로를 둥글게, 그리고 작게 만든다.] ...꽤나 예민한 감성인데... 누구냐, 이 사람은?“ 국어 선생님은, 종이 윗부분을 들어올린 후, 잠시간 말이 없었다. “1학년 3반 54번 이 은성.” 아이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구도, 아까처럼 야유의 소리를 지르거나, 또는 키득거리며 웃지도 않았다. 나는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 파란 하늘, 그리고... 내 얼굴 전체로 느껴지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 “흠, 흐음, 자, 그럼 다른 것들을 볼까.” 국어 선생님은 어색한 헛기침을 하면서 다른 종이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나는, 턱에 손을 괴고 창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왜인지, 조금은 쓸쓸하고, 또 그보다 더 많이 부끄러웠다. 옆에서 탁, 하고 무언각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그 곳에는 이훈이 손가락 사이로 볼펜을 돌리고 있었다. 볼펜이 한 쪽으로 너무 기울여져 책상에 부딪힐 때마다, 탁,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난다. 이훈은,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심하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이런 의미없는 행동들을 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17- 기말 고사가 다가왔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시험이라는 소리에 아이들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졌으며, 점차 눈 밑에 다크 써클을 달고 오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담담히 지켜보는 쪽에 속했는데, 그런 내 모습이 아이들, 아니, 공주님을 화나게 한 것도 같았다. 그 증거로, 지금 공주님이 밥을 먹으면서 나를 힐끔거리며 노려보고 있는 중이니까 말이다. “...솔직히 말해. 은성이 너 집에 가서는 밤 새면서 공부하지?” 나는 시비 걸 듯 말하는 공주님을 무시하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여.” 민섭이 안쓰러운 듯이 말하자, 공주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냐, 분명 은성인, 집에 가서는 미친 듯이 공부하면서, 학교에서는 아이들 방심 시키려고 일부러 자는 모습만 보이는 거야! 그렇지, 응?“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공주님을, 나 역시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아니면 그대로 무시할까... 나는 조금 고민한 후에,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일, 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야.” 가라앉은 공주님의 목소리가 위협적이다. “...왜.” 귀찮지만 대꾸해주었더니, 공주님이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무슨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어떤 소리인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감으로 나를 향해 욕설을 내뱉고 있는 것이라는 게 짐작이 간다. 나는 그제서야, 내 주위의 아이들이 모두, 정도는 틀리지만, 얼굴을 조금씩 구긴 상태로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 타고 난 거라 이거냐? 세상은 불공평해. 왜 은성이 저 녀석은 뻥뻥 놀고도 1등이고, 또 나는 밤새서 공부해도... ...아악~!“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른 사람들 눈에 내가 노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시험 전날 공부를 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애시당초 누가 더 많이 노력을 했는지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나로서는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한 것인데도,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것도 노력이야? 하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뭐, 그래도 내가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니, 일단 할 말은 없는 셈인가. “...은성이네 식구들은 어때? 왠지 다들 머리가 좋을 것 같애.“ 지성이가 우물거리며 꺼낸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는 기침을 참기가 어려웠다. 콜록거리는 나를 향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낼 사이도 없이, 옆에서 영훈이 격렬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사레라도 들린 것처럼 눈에 눈물까지 매달고 있는 영훈의 등을 민섭이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옆에서 도연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에?” 왜 이런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공주님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내 옆에서 물 컵이 내밀어졌다. 엉겁결에 컵을 받고 난 후, 나는 나에게 컵을 건네준 이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글쎄.”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애써 태연하게 말을 한 후,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책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작은 형이 실종된 지도, 벌써 몇 달이 흘렀다. 보통 다른 때였다면 이 쯤에서 훌훌 털고 집으로 돌아왔을 시기인데... ...설마 이 인간, 예전에 지나가는 말로 했었던 새우잡이 어선이라도 탄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개성적인 집안이지.” 겨우 기침을 가라앉힌 영훈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한 후, 고뇌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영훈은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녀석이니만큼, 우리 집에 드나들 기회도 더 많... ...하다가, 나는 뒤늦게 떠올린 생각에 얼굴이 새하애졌다. 설마, 작은 형이 영훈에게도 사랑 어쩌구 하는 소리를 지껄인 건... 아냐, 작은 형도 이성이라는 게 있을 텐데....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나는 초조한 눈으로 영훈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민섭이 아련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큰 형님이, 정말...” ...엥? 큰 형이라면...언제나 이성적이신, 그리고 예의바르시며 또한 친절하신 나의 큰 형을 말하는 건가? 큰 형이 대체 왜...? “기억나? 내가 배탈났다고 뒹구니까,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주셨던 걸.“ “...뭐, 뭔데?” 공주님이 궁금한 얼굴로, 영훈을 재촉했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다. 큰 형에게는, 한 가지 기이한 습관이 있었는데, 그 것은 습관이라고 부르기도 참 이상한, 애매모호한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어렸을 때의 큰 형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던 것 같지만, 또 모를 일이다. 혹시 큰 형이, 그 전에는 나에게 자신의 그런 점들을 숨겨 왔던 것일수도 있으니까. 분명한 것은, 큰 형이 그런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 들어간 후부터였다는 것이다. “아아, 아프다고만 하면 무조건 주시던 그것... ...이른바 큰 형님만의 만병 통치약이었지. 그건 바로...“ 도연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하자, 공주님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였다. 동시에 짝꿍의 몸이 약간 앞으로 숙여졌으며, 지성의 눈이 조금 커졌다. “...비타민제...!” 민섭과 영훈이 동시에 말을 한후,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큰 형은, 평소 다른 일에는 지극히도 모범적인 사람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비타민제만 먹으면 모든 병이 낫는다는 위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 비타민제에서 다른 것으로 바뀐 지 오래 됐어.” 나는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향해, 나는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언제부터였더라... 비타민제에서 아로나민 골드로 바뀐 것이.“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아이들, 특히 영훈, 민섭, 도연은 무거운 얼굴로, 공격적으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씨발, 비타민제는 그나마 맛있기라도 했지. 아로나민 골드는...” 도연이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리자 민섭이 도연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그래도 아직 군대에 계시잖아. 군대 안에서 취향이 바뀌어서 나오실지 누가 아냐.” 그 말이 맞게 느껴졌는지, 영훈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 그럼 은성이 너네는 아들 둘이야?”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잠시동안 침묵했다. 은근슬쩍 이야기에서 빼 놓으려 했던 작은 형이 다시 한 번 떠오른다. 작은 형을 떠올린 것인지, 영훈들이 앉아 있는 곳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작은 형이 있어.” “엇? 그럼 3형제?”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독특하신 분이지.” 민섭이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렸다. ...독특하다 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작은 형은, 나와 같은 가족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았다. 그 획기적이고 기발한 사고방식은 제쳐놓고서라도, 감정적인 면에 치우친 형의 행동들은, 언제나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아...그 형...” 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향해 묻는다. “그런데, 그 형, 아직도 집에 안 들어왔냐? 분명 작년 겨울 방학 때쯤에 나가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응.” 내 대답에, 영훈이 놀랍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뭐? 보통, 한 두 달 정도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돌아오시잖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 아니야?“ “...저번 실연에서 생긴 상처가 너무 컸던가 보지. 무엇보다, 그 때 뜯긴 700만원을, 집에서는 절대로 못 갚아 준다고 부모님이 말했으니까, 지금쯤 전국을 떠돌면서 아르바이트에 매진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아, 하긴.” 민섭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다른 녀석들은,상세한 전말을 알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시시껄렁한 가정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일일이 털어놓기도 창피한 일이다. 뭐, 이야기의 전말이래봐야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하지만. 작은 형은, 언제나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형은, 틈만 나면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곤 했는데, 저번에 사랑에 빠진 상대는,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의 어느 채팅 상대였다. 그 상대와 몇 시간의 채팅을 한 끝에 격렬한 사랑에 빠진 작은 형은, 상대방을 위해 아무런 의심 없이 빚을 내어 700만원을 빌려주었다. 결국, 상대는 사기를 치고 도망쳤고, 이로써 작은 형은 통산 몇 번째인지도 모를 실연을 겪게 되었다. 뭐, 이번 실연은 마음뿐만 아니라, 금전적인 상처까지 입었다는 점에서 다른 때의 실연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은, 역시 걱정해야 할 일이려나? 하여간, 다른 일이라면 얄미울 정도로 약삭빠르고, 자신의 몫을 악착같이 챙기는 작은 형이, 사랑에 빠졌다는 상대에게는 맹목적일 정도로 스스로를 변화시키는지, 나로서는 정말 이해 못할 노릇이었다. “아, 그게...” 민섭은,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에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우물거렸다. 말을 해도 좋을지, 망설이는 표정을 한 민섭을 위해, 나는 대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우리 작은 형은...” 나는 작은 형에 대해 평가했던 누군가의 말을 머릿 속에서 떠올렸다. “...사랑의 근치산자...랄까.” 저 녀석은 이미 ‘사랑의 바보’ 수준을 넘었어~! 라고 진절머리를 치던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그 때, 나 역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던 기억이 있었다. 영훈과 민섭, 그리고 도연이 침중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작은 형,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아니, 설마 낯선 곳에 가서 또다시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건...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든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 나는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 “그러니까 오늘 하루만 같이 놀자고. 안돼?“ 공주님이 눈을 반짝이면서 귀여운 척 물어본다. 나는 가차 없이 몸을 돌렸다. “안 돼.” “...야...” 내 옷자락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공주님의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는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공주님은 이글이글 붙타오르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루만 같이 놀면 어디가 덧나냐~! 애시당초 이건 네 녀석이 내 속을 뒤집어 놔서 그런 거잖아! 어차피 공부도 안 한다며, 그럼 조금만 같이 놀면 안 돼?“ “내가 왜?” 심드렁하게 묻자, 공주님은 놀라울 정도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야, 내가 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으니까, 너는 그 스트레스를 풀어줄 의무가 있어.” ...나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따라가기로 했다. 내가 공주님의 말솜씨에 설득당했다거나, 또는 눈꼬리에 매달리기 시작한 눈물 때문에 겁에 질려 그렇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 반 아이들의 매서운 눈길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래, 그냥 나도 몇 시간 동안만 놀아주고 싶었다고 치자, 젠장. 놀자고 하더니, 겨우 간 곳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햄버거 가게였다.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내 주위 사람들을 불편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제 와서 너는 왜 따라 온 거야~! 라는 고함을 지르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애시당초, 학기 초에 이 녀석들을 확실히 잘라 버렸어야 했는데, 하고 나는 뒤늦게 후회를 곱씹었다. 인원이 많다 보니 1층 창가 자리에 놓인 쇼파에 앉았는데도 자리가 좁다. 결국 두 그룹으로 나뉘어 자리에 앉은 후, 나는 주문한 음식들을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리에 동조하기라도 한 듯, 아이들은 서로 잡담을 주고 받으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 특히 공주님은 스트레스 푸는 것이 진짜 목적이 아니라, 실은 단순히 놀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살짝 의심이 된다. 나는 나를 향해 말을 거는 녀석들을 피해 옆을 바라보았다. 옆에는 아르바이트생이 더러운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귀엽게 생긴 그 여자 아르바이트생은 빨간 소스가 얼룩진 탁자를 닦다가, 허리를 펴고 카운터를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은재 오빠~!” 은재라... ...작은 형과 이름이 똑같다, 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카운터를 돌아 나온 누군가를 보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어, 지아야, 왜?” 서글서글 웃으며 말하는 저 사람은... ...분명 집 나갔던 은재 형이다. “...어어?" 뒤늦게 나를 발견한 은재 형은 놀란 얼굴로 멈춰섰다. “...형.” 나는 손을 들어 까딱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주위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놀란 듯 말을 하는 것도 멈추고 나와 형 쪽을 바라본다. 작은 형은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니, 설마 제 값 다 주고 먹었니? 이 가게는 직원에게는 특벽히 할인해 줘. 내 이름만 대면 충분히 할인받을 수 있었을 텐데... ...영수증 있어?“ 심각하게 말하며, 할인받으면 그 돈이 얼만데, 하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는 작은 형을, 나는 조금쯤은 비참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랬다. 작은 형은, 이런 사람이었다. “영수증 있니?” 공주님이 떨리는 손으로 영수증을 건네자, 형은 카운터로 걸어가 말을 주고 받더니, 곧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거스름돈을 손에 쥐고 돌아왔다. 형은 내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럼, 재미있게 놀다 가라.” ...그러면서 돌아서는 형의 주먹 쥔 손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온 지폐 조각은 무엇인지, 나는 문득 묻고 싶어졌다. “...형.”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묻자, 형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왜?”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왜 집에 안 왔어?“ 추궁하듯 묻자, 형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그게...” ...경험상, 형이 저렇게 웃을 때에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매서운 눈초리로 형을 노려보았다. “그게 뭐?” 느릿하게 말을 끌면서 묻자, 형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어쩐지, 여기 왔을 때, 주위가 익숙한 풍경이다 싶었지.“ 하하, 설마 우리 집 근처일 줄은, 하고 형은 무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형제...”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그렇지.” 형은 바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내게 손을 흔들어 본 후에 카운터 뒤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담담히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뭐, 잘 있는 모양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야...” 공주님이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포테이토를 입에 문채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왜?” 무뚝뚝하게 묻자, 공주님은 어두운 안색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침중한 신음 소리를 흘렸다. “지금 이 상황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은... ....나 혼자 뿐이냐....?“ 그 말에 민섭이 위로라도 하는 듯, 공주님의 어깨를 토닥거려 주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형은 그로부터 며칠 후에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나게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강압에 못 이겨 형의 빚을 갚아 주지 않은 이유로, 형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 듯, 연신 형을 안고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형은 그 말에, 머리를 긁적이면서 그 동안 아르바이트로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활짝 웃어 보였다. ...하여간, 어디에 가도 죽지 않을 사람이었다. -18- ...이제 곧 여름 방학이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깨닫게 해 준 것은, 역적 모의라도 하듯 머리를 맞대고 쑥덕이던 녀석들의 중얼거림에서 언뜻언뜻 흘러나오는 ‘여름 방학 계획은...’ 이란 말이었다. 그래도 뭐, 이제 곧 시험도 끝났겠다, 여유로워진 나의 마음은 그런 녀석들을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볼 만큼 충분히 여유로웠다, 그 와중에도 걸리지 않는 것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요즘 묘하게 한숨을 내쉬는 빈도가 잦아진 짝...그러니까 이훈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찌푸렸다. 뭐, 그래도 그런 것은 나중에 일이 닥쳤을 때 생각하자. 지금은 일단 자고... “어? 여기서 뭐해?” 달콤한 낮잠을 즐기려고 하는데, 갑자기 미술실의 문이 드르륵 열렸다. 나는 퍼뜩 잠에서 깨어나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 앞에는 국어 선생님이 어정쩡한 포즈로 서 있었다. “..내가 방해한 건가?” 국어 선생님은 멋쩍게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아아, 그래. 자, 이거...마실래?“ 나를 향해 불쑥 내밀어진 코코* 음료수를 물끄러미 보다가, 떨리는 손끝을 뒤늦게 발견하고 묘한 심정으로 음료수를 받아 들며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괜찮아.” 국어 선생님은 시원스럽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더니 자리에 털썩 앉은 후, 옆을 툭툭 두드린다. “...잠깐 이야기나 할래?” 그렇게 말하며 발갛게 볼을 물들인 국어 선생님을... ...나는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며 선생님의 옆에 가서 불편하게 앉았다. “...하실 말씀이...” 손가락을 어색하게 꼬고 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보다 못해, 일단 침착하게 질문을 던지자, 선생님이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딱, 하고 쳤다. “아, 그러니까... 별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하, 오늘도 날씨가 좋지?“ “...네.” 이 선생님, 역시 범상한 사람은 아니다. 나는 몸을 슬쩍 옆으로 움직이면서 마지못해 대꾸했다. “저...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나는 말이다...“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다. 이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싶어, 이제는 더럭 겁이 나기까지 한다. 경계의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생님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이런 돌도 말이지...” 선생님의 손에 들린 작은 돌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행평가 시간에 썼던 나의 글들이 머릿 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이런 돌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고 있어서... 어떤 것은 속에 철을 함유하고 있고, 어떤 것은 방사능을 품고 있기도 하고...“ 나는 더듬거리며 말하는 선생님의 손에 들린, 작은 돌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것은... ...보석이기도 하지. 나는 말이야... 돌이 작아지는 것은, 그 안에 숨겨진 진짜 자신을 내보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 선생님은 멋쩍은 듯, 다른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해서, 자신 안에 숨겨진 원래의 진짜 보석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을...” 나는 차갑게 그 말을 가로막았다. “그렇다면, 보석이 아닌 다른 돌들은 가치가 없다는 건가요? 보석이 아닌 돌들이 작아지는 이유는, 그저 스스로를 소모하는 것에 불과한 겁니까?“ 선생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선생님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나를 향해, 싱긋, 하고 여유있는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이제까지 보였던 어리버리한 모습과는 달리, 어른스럽고 자상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글쎄... ...하지만 말이야.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보석이라는 것을, 객관적인 판단에 따라 정의내릴 수는 없다고 생각해. 그것은 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그런 돌멩이일지라도, 나의 눈에는, 그 무엇보다 예쁘고 아름다운, 보석이 될 수도 있는 거지. ...그러니까...“ 국어 선생님은 내 머리를 장난처럼 헝클어 뜨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 하지 마. 멀리 나가려고 애쓸 필요도 없어. 설사, 네가 아직 스스로를 다 갈고 닦지 못했다 하더라도... 미완성의 네 모습조차도, 미칠 듯이 아름답다고 느낄 누군가가 분명 네 옆에 있으니까 말이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은 두근거렸다. ...그럴까. 과연, 그런 것일까. 나는... 난... 나는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뒤늦게 수업 시작 전의 예비 종 소리를 듣고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황급히 뛰어나갔다. “엇? 자, 잠깐~! 이번 여름 방학 때, 어떻게...!!” 무언가 뒤에서 말을 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 것도 같지만, 지금의 멍멍한 귀 상태로는 잘 들리지 않는다. 나는 헉헉대는 숨을 참으며 빠르게 계단을 올라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었는데...”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지금은 기분이 스물스물 나빠지려 하고 있었다. 이 것은... 아니, 이 놈들은... 나는 밖에서 쾅쾅대며 두들기는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이 녀석들을....특히, 영훈을 아버지 눈에 보이면... ...큰일 난다~! 영훈과 아버지, 녀석들과 나의 상관관계가 머릿 속에서 그래프를 그리며 좌르륵 펼쳐진다. 나는 그 끝에 결과로, 절대 상호 접근 불가! 라고 써 넣은 후, 지금 문 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고 있는 녀석들을 어떻게 돌려보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신은 내 편이 아니었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차 대접을 받으며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녀석들을 살기를 담아 노려보았다. 그렇지만 두꺼운 얼굴 두께를 자랑하는 놈들은, 내 시선에도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방학까지 했는데 이 놈들을 만나야 하는 걸까 싶어, 나는 허공을 잠깐 동안 바라보았다. “이훈이는?” 공주님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묻자, 소 지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성실히 대답한다. “늦는다고, 먼저 가라고 그러더라.” “그럼 이만 갈까? 아버님, 차,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은성이 데리고 놀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꾸벅 인사를 하는 영훈을, 아버지는 예뻐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난 안가.” 소용없을 거라는 사실을 예감하면서도, 나는 한 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일단 말해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 녀석들은 내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내 방에 들어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며칠동안만 놀다 올 테니까, 옷을 많이 가져 갈 필요는 없겠지.”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민섭의 옆에서, 도연이 또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하나하나 손으로 꼽아보기 시작했다. ...이건, 사생활 침해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들에게 소리를... ...지르려고 했는데, 그 때 내 방문이 살짝 열렸다. “어? 은성이 너 어디 여행 가냐?“ “...형.” 나는 작은 형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형이라도 나를 이 사악한 손길에서 구해 주었으면 했지만, 형은 무념 무상, 아무런 생각 없는 얼굴로 나를 보며 씨익 웃을 뿐이었다. “재미있겠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오히려 이런 소리나 지껄여댄다. “...형님이 같이 가 주신다면야, 저흰 좋죠.” 영훈이 변죽 좋게 형의 말을 받아 넘기자, 형은 신이 난 얼굴로 잠깐 기다려, 라고 말을 한 후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하여간, 역마살 낀 인간이 어쩐 일로 집 안에 얌전히 틀어 박혀 있다, 했다. “은성아?” 이번에 문을 연 것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우리를 바라보며, 약간 곤란한 웃음을 지으셨다. “저...방금 너희 학교 선생님께서 전화하셨는데... 네가 친구들하고 여행간다는 소리를 들으시고, 보호자 자격으로 따라가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나는 일단 그러면 안심이 되겠다고 대답해 드렸거든. 괜찮니?“ ...전혀, 절대, 괜찮지 않았지만... ...혹시라도 잘못한 일일까 싶어, 내 눈치를 보고 있는 아버지께 그런 대답을 해 드릴 수는 없어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셨어요.” ...뭐, 인원 수가 많으면, 도중에 도망치는 일이 쉬워 질지도 모를 테니... 좋게 좋게 생각하기로 하자. ...물론, 국어 선생님은 나와의 첫 만남부터가 심상치 않은 분이긴 했다. 그리고 국어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아침에 차를 태워준다는 말에 귀가 솔깃해, 국어 선생님을 멀리하지 않은 내 잘못이 크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나는 허공을 바라보며 심란한 속을 달랬다. 인원 초과로 답답한 차 안에 억지로 끼여서 도착한 곳은, 어느 산 속의 작은 산장이었다. 그 산장에 짐을 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밥을 짓는다, 낚시를 한다, 나무를 줍는다, 하고 돌아다니는 것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문제는, 저녁 식사 시간이 되서 본격적으로 불거졌다. 누가 더 밥을 먹는지에 대한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밥그릇을 쇳소리가 날 정도로 긁어 먹은 후, 다음에는 설거지를 누가 할지에 대해 거친 기 싸움을 벌였다. 여기에는 형도, 제자도, 선생도, 친구도 모두 소용없었다. 결국 설거지를 하는 것에 걸린 도연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공주님과 함께 울상이 되어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느긋하게 모닥불 준비를 하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누군가가 가져온 불꽃이 발견되면서 결국 모든 것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노는 것에 열중해 타닥거리며 타는 로켓 불꽃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소 지성을, 형이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형의 저 멍한 얼굴은, 사랑 타령을 할 때마다 익히 보아왔던 것이다. 불꽃으로 얼굴에 음영이 진 지성을 바라보는 형과, 그런 형을 향해 멋도 모르고 웃는 지성... ...에라, 모르겠다. 내 일도 아닌데, 괜히 나서서 속 썩을 필요는 없다. 아무리 우리 형이 무뇌아라고 해도, 동생 친구를 건드리지는 않겠지 싶어, 나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잘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늘진 곳으로 들어가니, 그 곳에 이미 먼저 도착한 손님이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여간, 이훈 이 녀석도, 음침한 곳은 무척 좋아한다. 이대로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가기도 머쓱한 노릇이라, 나는 그대로 이훈의 옆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잠이 들려는 찰나에, 이훈이 작게 말했다.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다 좋으니, 이 놈이 제발 가만히 입을 다물어서 내가 잠을 자도록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훈이 머뭇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나, 그 아주머니한테 그만 만나자고 말했어.” 조금, 잠이 깨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그 상태로 눈만 뜨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아버지는 생활에 도움이 전혀 되지 않았지. 그 때, 나를 도와줬던 게 그 아주머니였어. 별로 좋지않은 일이었다는 건 알아. 하지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돈이 필요하고, 그 아줌마는 사람이 필요했어. ...억지로 결혼한 남편은, 그 아줌마를 버리고 다른 젊은 여자와 결혼했대. 그 아줌마가 나를 향해 펑펑 우는데... ...그냥, 우리 엄마도 생각나고, 또 내 동생도 생각나고... 불쌍하더라. 게다가 나는, 돈이 필요했어. 그래서... ...나쁜 일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훈은 멍하니 아까 한 말을 되풀이했다. 나는 잠자코 이훈의 말을 들었다. "...그런데... ...생각하니까 허무하더라.“ 조금 떨어진 앞쪽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공주님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다가 불꽃 놀이에 열중해 있는 영훈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민섭이 심란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어디론가 걸어간다. 도연은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보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이 그 옆에서 음료수를 홀짝거리며 앉아 있다. 지성은 이제 멍한 눈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형이 자연스럽게 지성의 머리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하고 있다. ...뭐랄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동떨어진 비현실을 엿보고만 있는 듯한 느낌이다. ...나도, 저 세계의 일원인 걸까? 가슴 깊은 곳에서 순수한 의문이 솟아 올랐다. 나는, 저 세계의 일원이 아닐 것이라는 부정과 함께. 나는, 지금 이 곳에 따로 동떨어져 서 있었다. 나의 세계는 저들과 다를지도 몰랐다. 그것은, 기분 좋은 느낌이 아니라, 끔찍한 공허함과 외로움을 내게 안겨 주었다. “...그만 만나자고 하니까, 우시더라. 그 모습에 무척 미안해졌는데, 그랬는데도...내 말을 철회할 생각은 들지 않았어. 일단 아르바이트라도 해 볼까 생각해. ...난, 잘 모르겠어.“ 이훈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 역시, 그 무엇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나는, 내 모습에 언제나 화가 났어. 누구나 나를 걷어 찰 수 있는, 거리의 돌멩이로 굴러다닐 수 밖에 없는 내 모습이.“ 갑작스레 한기가 들었다. 나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렸다. 왜인지, 이훈을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려다보는 내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내가 부끄러워서, 애써 스스로를 위안했지. 괜찮아, 나를 돌멩이라고 욕하는 놈들은, 돌멩이도 되지 못하는 쓰레기들일 뿐이야. 나는, 이렇게 다른 이들의 발길에 차이고 차여... ...나중에는 꼭, 그 누구도 나를 부술 수 없는 딱딱한 돌이 되고야 말 거야.“ 나는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쥔 후, 이훈을 힐끔 돌아보았다. 의외로, 이훈은 작게 미소짓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늘의 풍경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본 순간, 온 몸의 긴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렇게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그래도 되지 않을까. 조금은...나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바위가 되고 싶어. 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한 바위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돌멩이인 내 모습을 부정할 필요는... ...없었는지도 몰라.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지금의 나도, 소중하다는...“ 이훈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이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을, 나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했다. “나 혼자 뒤쳐지고 있는 것만 같았어. 그래서, 언제나 화가 났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훈은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자.” 나는 말없이 이훈의 손을 맞잡았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날은, 기묘하리만큼 부드러운 공기로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남몰래, 이런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아, 라고 생각해 버렸다. ...다음 날이 되고 난 후, 그런 내 자신을 한심해 했지만... ...결국, 그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물면서, 나는 터지지 않는 휴대폰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사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나름대로 즐겁게 잘 놀았는데... ...자기들끼리 놀기나 하지, 언제나 나를 끌고 나오려고 하는 것이 문제였다. ...제발 집에 가고 싶어~! 라는 내 외침은 언제나 묵살되 버렸고... ...그것은, 그 후의 악몽같은 내 방학 시절을 예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 후, 나는 방학 내내, 틈만 나면 나를 찾아오는 공주님과, 영훈이들을 피해 내내 쉴 곳을 찾아 도망다녀야만 했는데... ... 그 와중에서도 왜 형이 지성의 안부를 묻는지가, 내게 무척이나 불길한 의문으로 간직되었다. -19-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고등학생 신분인 우리들에게 있어 이렇게 자꾸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지만(그만큼 고 3이 가까워진다는 소리니까 말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오랜만에 같은 반 친구들을 만나서인지 모두 활기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실은, 방금 전에 한, 활기찬 얼굴, 어쩌구 한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그 좋던 방학이 끝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아침부터 억지로 학교에 등교하게 된 처지에, 활기는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인지, 직접 말을 한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 아이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니?” 하고 물어보며, 되도록이면 아침 조회를 하지 않고 나에게 전달 사항을 말하는 것으로 끝내려는 담임 선생님께. “모두 우거지상이 되어 현실 도피를 하고 있습니다.” 하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교무실에서 반으로 내려와 교실을 휭 둘러봐도, 반 전체의 분위기가 맥없이 축축 느러지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뭐라고 할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나 자신도 지금 이대로 학교를 뛰쳐나가 집에 가서 자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의무적으로 아이들에게 전달 사항을 전하고, 자리에 가서 엎드렸다. 이런 날은, 그냥 자면서 현실 도피를 하는 것이 제일이다. 엎드린 내 등뒤에 무언가가 와서 덮힌다. 실눈을 떠서 바라보니, 이훈이 무안한 얼굴로 내 눈을 피해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이훈이 나에게 덮어준 체육복 소매가 내 얼굴로 흘러내려와 코를 간지럽혔다. 소매를 옆으로 치우는 사이.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우리 반 아이 한 명이, 문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이훈과 눈이 마주치고, 놀란 얼굴로 손을 흔들어 이훈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 모습을, 피식거리며 보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나른한 오전이다. 축축 늘어지는, 지루한 날이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다만 약간 걱정되는 것은, 우리 반 아이들이 이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젊은 혈기에 사고라도 쳐서(이를테면 싸움이라던가), 나를 귀찮게 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 ...뭐, 그래도 우리 반 아이들은 모두 착하고 귀여운 놈들 뿐이니까, 별다른 일 없이 이번 학기도 무사히 지나가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의 주범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훈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슬슬 2학기 중간 고사를 걱정하는 말들이 오고가고, 춘추복을 입고 등교하기 시작할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훈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날, 점심시간을 지나고부터 이상한 소문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소문은, 차마 농담이라고 믿기에는 너무 악질적이어서... ...공주님은 내내 불안한 얼굴로, 내게 이훈이 왜 학교를 안 나왔는지 아느냐고 귀찮게 굴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 날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다음 날도 이훈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을 때, 나를 교무실로 불러, 조용히 이훈에 대해 말을 꺼내셨다. 나는 담담하게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의 말씀으로, 이로써 교내에서 떠돌던 소문이 진짜였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었다. ...술에 취한 주정뱅이가, 죽은 채로 길거리에서 발견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이훈의 아버지인 것 같다는 것. ...기분이, 가라앉았다. 우울한 건가?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하지? 고개도 한 번 갸웃거려 보고, 샤프로 책상을 톡톡 두드려 봐도... ...몸 전체가 축축 늘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문어의 촉수에 온 몸이 휘감겨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방과 후, 담임 선생님과 같이 이훈의 집에 가기 위해 책가방을 싸고 교무실 앞에 섰을 때, 내 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나와 같은 일행인 척 서 있는 녀석들을 보고도,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가지 마. 이대로 집에나 가. 라고 평소 같았으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 앞의 놈들은, 분명 나름대로 이훈의 친구일 것이었다. 이훈이 힘들 때, 아무런 사심 없이 위로를 할... ...그런... ...담임 선생님은, 곧 서류가방을 들고 나오셨다. 담임 선생님의 등 뒤에서 국어 선생님이 차키를 손에 들고 나오셨다. 모두들, 얼굴이 우울하다. 가라앉은 분위기로, 서로의 시선을 피한다. 옆에 선 공주님이 내 손을 툭, 하고 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자. 입을 뻥긋거려. [ 어떻게 해? ] 하고 물어본다. 무엇을 물어보는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회색 하늘을 뒤로 하고 국어 선생님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모두들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래요?” 차를 몰고 이훈의 집을 향해 가면서, 국어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담임 선생님께 물으셨다. 우리는, 조용히 선생님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지금, 사정이 좋지 않나 봐요. 이 놈은, 전화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하고, 또...“ 담임 선생님은 우리를 의식하셨는지 말끝을 흐리면서 창 밖을 바라보셨다. 좁은 차 안에 억지로 끼어앉아서인지, 다리가 저릿거린다. 국어 선생님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흔들었다. “...어머니도 안 계시다고 들었는데...” 안됐다는 말투다. 그 말조차도, 왠지 곱게 들리지가 않는다. 입을 꼭 다물고 정면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유없지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여긴가요?” 담임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자. 국어 선생님은 언젠가 본 이훈의 집 근처에서 모두를 차에서 내리게 하고, 주차를 하고 오겠다며 차를 몰고 사라졌다. 담임 선생님은 손에 든 쪽지를 들여다보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호실이 적혀진 한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작은 여자아이가 안에서 주저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혹시 정 이훈군 집 아닙니까?” “...오빠...!” 달려가는 소리와 우당탕탕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예고없이 벌컥 열렸다. “...누구...” 이훈은 문을 열고 말을 하다가, 멈칫해서 우리를 바라보았다. 좁다란 복도를 가득 채운 채로 모여서, 우리는 이훈을 바라보았다. 이훈은, 곧 모든 것을 눈치챘다는 표정으로 평온하게 미소지었다. 그런 이훈의 모습은, 놀랄만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담담한 이훈의 표정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들어와. 선생님, 들어오세요.” 이훈은 몸을 비키며 우리를 맞아들였다. 머쓱한 얼굴로 들어가자. 거실 하나에 방 하나, 욕실 하나와 부엌에 딸린 집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거실에 죄인처럼 서서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음료수라도, 어떠세요?” 이훈이 담임 선생님께 여쭈어 보자, 담임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훈은, 놀랄만큼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공주님은 우물거리며 이훈을 바라보았다. 맘 약한 공주님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을 보고, 이훈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렇게 폐를 끼쳐서 미안해.” “...야, 너~!” 성격 급한 도연이, 이훈의 그런 모습에 발끈한 얼굴로 외치는 것을, 민섭이 잡아끌었다. “그만해.” 침중하게 경고성 말을 한 것은 영훈이었다. “...뭐 도울 일 없을까?” 지성은 애써 표정을 펴면서 이훈에게 물었다. “별로.” 이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나는 그 때서야, 이훈의 눈 밑이 거므스름하게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례 절차는 어떻게 됐니?” 역시, 이럴 때 가장 믿음직한 것은 어른이었다. 국어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이 이훈을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나는 왜인지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태연한 척 나를 바라보던 이훈을 붙잡고 한 대 때려, 녀석이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우는 이훈의 옆에서 나 역시 펑펑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옆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고 메말라서, 조금 새어나왔던 내 눈물은 미처 흘러내리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오빠 친구들...?” 이훈을 닮아 껑충한 키를 한 여자아이가 조그맣게 물었다. 나는 그 여자아이가 이훈의 여동생이며, 또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밥 먹었니?” 공주님이 사근사근하게 묻자, 여자아이는 주춤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말에 민섭과 지성은 조용히 부엌이 어디있는지 물어보었고, 도연은 슈퍼갔다온다는 말을 툭 던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공주님은 여자아이의 옆에 앉아서 여자아이와 놀아주었으며, 영훈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어지럽힌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난방이 들어오지 않은 건지, 거실 바닥이 차다. 밥상을 차려서 밥을 먹으면서, 그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훈의 여동생마저, 나이도 어린 것이 벌써부터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 후, 선생님들은 어색한 얼굴로 이만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덩달아 우리까지 일어나자, 이훈은 우리를 바래다주겠다며 같이 집을 나왔다. “...바래다줄게.” 국어 선생님의 차를 얻어타고 가려는 내 손을 붙잡고 이훈은 조용히 말했다. 나는 멈칫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국어 선생님께 인사를 드린 후, 이훈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떤 한 곳에 멈춰서서 이훈은 피식 메마른 웃음을 지었다. “...여기 기억나?” 작은 공원이다. 기억날 듯 말 듯 하다가,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뚜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알게 뭐냐. 일단 기억난다고 우기고 보는 거다. 이훈은 내 손을 잡고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앉았다 가자.” 어떤 벤치를 가리키며 말하는 이훈에게 반대의 말을 하지 않고, 나 역시 이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자퇴할 거야.” 이훈은 조용히 말했다. 다짜고짜 꺼낸 이훈의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때 봤던 그 아줌마 알지? 외로운 사람이야. 같이 있어 달라고...그러면, 동생까지 모두 책임지고 돌봐주겠다고 하더라.“ ...이건 범죄다. 아니, 그보다, 너 그 아줌마랑 끝났다고 했잖아? 놀란 얼굴로 이훈을 바라보자, 이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 아줌마, 몸이 약하거든. 이번에 병원에서 병이 재발했다는 진단을 받았어.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진 거지. 그래서 나를 찾아왔던 건데.... 나는 때맞춰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니... 곁에 있어 주면, 그만큼 대가는 주겠다고 하더라. ...반대는 하지 마.“ “...그럼, 무슨 말을 듣고 싶은 거야?” 조용히 이훈에게 물었다. 이미, 이 녀석은 마음을 정했다. 어떤 설득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이훈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 줘. 너라면, 믿을 수 있으니까.“ 가슴이 답답하다. 이 놈을 때려서 생각을 뜯어 고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이훈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이훈의 눈동자는 곧으면서도 당당했다. 이훈은 벤치에 다리를 올리고 내게 몸을 돌려 편하게 앉았다. “...실은, 잘 모르겠어.” 이훈은 키득거리며 냉소를 지었다. 나는 대답 대신 몸을 돌려 이훈과 등을 기대고 마주 앉았다. “그래도, 동생은 행복하게 자라 줬으면 하고... ...그리고, 당당해지고 싶어, 나 자신이.“ 이훈은 두서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나를 비난하고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처음부터 기회가 없는 사람이란, 어쩔 수 없는 거야.“ 이훈은 메마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문득 옆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이훈이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이 애처로와, 손을 움직여 이훈의 손을 맞잡았다. -20- 그것이 기폭제가 된 듯, 이훈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주위를 둘러봐도, 모든 것이 무섭기만 했어.” 담담한 그 말투에, 나는 잠시간 몸을 움찔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이훈의 체온이 차갑다. “누구든 나를 도와주었으면 하고 바랬지. 하지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어.“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땅에서 시린 기운이 올라와 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다. 올려다본 밤하늘에는 그 흔한 인공위성조차 보이지 않았고, 황적색의 달 하나만이 외로이 떠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모든 것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어. 안 그러면, 나 자신을, 그리고 동생을 미워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흔들리는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것은, 오직 있는 듯, 없는 듯 느껴지는 등뒤의 온기와 단조로운 목소리 뿐. 내가 지금 살아있다는 자각조차, 주황색 가로등 불빛에 짓눌려 안타깝게 사라져버린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어.” 울음기조차 없는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슬프게 들린다면 너는 나를 비웃을까. 나는 고개를 더욱 뒤로 젖혔다. 내 머리에 짓눌린 이훈의 목이 아래로 숙여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미워하고 싶지 않았어.” 무엇을...? 하고 묻지는 않았다. 그저, 순간 안도하면서, 시려오는 내 마음을 다독였을 뿐이다. “나는 사실...그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언제나 굳건한 바위가 되고 싶었다. ...나는, 바위가 될 수 있을까?“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언제나 당차고 활발했던 반장과의 짧은 대화가 기억난다. 그 때,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은 욕설이나 비난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심각하게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것은, 나 자신이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그녀가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떡볶이 장사같은 것은, 사회에서 천대받는 직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현실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니까, 내가 되고 싶으니까...그렇게 생각했던 나에게,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너는 꿈 속에서만 살고 있구나.] 현실에서 등을 돌리고, 꿈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도 괜찮지 않느냐고, 어렸던 나는 소심하게 외쳤었다. 그랬던 내 마음이, 어린아이의 어리석음으로 치부당했다. 그리고, 나는 슬프게도, 사실 나는 어른이 되기 싫어 안간힘을 쓰는 어린아이일 뿐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눈을 돌린 비겁자일 뿐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집으로 돌아가던 그 때, 이미 나는 어렴풋하게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미웠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강제로 내 몸을 잡아 돌려 현실을 직시하게 했던 어린 그녀를, 나는 이를 악물고 싫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나 자신을 미워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스스로의 어리석음, 창피함, 그리고 그럼에도 여전히 꿈을 향한 동경을 버리지 못한 어린 나 자신을, 자학하듯 몸부림치며 싫어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 “...나는 바위가 될 수 있을까?” 작은 목소리로, 이훈이 다시 질문했다. 꼭 나에게 묻는 것이라고 볼 수 없으리만큼, 이훈의 목소리는 작았고, 또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몸을 돌려 이훈을 안아 줄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나는 이훈에게 대답해 줄 수도 없었다. 섣부른 위로를 할 수도 없다.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그저 막막한 가슴만을 부여잡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곁에 있어 줘.” 나는 참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처음으로 이훈이 나에게 하는 부탁이었다. 그런 너의 부탁을, 이런 식으로밖에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 미안하다. 몸을 돌려 네가 조금이라도 쉴 수 있도록 안아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아무리 사과를 해도, 너에게는 위로가 되지 못하겠지. 그러니,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이렇게 등을 맞대고 있는 것만큼은 얼마든지 해 줄게. 네가 나를 밀어내고 바위가 될 때까지만이라도 이렇게, 등을 마주대고 너의 곁에 있어 줄 거다. 천천히, 이훈의 조그만 흐느낌 소리가 들렸다. 이훈의 떨리는 어깨가, 마주댄 등을 타고, 고스란히 내 몸에 진동을 전달한다. 나는 이를 악물고 밤하늘을 노려보았다. 나는, 꿈만을 쫓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지 못했다. 겨우 마주 보게 된 현실은,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고, 또한 무서웠다. 다시 등을 돌려 꿈을 보게 될 때, 그 현실이 등 돌린 나의 몸을 덮쳐 버리게 될까봐, 나는 언제나 두려웠다. 그래서, 차마 현실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못하고, 나는 언제나 현실을 노려보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현실에서 더 멀리 달아날 수 있도록.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친 듯이 밤의 산책을 즐겼다. 모든 것에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틈만 나면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런 스스로에게 만족해했다. 꿈을 향해, 아니면 현실을 향해 다가갈 용기도 없으면서, 꿈의 단편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역겹게 자신을 기만했다. ...온 몸이 차갑게 굳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훈의 질문이 귓가를 맴돈다. 그리고, 나는 이훈에게 침묵 속에서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나는 바위가 될 수 있을까. 이렇게 힘들고 지친 네가 쉬어 갈 수 있는, 그리고 그 어떤 것에도 변하지 않는 그런 바위가... ....될 수 있는 것일까.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대신, 이훈의 숨죽인 울음소리가 아프게 내 심장을 파고들었다.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나 역시, 바위가 되고 싶었다. “여어.” 고개를 들어 인사하는 이훈의 얼굴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몸을 들썩거렸다. 누구나가 이훈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 한마디라도, 하다못해 자그마한 위로라도 하고 싶어하는 것을 나는 쉽게 눈치챘다. “...이훈아.” 공주님이 울 듯한 얼굴로 이훈을 바라보았다. 그 옆에서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성이, 몇 번이나 머뭇거리며 할 말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괜찮아.” 이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이훈의 얼굴은, 한 꺼풀을 벗어 던진 것처럼, 어찌보면 시원해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떻게 보면 슬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보다, 은성아. 잠깐 이야기 좀 할래?” 나는,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나 이훈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도중에 공주님이, 자신도 데려가 달라는 듯 내 소매를 잡고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묵묵히 공주님의 손을 떼 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공주님은, 곧 체념한 듯 고개를 숙였다. 이훈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은 자세로 걸어갔다. 나는 그런 이훈을 바라보며 잠시 과거를 생각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키가 컸던가. 아니, 저런 식으로 당당하게 걸을 줄 아는 놈이었던가. 나에게 과거의 이훈은, 가늘게 찢어진 눈을 하고 나를 비꼬는 것을 좋아하는 얄미운 놈일 뿐이었다. 단순히 짝꿍이라고만 호칭했던 그 존재를, 나는 언제부터 이훈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가진 인간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걸까? 이훈은, 건물 뒤로 돌아가 구석진 곳에 서서 나를 손짓했다. 나는 어슬렁거리는 걸음걸이로 이훈의 곁으로 걸어가 작은 꽃들이 심어진 화단을 바라보았다. 이훈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벽에 등을 기댔다. “나, 자퇴서 내러 왔어.” 이훈의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학교를 그만두지 말라던가 하는 식의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내 마음을 이훈에게 강요할 만큼, 이훈의 인생을 책임져 줄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 아줌마,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야. 외로움을 많이 타는...그런 사람이야.” 그렇게 말하는 이훈의 음성이야말로, 외로움을 타고 있는 사람처럼 쓸쓸했다. “학교 그만두고...네게 연락해도 괜찮겠어?” 이훈은 작게 물었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서 이훈을 돌아보았다. “내 핸드폰 번호, 모르지?” 내 질문에 이훈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쿡, 민섭이가 난리치는 게 이해가 된다. 너, 또 잊어먹었지? 학기 첫날부터 네가 나에게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줬었던 것 말이야.“ ...그랬던가. 나는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 때는 어찌나 황당하던지. 핸드폰 번호 가르쳐주면서, 청소 다 끝나면 전화하라고 말하고, 너는 그대로 도망쳐 버렸었지. 청소하기 싫다고 말이야.“ 이훈은 웃음기 섞인 음성으로 잔잔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훈을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했다. “그럼, 굳이 안 알려줘도 되겠네. 단, 나는 웬만해서는 답장 안 하니까, 그런 것 가지고 삐지지 마라.“ “바라지도 않는다.” 이훈은 그런 나를 향해 입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그런 이훈의 모습에, 조금 편안한 기분이 들어 몸을 펴면서 나른하게 하품을 했다. 그런 내 모습에, 이훈의 눈썹이 위로 치켜올라간다. “...어떻게 너는 이런 때까지 하는 행동이 변하지를 않냐?” 나는 졸음기 섞인 음성으로 대꾸했다. “너무 급격하게 변하면 죽는단다. 내가 그렇게 되면 네가 섭섭하잖아?” 농담으로 한 말인데, 이훈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그런 이훈의 태도에, 나는 그만 잠이 확 깨버렸다. “...너 때문에 죽을 것 같다, 야.” 팔에 돋아난 소름을 박박 긁으면서 말하자, 이훈은 그런 나를 향해 눈을 가늘게 휘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죽는 김에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 “...뭔데.” 나는 이훈을 경계하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싫다고 딱 잘라서 말하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이 녀석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다. 게다가, 나는 왜인지 이훈에게 빚을 지고 있는 듯한 심리적 부담감을 가지고 있었다. “화 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말 할게.” 그 말인즉슨, 내가 화낼 만한 일이라는 것이렸다? 나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일단 뭔지 말해 봐.” 내 말에, 이훈이 내 앞으로 쓰윽 다가오며 미소지었다. “후회할 텐데...” “....그러니까, 그게 뭐냐니까?” 말꼬리를 흐리는 이훈의 모습이, 상당히 수상쩍어서, 나는 경계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이훈의 곁으로 다가갔다. 말 하기가 힘든 비밀 이야기라서 저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해 버렸다. 그것은, 말 그대로 당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입술의 감촉이 어떤 것이라던가, 또는 이 녀석의 손이 내 허리를 감고 있다던가, 하는 생각을 할 사이도 없었다. 키스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 동안 멍한 얼굴로 충격을 이기지 못해 잠시간 현실 도피에 빠졌다. 그리고 겨우 이훈이 내게서 입을 떼고 몸을 비켰을 때... ...나는, 비틀거리며 뒤로 돌아섰다. “잠이나 자자...” 불연듯, 그 말이 습관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랬다. 오랫동안 들어온 버릇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어서, 그 순간 내게 든 생각은, 잠을 자고 난 후, 일어나서 다시 생각해 보자는 것이었다. “어어? 화 안 내네?” 이훈의 웃음기 섞인 말에, 빠져나갔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려 이훈이 정강이를 왼 발로 세게 걷어찼다. “벌이야.” 울려 퍼지는 타격음을 들으며, 냉정히 말하자, 이훈은 아파서 찡그린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고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안는 건 연인에게만 허락한다고 해서, 그건 하지 않았잖아?” “...씹, 그렇다고 해서, 이...이...”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이 새끼, 지금 건, 내 첫키스란 말이다~! 형들에게도 뺏기지 않고 고이 간직해 뒀던 내 순결을,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잃다니... “너, 나중에 1000배로 갚아~!”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이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순진하게 대답했다. “그러지 뭐, 그럼, 내가 갚을 때까지 기다려 줄 거야?” ...저게 미쳤나. 너무나도 순순히 대답하는 이훈의 모습에, 오히려 내가 허탈해져 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뒤로 돌아섰다. “...헤어지는 게 아니니까, 배웅은 안 한다.” 짧게 말하고, 나는 아까 이훈의 모습처럼, 등을 곧게 펴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21- “이훈이 자퇴서 내고 갔다는데 진짜야?”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점심 시간에 공주님은 한참을 조용히 있다가, 겨우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응.”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영훈이 먼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공주님은 꽤나 속상했던지, 젓가락으로 밥을 쿡쿡 찌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묵묵히 반찬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넌 지금 밥이 입에 들어가냐?” 공주님은 그런 나를 흘겨보며 힘없이 이죽거렸다. 뭐야, 대체 저 맥아리 없는 목소리는. 누가 죽기라도 한 건지. 쳇, 하고 고개를 돌리고, 나는 다른 반찬을 집어들었다. 침울한 분위기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아침의 일 때문인지, 기분이 별로 안 좋다. “속상하지?” 영훈은 지금 분위기가 어떤지 모르는 사람처럼, 씨익 웃으며 가볍게 말을 꺼냈다. 슬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장난기 어린 미소까지 짓고 있는게... ...감이 온다. 이 녀석,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히 화가 났다. ...또, 어떤 변태를 만나기라도 한 걸까? “그러니까, 오늘 놀러 가자. 이훈이네 집으로. 술이라도 사 가지고 말이야.“ ”...술은 빼자.“ 술이라는 말에 괴로운 표정을 짓는 도연을 무시하고, 영훈은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 갈 거지?”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마주보는 눈길을, 그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무언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우리는 예전처럼 말없이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야, 우리 왔다.” 이훈의 집에 도착한 도연이, 제일 먼저 문을 탕탕 두드리면서 볼멘 목소리로 외쳤다. “...어?” 삐걱거리며 열리는 문 안에는, 껑충한 키의 여자아이가 문 뒤에 숨다시피 서 있었다. “민지야, 누구... 아...” 그 때, 방을 치우는 것처럼 앉아 있던 이훈이 우리를 돌아보았다. 이훈의 표정이 의아함에서, 곧 반가움, 그리고 쑥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우리 왔어.” “야, 맛있는 것들 잔뜩 사 왔어. 어휴, 우리 예쁜 민지, 잘 있었어?” 영훈이 민지의 머리를 친한 척 쓰다듬으며 다정히 묻자, 민지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실은 로리콤이었던가? 왜 남의 동생을 저렇게 쓰다듬어? 이상한 눈초리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영훈은 민지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있었다. ...저 녀석, 변태들을 너무 만나서 변태끼가 옮아 버린 건 아닐까?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사람처럼, 이훈이 민지를 뒤로 잡아 숨기면서 영훈을 노려보았다. “주제에 눈은 높아서.” 그 함축적인 말에 영훈이 발끈할 사이도 없이, 민섭과 도연은 서로의 등을 팡팡 치면서 웃기 시작했다. “형님한테 함부러 대하면 안 되지, 엉?” “맞아, 이훈이한테 잘 보여라.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누가 아냐?” ...민섭아, 도연아... 너희들, 영훈이가 지금 너무 환하게 웃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하지만, 다행히 영훈은 발작을 일으킨다던가 하지는 않았다. 대신, 영훈은 들고 온 과자와 음료수, 그리고 술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은 먹었어?” 그 말에 민지가 수줍게 고개를 저으며 영훈의 옆에 달라붙었다. ...역시, 영훈이 녀석 뭔가가 수상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우리를 보고, 영훈이 천사처럼 웃어보였다. ...조금만 더 하면, 이성을 잃어버릴 것 같은 영훈의 모습에, 우리는 얌전히 영훈이 시키는 대로, 음식을 하고, 방을 치우고, 그리고 나는... ...바닥에 앉아서 멀뚱히 이훈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영훈은 그런 우리 둘 사이에 민지를 앉고 끼어 앉아서, 대갓집 마나님처럼, 이것도 해와라, 저것도 해 와라, 하면서 아이들을 부려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가 수상하단 말이야... 밥을 다 먹고, 민지가 졸음을 못 이겨 잠이 들자, 우리는 가지고 온 안주거리와 술들을 꺼내놓고 한바탕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에, 술 대신 종이컵에 쿨피스를 따라서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도연이 풀린 눈으로 일어났다. “...어엇~!” 공주님이,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취한 도연이 그대로 이훈의 입에 딥 키스를 해 버린 거다. 누가 봐도 찐하다, 싶을 정도로 키스를 한 도연이 히죽거리며 웃었다. “이걸로, 피장파장이다. 알았지?” 정체 불명의 말을 이훈에게 던지고, 도연은 그대로 쓰러져서 잠들어 버렸다. ...저 녀석에게 술 따라 준 미친 놈은 또 누구일까. 이훈은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잠시간 앉아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왜, 왜 이래~!” “그만 해, 술취해서 그런 거잖아.” 다른 사람들이 붙잡고 말리는데도, 이훈은 묘하게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는 “저 녀석이...저 놈이...” 하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를 은근슬쩍 바라보는데, 나로서는 이훈이 왜 나를 매달리듯이 바라보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복숭아맛 쿨피스를 한 모금 마시고, 이훈에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훈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영훈이 옆에서 쿡쿡 거리며 웃었다. “뭐, 이번 일은 이 정도로 넘어가 줄게.” ...이번 일이고 자시고 간에, 영훈이 이 녀석은 왜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음료수 잔을 빼앗아 가는걸까. 나는 너무나도 태연하게 내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영훈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영훈은 나에게 예의 그 미소만을 지어보일 뿐이었다. 썩을 놈. ...뭐, 저 상태의 영훈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은, 나로서도 내키는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얌전히 다른 종이컵을 집어들어 다시 쿨피스를 따랐다. “훗, 어린 놈들. 나는 이미 예전에 간접이 아닌 실제로 해 봤단다.“ 민섭이 작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리자, 영훈이 사레가 들린 듯 콜록거리며 민섭을 노려보았다. 동시에 이훈까지 민섭을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러니까, 이 놈들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누가 내게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 울고 웃고, 떠들다가 잠들어 버린 아이들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 옆에서 영훈이 기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은성아.” 이훈이 조용하게 나를 불렀을 때, 영훈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아래로 내렸다. “...왜.” 나는 짧게 대꾸했다. “꼭, 연락 할게. 그러니까 무시하면 안 돼. 날 잊어버리지도 말고.” 이훈은 그런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바닥에 놓인 새우깡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바삭거리며 씹혀야 할 새우깡은, 눅눅하게 변해서 이미 본래의 맛을 잃고 있었다. “난 잠깐 바람 쐬다 올게.” 영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영훈은 발로 민섭과 지성을 툭툭, 쳤다. “야, 어서 일어나. 너네 안 자는 것, 내가 모를 줄 아냐?” “...지금 막 잠들려는 순간이었어.” 지성은 짧게 불평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답답한 방 안의 공기를 조금은 맑게 바꿔 준다. “그럼, 우리는 잠깐 나갔다 올게.” 민섭은 손을 건성으로 흔들면서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지성과 영훈이 문을 부드럽게 닫으며 나갔다. “...너, 처음 봤을 때, 내가 얼마나 너를 싫어했는지 모르지?” 이훈은 벽에 몸을 기대고,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 전에 네가 했었던 이야기야. 하지만, 나는 그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계속해서 네가 미웠는데...그런데, 이상하게 무시할 수가 없는 거야. 그 땐,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처음에,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아냐?“ 그것도 말 했다니까. “너랑 친해진 후에, 네 뒤통수를 쳐서 네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그런데, 너처럼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녀석은 처음이라, 오히려 너와 있으면서 상처 입는 것은 나였지.“ 이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목가의 단추를 풀렀다. “그런데, 이상하게...힘들고 눈물이 날 때면 네가 생각나더라. 너는 정말 얄밉고, 또 재수없는 녀석인데도... ...내게 아무 말 없이 등을 빌려주는 사람은 너 뿐이었어.“ 도연이 무슨 소리를 웅얼거리면서 몸을 뒤척였다. 아기처럼 곤히 잠든 도연의 얼굴을, 나는 잠시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울 수가 없었어.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대로 잡아먹힐 것 같아서...언제나 눈에 힘을 주고, 강한 척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 앞에서는 그렇게 되지가 않았지.“ 이훈은 짧은 웃음을 지었다. 허탈하기도 한, 그러면서도 즐거워 보이는 미소였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싶으면서도...네 앞에서는 약한 내 모습을 내 보여도, 꼴불견으로 망가져도...그래도 괜찮았어. 너는, 위로도 다정한 말도 해 주지 않았지만...그렇기에 나는 네 앞에서 편하게 울 수 있었던가 싶다. 너는, 나를 동정하지도, 또 무서워하지도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뿌연 방의 공기 안에서 꺼질 듯이 웃는 이훈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지금은, 말 할 수가 없어.” 이훈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너는 나를 기다려줄 거잖아? 그렇지...? ...내가 힘들 때, 또다시 등을 빌려줄 거잖아?“ 그렇게 말하는 이훈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등 정도는 빌려주겠다고. 내 가슴은, 애인을 위해 남겨두겠지만.“ 무뚝뚝한 나의 대답에, 이훈은 고개를 쳐들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 꼭 남겨두고 있어. 나 역시, 기대하고 있으니까.” “...뭐?” 나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가끔씩, 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다. “...그런 게 있어.” 이훈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훈의 밝은 모습을 대하자, 가라앉은 내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바위가 될 수 있을 거다.” 나는 천천히, 명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이훈의 웃음소리가, 갑작스레 멈춰졌다. “...뭐?” 아까의 나처럼, 이훈은 멍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 머릿속의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나는 돌멩이야. 그리고, 너 역시 다른 사람들 눈에는 하찮은 돌멩이로 보이겠지. 그래도... ...내가 이리저리 차이면서 굴러다니는 이유는, 내가 하찮은 돌이기 때문이 아니야. 나는 많은 곳을 굴러다니며, 스스로를 작게 만들지. 내가 작아지는 이유는...“ 나는 이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돌아다니면서 부딪히는 다른 돌들에게, 나의 돌가루를 나눠주기 때문이야. 그리고, 나 역시 그들에게 돌가루와, 또는 흙, 먼지, 그런 것들을 나눠받지. 그렇기에, 나는 수없이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 수 있는 거야. ...나는, 너에게도 부딪혔고, 또 너에게 내 돌가루를 나눠줬어. 앞으로도, 너와 나는 계속해서 부딪히겠지. 너는, 내가 돌가루를 나눠준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명이야. 기쁘게 생각하라고. ...그러니까...“ 나는 쑥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어깨를 으쓱했다. “...너는, 언제든 바위가 될 수 있어. 너는, 나 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에게도 무언가를 받았잖아? 그것들이 뭉쳐서, 네 몸 위를 덮게 되면, 너는 더 이상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태풍도 견디는 큰 바위가 될 수 있을 거다. ...아직 바위가 아니라면 또 어때? 나도, 또 다른 녀석들도 모두, 아직 작은 돌멩이야. 그러니 태풍이 다가오면, 우리끼리 몸을 쌓아서 바위로 위장하면 돼. 그러면, 태풍도 쌓여 있는 돌멩이들을 날려 버리지는 못하겠지. 그러다가, 설사 맨 위의 돌멩이 몇 개가 다른 곳으로 날려가 버린다 해도... ...언젠가는, 다시 옆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모두 모이게 될 거야. 돌멩이는, 작은 바람에도 쉽게 구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 마. 외로워 하지도 마. 언제든지, 힘이 들면 연락해. 말했잖아? 내 품은 안 되지만, 내 등은 언제든지 빌려 줄 수 있어. “아...야, 너 은성이 맞냐?” 이훈은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됐다.” 저건, 잘 해 줘도, 잘해 주는 줄을 몰라요~! 하여간, 이래서 친절히 대해주는 것도 참 어렵다. “아니... 은성이 너, 취했냐?“ “됐다니까~!” 나는 입을 비죽 내밀며 새우깡 하나를 다시 입에 넣었다. 쳇, 그런 식으로 반응하다니... 게다가 닭살이라는 듯, 네 팔목을 긁고 있는 그 망할 손가락은 또 뭐냐? 나는, 확실하게 삐져서 새우깡을 거세게 씹어먹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잘해주니까 갑자기 불안하네?“ 이훈은 눈을 깜박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언가가 굉장히 허무해진다. 대체 저 녀석의 마음속에서의 내 이미지가 어떤 것이길래, 말 한마디 해 준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과민 반응을 보이는 걸까. ...설마하니, 내가 그렇게 못된 놈이었단 말인가. 나는 잠시 동안 스스로의 지난 행적들을 돌이켜 보았다. 이훈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훈의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더니, 결국 힘없는 미소가 이훈의 얼굴에 나타났다. “...이래서, 내가 너에게 기대하게 되는 것 같다. 어떻게 하지? 내가 정말로 포기하기 싫어지면...” 조금쯤은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하며, 이훈은 다시 한 번 웃었다. 그 웃음은,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빛을 띄고 있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해. 많이 귀찮지 않을 때에는, 상대해 줄 테니까.“ 내 대답에 이훈은 다시 한 번 밝게 웃었다. 나는 그런 이훈을 외면하고 바닥에 몸을 눕혔다. 지독히도 피곤해서, 나는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22- “...축제?” 나는 뚱한 목소리로 되물으며 공주님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보다 운동회가 먼저...야...!!” ...잠 좀 자자니까... 나는 나를 잡고 흔드는 공주님의 손길을 피해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가, 결국은 항복을 선언하고 일어났다. “...그런데, 그걸 왜 나에게 말하는 건데?” 내 차가운 질문에, 공주님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공주님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성이 옆으로 다가와 공주님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며 말한다. “한두 번 이러냐...그냥, 네가 참아.”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다. “...아니, 못 참아~!” 나는 나를 향해 소리를 빽 지르는 공주님을 마주 노려봐주었다. “니가 반장이지, 내가 반장이냐?! 왜 내가 허구헌날 회의에 나가서 반장 안 데려왔다고 혼나야 하는 거야?!“ 꽤나 쌓인 게 많았던 듯, 공주님은 입에서 침이 튀도록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시끄럽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공주님을 향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이 가고 싶다는 거지?” “...그, 그게 아니...!” 얼굴을 붉어져 뒤로 주춤거리는 공주님을 향해, 나는 순진하게 미소지었다. “내가 좋으면 좋다고 말을 하지, 돌려 말하기는... 그래, 그럼 우리 데이트는 언제쯤 할까?“ “풋.” 앞에 앉은 녀석 하나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공주님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보면서 힘겹게 말했다. “바, 방과 후에 집에 가지 말고 꼭 기다려...!!” 쳇, 이렇게 말하면, 그냥 보내줄지도 모른다고 약간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동안 공주님도 나름대로 내공이 많이 쌓였나 보다. 나는 투덜거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여기가 회의실?” “응.” 공주님은 짧게 대답하면서, 몸을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알았지? 들어가서, 절대로 소란 피우지 말고. 사람들이 뭐라고 하면,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넘어가. 약속이다?“ “...꼭 내가 어린아이인 것처럼 말한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이봐, 나는 시끄러운 것도, 소란 피우는 것도 질색인 사람이라고. 그런데 이렇게 정색인 얼굴로 내게 얌전히 있으라고 말을 하다니... ...괜시리 사고를 치고 싶어지잖아. 나는 공주님을 따라, 작은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들이, 교실 안 의자에 앉아 우리 쪽을 바라본다. 나는 ㄷ자 형태로 놓여진 책상과 아무 장식 없이 살풍경한 교실 내부를 주욱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이사장은 학생회의 권리 향상이라던가, 또는 학생들의 자치라는 사항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 자리는 여기야.” 공주님이 내 손을 잡고, 그 중 한 곳으로 걸어가 의자를 빼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순순히 그 의자에 앉아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자고 싶다. 하지만 이제 곧 회의가 시작할 테니, 자면 안 되겠지. 그래도 자고 싶어. 나는 필사적으로 졸음을 참기 시작했다. “이번에 운동회 끝난 다음날 바로 축제를 시작한다더라. 그것도 운동회 하루, 축제 하루, 라는 일정이래. 너무하지?“ 공주님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잠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일찍 끝나면 편해서 좋은 것 아니야?” “노는 날이 줄어들잖아.” 공주님은 그렇게 말하며 입을 비죽거렸다. “뭐, 하긴... 축제면 또 몰라도, 운동회에서는 우리 반이 이길 가능성이 애시당초 없으니... 이번 운동회는 2학년 9반이 벼르고 있잖아. 그 반 담임이 만주 벌판이잖아. 그 반은 벌써부터 방과 후에 연습하고 있다던데... 1학년들 중에서도 8반이 유력한 우승 후보고... ...휴, 이럴 때 이훈이도 같이 있었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공주님은 그렇게 말하고, 우울한 얼굴로 땅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여간, 이 녀석도 스스로 땅파는 데에는 재능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냥, 자자... ...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사람들이 문을 열고 우르르 들어왔다. 그게 시발점이 되어서, 곧이어 다른 사람들이 마저 도착해, 좁은 회의실 안은 학생들로 꽉 차게 되었다. 제일 앞에 앉은 사람은 회장인 듯, 우리들을 둘러보며 점잖게 선언했다. “빠진 사람은 없어보이는군요. 그럼 시간도 됐으니, 이만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아, 졸려라. 나는 앞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피해 슬쩍 눈을 감아보았다. “아 참, 1학년 3반 반장 오늘은 나왔나?” “아, 네.” 동시에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르는 손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3반 반장?” 앞에 앉은 사람, 그러니까 회장으로 추정되는 이가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진다. 분명 나는 3반이고, 또 3반의 반장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느릿하게 대답하자, 회장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이제까지 왜 회의를 빠졌지?” ...그야, 당연히 귀찮아서... ...라고 대답하면, 몰매라도 맞을 분위기다. 싸늘해진 공기가, 그런 대답은 위험해, 하고 나에게 경고를 보내온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 동안 회의를 빠져서 죄송합니다.” “지금 나는, 사과를 들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무언가 길게 잔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회장의 말을, 옆에 선, 안경을 쓴 사람이 도중에 가로막았다. “시간 없어. 나중에 이야기하고, 지금은 그냥 넘어가.” ...저 사람은 부회장이라도 되는 건가. 그 사람의 말에, 회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체육대회와 문화제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나는 앞에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방금 들은 말을 곰곰이 되씹어보았다. 분명히, 지금은 그냥 넘어가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라고, 회장의 옆에 선 사람은 말했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나중에 나를 붙잡고 이야기를 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회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금도 얼굴을 상기시키며 계속해서 떠들어대는 게, 회장은 말을 한 번 시작하면 언제까지고 할 수 있는, 이른바 청산유수 형으로 보였다. 즉, 잔소리를 아주 잘 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로 추정된다. ...흐음, 하고 고민을 하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깜박 잠에 빠져들었다. 꾸벅,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내 모습에 놀란 공주님이 옆에서 내 옆구리를 마구 찌르기 시작했다. ...귀찮다. 이대로 화장실이라도 간다고 말한 후, 도망치면 안 될까? 나는 진지하게 도망치는 방법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뭐야, 아직도 집에 안 갔나?”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거친 음성으로 누군가가 빈정거리며 말했다. 나는 잠도 깰 겸 해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문에 몸을 기대고 서서, 학생들을 향해 비꼬듯이 웃고 있었다. “애새끼들끼리 모여서 떠드는 것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 하여간, 어린 놈들은 그냥 입 닥치고 가만히 있게 만드는 게 제격인데, 학교도 참 너그럽단 말이야. 이럴 시간에, 집에 가서 공부나 해라, 이 놈들아!“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나는 꽉 쥐어진 회장의 손을, 옆에 선 사람이 지그시 누르는 것을 힐끔 바라보고, 선생님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저 선생님이... ...하다가, 나는 선생님의 번쩍이는 이마를 보고 겨우 생각해냈다. 저 선생님은, 분명 만주벌판이었다. 그러니까, 체육 담당의 방송부를 책임지는... ...응? 그런데 왜 내 옆자리가 비어있지? 의아한 얼굴로 두리번거리자. 문쪽에서 볼 수 없도록, 내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공주님이 보였다. 내가 지그시 공주님을 바라보자, 공주님은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입을 벙긋거리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공주님의 행동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그렇구나. 하여간, 공주님도 어지간히 기특한 녀석이다. 분명, 지금 공주님은 방송부 소속으로서, 방송부 담당 선생님인 만주벌판의 행동에 책임감과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에, 공주님은 차마 직속 선생님인 만주벌판에게 잘못된 점을 지적해 드리지는 못하고, 이렇게 나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 비록 이름뿐인 반장이지만, 이제까지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던 부반장의 부탁을 거절할 정도로, 나는 뻔뻔스럽지 못했다. “흥, 학생회라니... ...아무것도 모르는 애새끼들이 뭘 안다고.. 하여간, 공부하기 싫은 것들이 꼭 이런 일에 난리를 치지.“ “말씀이 심하신 것 아닙니까!” 더 이상 못참겠다는 얼굴로, 회장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 너 지금 나에게 대드는 거냐, 응?!” 만주벌판이 얼굴이 험상궂게 찌푸리며 우악스럽게 윽박지르자. 회장의 옆에 선 사람이 앞으로 나서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해원이가 생각 없이 말을 한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너...” 회장은, 씨근덕거리면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만주 벌판은 눈을 흘기면서 다시 한 번 이죽거렸다. “그렇겠지. 그러니까 학생의 권리를 높여 달라는 헛소리나 하고 다니겠지.“ “...그건...!” “말씀이 심하시군요.” 나는 담담히 말했다. 그러자, 발끈한 얼굴로 말을 꺼냈던 회장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만주벌판이 나를 바라보았다. 숨어 있던 공주님이 나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어댄다. 나는 그런 공주님을 따뜻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래, 힘내라고? 너의 마음, 모두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손을 내리고 가만히 있어도 돼. “...뭐?” 만주벌판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저희는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다닙니다. 등록금을 낸다는 것은, 배움의 대가를 지불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즉, 저희는 좀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인간적인 대접을 받을 권리를, 등록금이라는 형태를 통해 주장한 것입니다. 학교 측에서는, 저희에게서 등록금을 받았으며, 그 시점에서 저희의 주장은 받아들여진 것과 같습니다. 물론, 선생과 제자라는 관계 속에서 물질적인 거래를 논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서로의 의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담담한 내 말에, 만주벌판은 잠시 헷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저 새끼는?” ...이럴 수가. 나의 논리적인 의견은, ‘씨부린’ 것으로 치부되었고, 나는 그 사실에 무척이나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렇구나. 그럼 조금 더 단순하게 말해 볼까. “학생에게 그런 폭언을 함부로 하시다니, 무척이나 불쾌합니다. 무엇보다, 회의 중에 멋대로 들어오시는 것은, 예의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주 벌판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아니, 저 놈이 선생한테 지금...!” “선생님의 지금 행동은, 전혀 ‘선생님다운’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시장의 불량배들이 학교에 온 것은 아닌가, 순간 착각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새끼, 너 이름이 뭐야!” 만주 벌판이 나에게 다가오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만주 벌판을 향해 생긋 웃음을 지었다. “...라고, 회장이 저 쪽에서 말하고 싶어 합니다.” 회의실 안이, 다시 한 번 조용해졌다. -23- 만주 벌판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회장을 향해, 환하게 미소지었다. 절대로 나는, 아까 회장이 나를 향해 뭐라고 말을 했던 것들을 마음에 담고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는, 회장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에서 말을 한 것 뿐이다. 공주님의 부탁도 있었고 말이다. 화장은 내가 회장의 마음 속을 알아채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는지, 나를 향해 입을 벙긋거렸다. 그렇게 격려해 주시지 않아도, 나는 이미 회장의 마음을 충분히 짐작해 내고 있었다. 만주 벌판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나는 잽싸게 만주 벌판의 말을 도중에 가로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회장이, 내게 어서 다음 말을 하라고 재촉하듯,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의를 왜 하느냐는 식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무척 잘못된, 이를테면 바보같은 말씀이셨습니다. 무엇보다, 저희는 마침, 운동회 우승을 목표로, 거대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계시던 중이었으니까요.“ “하, 그게 무슨...!” 만주벌판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그럴 만도 했다. 만주 벌판은 체육 담당의 선생님이고, 그렇기에 운동회 우승에 대한 집착이 남다를 터였다. 그러니까, 아마도 자기 반이 당연히 우승을 하리라고, 남몰래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상이, 회장이 말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이쯤에서 할 말을 마무리지었다. 하고 싶은 말들은 많았지만, 선생님께 그 말들을 다 해드리기는 아무래도 죄송하다. 만주 벌판은 황당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하하, 아주 잘들 논다. 우승이라고? “ 나는 잠시간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니까 아까 공주님이... “뭐, 솔직히 이번 우승 후보로 2학년 9반이 유력하다고는 하지만... ...학생회가 한 번 움직이며 우승자가 바뀌는 것쯤은 간단하지요. -라고, 학생회에서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능력있는 우리 학생회 임원들을 바라보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학생회 간부들이 힘 내기를 바라며 웃어주는데도, 어쩐 일인지 회장은 뒷목을 부여잡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하하, 저런 식으로 감동을 표현하다니, 우리 학교 회장은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만주 벌판은 가소로운 녀석들, 이라고 말하듯이 비열한 웃음을 지었다. “좋아. 그래, 학생회 놈들이 그렇게 능력이 있단 말이지? 애시당초 네 녀석들이 눈에 거슬려서 죽는 줄 알았다. 무슨 일만 하면, 종알종알 말도 많고,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시끄럽기만 하지.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넘친다니, 아예 이 일을 가지고 내기라도 거는 건 어때?“ 분명, 내기 운운하는 말은, 학생과 선생 사이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하지만, 만주 벌판은 당연히 받아들이겠지, 라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아, 내게 무언의 압박을 주었다. 나는 학생회 멤버들을 힐끔 바라보았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던 회장이 갑자기 몸을 똑바로 세우고 갑자기 온 몸을 혼자서 급하게 휘저어댄다. ...저건, 받아들이라는 강한 압력의 표시겠지 싶어,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가 이길 경우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내 말에, 만주벌판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지더니, 잠시 후, 다시 활짝 펴졌다. “흥, 그보다 우리 반이 우승할 경우, 어떻게 해 줄 생각이지? 우리 반이 이기면...“ 만주 벌판은 다시 가느다란 비웃음을 지었다. “...학생회는 앞으로 이름만 걸어놓고 모든 활동을 정지하기로 하지. 어때?“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는 조건이었다. “대신 저희가 이기면...” 만주 벌판이 신중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킨 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점에 떡볶이를 추가시켜 주세요.” ...잠시,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만주벌판은 껄렁하게 서서 손가락으로 귀를 한 번 후벼파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너희가 이기면 뭘 해달라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매점에 떡볶이를 추가시켜 주세요.” 앞에서 회장이 쓰러질 듯 비틀거리더니, 나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내온다. 나는, 회장의 눈빛에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맞다. 그렇구나. 내 생각이 너무 짧았다. 역시, 선배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마를 손으로 짚는 만주 벌판을 향해, 아까의 말을 정정했다. “아까는 말을 잘못했습니다.” 내 말에 만주벌판의 표정이 달라졌다. 만주 벌판은 매섭게 눈을 빛내며 나를 향해 신중히 물었다. “그래, 뭘 원하지?” 나 역시, 만주 벌판에게 조용히 대답했다. “...떡볶이만 먹으면 목이 막히니, 오뎅도 추가해 주십시오.” ...만주 벌판은 잠시간 말이 없었다. “...어, 어쨌든 두고 보자~!” 뒤늦게 소리를 지르며 나간 만주 벌판의 뒷 모습을 한 번 바라본 후, 나는 조용한 회의실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부터 우승 계획을 짜고 있는 건가. 바람직한 자세다. 나는 어쩐지 기분이 밝아져 사람들, 특히 회장을 향해 환하게 웃었다. “그럼, 우승을 향해 수고해 주시지요.” 나는 그 말을 남기고 회의실 안을 나와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그럼, 이만 집에 갈까. 뭐, 이 내기에서 학생회가 이기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침 시간, 나는 나를 불러낸 두 명의 선배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누구시죠?” 나는 앞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두 명의 선배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선배들의 얼굴이 동시에 찌푸려지더니, 그 중 한 명의 선배가 이마를 짚고는 힘겹게 말했다. “이 녀석은 전체 학생 회장, 그리고 나는 부회장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정한 자세로, 선배들이 용건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슬슬 졸음이 오기 시작한다. 회장이라고 불린 선배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몇 번 숨을 고르더니, 나를 향해 힘겹게 물었다. “무슨 꿍꿍이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짜고짜 이렇게 질문을 던지다니, 우리 학교의 회장은 배려가 부족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네?” 순진한 얼굴로 되묻자, 회장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소리라도 지를 듯, 눈을 치켜뜨는 회장의 앞을, 부회장 선배가 가로막았다. “어제 일 말이야. 설마 만주벌판에게 그런 식으로 도전했으면서,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 지금 우리 입장이 굉장히 난처해. 그러니 어서, 네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해 봐.” 그 말에, 나는 아, 하고 짧은 감탄사를 질렀다. 참, 그러고 보니, 어제 그런 일이 있었지. 하지만, 그 일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 되는 힘없는 1학년 반장일 뿐이다. 나는 나보다는 훨씬 대단한, 학생회의 선배들을 바라보며 천사처럼 환하게 미소지었다. “저는 지금, 그 일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회장의 얼굴이 심술궂게 일그러지고, 부회장은 다시 한 번,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였다. “그게 무슨...” “...원하는 게 뭐지? 학생회가 사라지길 바라는 건가?“ 부회장을 옆으로 쓱 밀치고, 회장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날카롭게 물었다. 나는 회장을 바라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저 선배는 또 왜 저러는 거지, 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자, 회장이 나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물었다. “어떤 선생이 시킨 거지?” “...은성이는 잘못 없어요~!” 버럭, 외치는 소리에 나는 멍한 얼굴로 옆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공주님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가련한 포즈로 서 있었다. “분명, 아무 생각 없이 한 걸 거예요. 애가 조금 이상해도 악의는 없어요!” 나는 나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공주님의 손가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정말이예요! 무엇보다, 은성이는 귀찮다 싶은 일은 건드리지도 않는 게으른 녀석이거든요.“ 진실만을 말한다는 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공주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어째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고민해보았다. “그러니까 은성이는...” 나는 한숨을 한 번 푸욱, 내쉬었다.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자, 짜증날 정도로 파아란 하늘이 나를 내려다본다. 나는 하늘이 나에게,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네가 참으렴, 하고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은성이는 가만히 내버려두면 아무것도 안하고 잠만 잘 테니까... 제가 약속할게요. 은성이가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도록...이번 일도 나쁜 마음으로 한 건 아닐 거예요.“ ...아아, 내가 아무리 성격이 좋고 참을성이 강하다지만.. ...지금은, 공주님의 볼을 잡아 양 옆으로 쫙 잡아 늘이고 싶은 충동에 손이 다 근질거린다. “...이,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회장이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하자, 옆에 선 부회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가 잘못했느냐가 아니야. 이대로 나가면, 학생회는 없어져 버릴 거라고. 그러니 그 대책을 마련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더 시급해.“ 그 말에, 공주님은 몸을 움찔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어서 이 일을 해결해~! 라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공주님을 향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공주님의 말을 듣고, 짜증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주님의 헛소리에 발끈해서 이 일에 끼어들기에는, 나의 귀중한 시간들이 너무 아깝다. 그 시간에 잠을 잔다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를 생각하자, 이 일에 끼어들 마음이 영 생기지 않는다. 게다가, 부회장의 말마따마 학생회가 폐쇄된다 해도, 나로서는 아쉬울 것이 없다. 앞으로는 공주님이 나에게 회의 나오라며 귀찮게 굴 일도 없겠지, 하고 몸을 돌리려는데, 공주님이 내 옆에 와서 귀찮게 군다. “은성아, 어떻게 해? 응? 만주 벌판, 한 번 말하면, 꼭 하는 성격이란 말이야. 어떻게 하지?“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글썽거리는 공주님을, 나는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일을 이렇게 크게 벌린 건 너야. 그러니,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어?“ 부회장이 안경을 추슬러 올리며 나를 향해 말했다. 나는 손을 내밀어 공주님의 볼을 잡아 양 옆으로 늘려보았다. “아아앗~!” 괴로운 표정으로 비명을 지르는 공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저는, 학생회 소속도 아니고, 또한 이 학교에 애착을 가질 만큼 학교에 오래 재학하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나이 어리고, 경험이 부족한, 1학년에 불과합니다.“ “...소문은 들었어.” 내 말에 부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부회장의 은테 안경 너머 번득이는 눈이 나에게 무언가를 경고한다. 나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뺨을 만지고 있는 공주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제가 이런 제안을 해도 무리한 것이 아니겠군요.” 공주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준 후, 나는 부회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 일에서 관건은, 역시 2학년 9반을 우승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겠지요. 그것도 나중에 다른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철저하게 말입니다. 제가 그것을 해 낸다면...“ 나는 씨익, 상냥하게 웃었다. “저희 3반에 책정되는 학급 예산비를, 제가 바라는 대로 정하게 해 주십시오.” “...그건 무리야.” 부회장이 나를 따라 웃으면서 단호히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학생회가 없어지는 편이 더 나으신가요?” “...한도를 정해. 만약 네가 무리한 요구를 해서, 그 일로 학생회가 없어진다면, 너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유가 성립되지 않잖아?” 부회장의 논리 정연한 말에, 공주님이 놀란 얼굴로 내 옆에 달라붙었다. 나는 팔을 잡고 늘어지는 공주님을 옆으로 밀어내보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부회장을 바라보았다. “물론,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것보다 우선, 이 일을 해결하는 데 드는 비용은...물론 학생회에서 부담해주겠죠?“ 부회장은 나를 꼼꼼이 살펴 본 후,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있는 건가?” 나는 그 말에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 이 말이, 내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하는지를 묻는 것인지, 아니면 이 일을 성공시킬 자신이 있냐고 묻는 것인지 잘 알 수가 없다. “...글쎄요.” 나는 결국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며 씨익 미소지었다. 알아서 생각해, 라는 배짱을 튕긴 셈이지만, 그것이 부회장에게는 그리 나쁘지 않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부회장은 나를 향해 공모자의 미소를 지어 보인 후, 놀란 얼굴로 나와 부회장을 번갈아 보고 있는 회장을 끌고 사라져 버렸다. “...은성아?” 우물거리며 나를 부르는 공주님을, 나는 상냥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아직, 아까 이 깜찍한 녀석이 지껄였던 말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왜?” “....어떻게 할 거야? 정말, 만주 벌판을 물 먹일, 굉장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거야?“ 그렇게 물으며, 천진난만하게 눈을 반짝이는 공주님을, 나는 따듯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일단...” “응, 일단 뭐? 내가 도울 일은 없을까?“ 물론, 공주님이 나를 도와준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나는 잘 테니, 너는 음악 숙제를 걷어 줘.” 공주님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24- “...소문은 들었어.” 그렇게 말하며 한숨부터 내쉬는 영훈을, 나는 젓가락을 입에 문 채로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엉? (뭐어?)” 부정확한 발음으로 우물거리며 물어보자, 민섭이 고뇌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학생회와 만주벌판 사건 말이야.” 그 말에 도연이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나를 바라본 도연의 얼굴은, 참으로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너랑 있으면... 그래, 이번에 시킬 일은 또 뭐냐?“ “밥이나 먹어.” 이것들이 미쳤나, 하는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하자, 영훈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네가 하는 일에 뒷짐지고 구경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결국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게 될 텐데, 그렇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툭 까놓고 말하는 게 낫지. 자, 어떤 도움이 필요해?“ 민섭이 그 옆에서 냉큼 끼어들어서 보충 설명을 하듯 말을 덧붙였다. “지금 전교에 소문이 쫙 퍼졌어. 학생회 대 만주 벌판의 싸움. 이 내기에서 학생회가 지면 학생회 간판을 내리고, 또 네가 방송부에 들기로 했다며?“ ...아니, 이것들이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이렇게 시끄러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는데, 옆에서 공주님이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괜찮아?” 지성이 등을 토닥거리자, 공주님은 쿨럭거리면서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으, 응.” 그러면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무언가 수상쩍어, 나는 공주님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공주님.” “...응?” 평소라면 이 쯤에서, 내 이름은 그게 아니라니까~! 라는 식의 외침이나, 또는 매섭게 노려보는 눈빛이 날라와야 하는데, 지금의 공주님은 첫날밤 옷고름을 풀기 전의 새색시만큼이나 다소곳하고 얌전했다. “...불어.” 내 말에, 공주님의 얼굴이 사색이 되기 시작했다. “그, 그게...내가 말하려고 해서 그런게 아니라...나는 그냥, 너를 도와줄 생각에서 아이들에게 협조를 구하려고 한 거였어. 그런데 어쩌다가 말이 잘못되서...” 횡설수설 거리는 공주님의 말을 가만히 곱씹어본 후, 나는 묵묵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 뭐야, 별 것 아니었구만. 괜히 시간만 낭비했다. “저, 저기...은성아, 화났어?” 옆에서 조심스럽게 묻는 공주님에게 입을 우물거리면서 고개를 가로젓자, 공주님이 죄인마냥 고개를 숙였다. “...어? 아니야?”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도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영훈과 민섭, 그리고 도연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녀석들이 굳이 도와준다는데, 내가 거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래, 무보수로 도와준다고? 뭐, 솔직히 너희들에게 이렇게 도움을 받는 것이 미안하긴 하다만, 너희들이 굳. 이. 도와주고 싶다는데야, 어쩔 수 없지.“ “...야...” 영훈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나를 부르더니 곧이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곧이어 민섭이, 영훈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러게 먼저 도와주고 난 후에, 생색내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했잖아.” 라고 타박하는 것이 들렸다. ...하여간 쓸데없는 데 열심인 놈들이었다. -D-day 10일 전- “야, 이렇게 잠만 자고 있으면 어떻게 해? 지금, 2학년 9반은 맹훈련에 들어갔다고~!“ 도연이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맹훈련이라... 나는 멍한 눈길로 허공을 한 번 바라본 후, 다시 잠을 자... ...려고 시도했지만, 다른 아이들에 의해서 억지로 깨워졌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거야?” 영훈이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옆에서 공주님이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바라본다. 그나마 가만히 있는 건 민섭과 지성인데, 지성은 해탈한 듯한 얼굴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지금 지성이...꼭 미친 사람 같다. “계획...?” 나른한 목소리로 되묻자, 도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뭐, 서~프라이즈~! 한 계획 말이야.” 서프라이즈한 계획이고 뭐고, 일단은.. “...일단...” “응, 일단?” 공주님이 얼굴을 바짝 대고 묻는다. 나는 눈을 반쯤 감으며 대꾸했다.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일단 잠을...” “...야~!” -D-day 8일 전- “정말 어떻게 할 거야?” 운동회를 8일 남긴 오늘, 공주님은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나른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글쎄...” 어정쩡한 대답에 광분하는 공주님을, 지성이 뒤에서 잡아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못본 척, 그대로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아까부터 주머니 속에서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이 신경쓰여 그대로 핸드폰을 가방 속에 집어넣자 비로서 안정이 되는 느낌이다.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다시금 잠에 빠져 들었다. -D-day 7일 전- 한숨 자고 일어나보니, 옆에서 공주님이 무언가를 부시럭거리고 있었다. 공주님이 무엇을 하는지 슬쩍 바라보니. 공주님은 ‘은성이와 방송부에서 하고 싶은 일’ 이라는 주제 아래에 무언가를 빼곡하게 적고 있었다. ...이 놈이, 지금 뭘 하나 싶어서,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은성아, 일어났어?” 공주님이 눈을 깜박거리며 화들짝 놀란 얼굴로 책상을 온 몸으로 가렸다. ...지금 가려봤자, 이미 나는 볼 것 다 본 상태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어 준 후에, 느긋한 걸음걸이로 교실을 나섰다. 뒤에서 공주님이 나를 따라와서 의심쩍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설마 화장실 가는 거야? 아니면, 운동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계획이라도 실행하러 가는 거야?“ 나는 대답대신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자꾸 주위에서 계획, 계획, 하고 시끄럽게 구는데, 이런 것에 왜 계획이 필요한지 잘 모르겠다. 이건, 나라와 나라 간의 전쟁도 아니고, 하다 못해 정치판의 파벌 싸움도 아닌, 단순한 운동회일 뿐이다. 운동회 사이에, 제자와 선생 간의 내기가 끼여서 모양새가 조금 이상해지긴 했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냥 되는대로 하다가 우승하면 좋은 거고, 못하면... ...학생회가 해체되는 거지, 뭐. 나는 되도록 으슥한 곳,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공주님이 불안한 얼굴로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야, 너 왜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 게다가 여기는 칠성파 애들이 많이 있는 곳인데.“ ...칠성 사이다를 좋아해서 칠성파인가. 나는 그들의 창의력에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이름 한 번 강렬하다. 공주님이 말하는 소위 칠성파라는 분들은, 곧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곳으로 걸어가자,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형님들이 나를 바라본다. “엇, 너는?!” 그 중에 한 명이 벌떡 일어나 나를 가리켰다. ...역시, 내 생각이 맞나 보다. 나는 그 사람을 향해 우호적인 미소를 지었다. “안녕하세요?” 예의바른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후다닥 일어나 자기들끼리 뭉쳐 서서는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 어디론가 뛰어가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을 이끌고 온다. ...거 참, 내 얼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건가 싶어서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보는데, 공주님이 등 뒤에서 내 옆구리를 거세게 찌르기 시작했다. ...이 놈은, 왜 따라와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정말 모르겠다. 나는 공주님을 피해 옆으로 비껴 서서 칠성파 분들을 바라보았다. “...뭐야?” 그 중 한 명이 침을 탁, 뱉으며 나에게 용건을 물었다. 나는 그 사람을 향해 따뜻하고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이미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내 주위 녀석들의 말로 추측해 보건대, 이미 내기 사건은 전교에 소문이 다 퍼진 것으로 보인다. 그것에 칠성파 라고 해서 예외가 될 리는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못 도와줘.” 다른 사람이 껄렁한 자세로 대꾸했다. 역시, 척이면 척,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두 알고있는 듯한 모습이다. “...흐음, 하지만, 저에게 빚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태연하게 말을 꺼낸 후에,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사실, 내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서 칠성파라는 이들을 찾아온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학기 초에 우리 반에 찾아와 패싸움을 벌이고, 나중에 교무실로 불려가 사이좋게 청소를 한 후에, 왜인지 내 주머니 속에 음료수와 과자를 넣어 준 선배를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다. 본래,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듣는 편이다. 나는 아직까지 작은 형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왕 국어 선생님께 빌붙어 살기로 한 마당에, 내게 빚이라도 진 것 마냥, 뜬금없이 음료수와 과자를 준 사람을 잊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젠가는 요긴하게 써 먹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런 사건이 터져버린 것이다. 뭐, 그 때 그 선배들이 선량한 학생들에게서 삥을 뜯는 분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따라서 음침한 곳으로만 걷다 보면 그 선배들을 만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다. 눈앞의 사람들이, 정말로 내게 빚을 졌느냐 하는 것. 내 기억 속에서는, 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 준 기억이 하나도 없지만, 또 모를 일이다. 내가 길을 가다가 저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기라도 했는지, 누가 알겠는가. 어찌되었든, 눈 앞의 사람들이 “빚? 무슨 빚? 저 놈이 뭔 헛소리야?” 라는 식으로 나오면, 공주님을 잡고 튀어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칠성파라는 사람들은 고민하는 눈치였다. “...야, 그 때 그게 다 누구 때문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억울하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자, 다수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나를 원망의 눈길로 쳐다본다. 잘 모르겠다만, 한 가지는 알겠다. “그럼, 저 때문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순수하게?” 무슨 일인지 기억나지도 않고, 또 어떤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일단 오리발을 뻗고 보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뻗대면 지들이 어쩔 거야, 하는 심정이었는데, 칠성파 아이들은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 씹. 그러니까 내가 그 때 저 자식 도움 받는 것 찜찜하다고 그랬잖아~!” 한 명이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뭐, 절규하는 폼이 안 되 보이긴 하다만, 어찌되었든 상황은 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 명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엇을 원하는 거지? 우리가 어쩌길 원해? 미리 말해두지만...우리들은 여기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걸리면, 너네같은 범생이와는 달라서 전학이나 자퇴 당할지도 모른단 말이야.“ 괴로움이 구구절절 묻어나는 얼굴로 말하는 그에게, 나는 자비로운 미소를 지었다. “설마요. 이상한 부탁을 드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터벅터벅 교실로 걸어 돌아가면서, 공주님은 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도 나를 버려두고 도망가지 않은 것이 기특해, 친절하게 물어보자, 공주님은 몸을 움찔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가끔씩...” 그래, 가끔씩 뭐?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진짜 궁금해.” 공주님은 나를 외계인 보듯이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이래서, 사람에게 잘 해 줘봤자 소용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인가 보다. 이 녀석, 기껏 입 아프게 물어봐 줬더니, 뭐가 어쩌고 저째?! “...뭐?” 도연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야, 그 녀석들과 지금도 가끔 연락하기는 하지만... ...그, 그건 범죄가 아닐까, 싶은데...“ 나를 간절한 눈으로 바라보는 도연을 향해, 나는 씨익 미소지었다. “그래서, 안 할 거야?” 도연은 낙심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추욱 늘어진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하면 되잖아. 넌 진짜 나쁜 놈이야.”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한 적이 없다. 어찌되었든 우울한 얼굴로 하면 될 것 아니야, 하고 중얼거리는 도연이 기특해, 나는 도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25- -D-day 5일 전- “...여기.” 쉬는 시간을 틈타, 은밀하게 나에게 서류 봉투 속에 넣어진 종이뭉치를 건네며, 칠성파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내게 눈을 부릅떴다. “이것으로, 저번에 빚진 것은 모두 없어진 거겠지?” “...네에?!” 나는 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는 얼굴로 쳐다보자, 내 앞에 서 있던 그 사람 역시 기가 막힌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나 역시 황당하다. 내 기억을 아무리 뒤져봐도, 나는 이 일로 빚은 없어지고 모든 것이 쌤쌤, 뭐, 이런 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저, 나는 ‘제게 빚이 있지 않나요?’ 하고 질문을 던진 후에, 소소한 부탁 한 가지를 칠성파에 했을 뿐이다.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자, 칠성파에서 나온 그 사람은, 눈물을 흩뿌리며 나를 노려보다가 사라졌다. 덤으로, 그 사람에게 나쁜 놈~! 이라는 욕까지 얻어먹었다. ...뭐, 그래도 이렇게 내 부탁을 잘 들어준 것을 보니 고맙기는 하다. 나는 두툼한 종이들을 바라보며 씨익 미소지었다. 교무실로 올라가자, 선생님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모두들 내기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신 건지, 다들 호기심이 가득 찬 눈빛을 하고 계셨다. 나는 일단 물리 선생님께 다가갔다. 선생님께 인사를 하자, 선생님은 동정심 가득한 눈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애시당초 우리 사진부에 들어오라고 했잖냐. 에휴, 불쌍한 녀석...“ 왠지, 벌써부터 내가 방송부에 들어가기로 확정된 듯한 분위기다. 질 경우, 내가 방송부에 들어가기로 약속한 기억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데... ...아무래도 교실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 공주님을 족쳐 봐야 할 것만 같다. 나는 물리 선생님을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는데요.” “그래, 무슨 일인데?” 물리 선생님은 어서 말을 하라고 나를 연신 재촉하셨다. 내가 무슨 말을 꺼내도 다 들어주실 것 같은 표정이다. 나는 표정을 잘 조절하면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실은, 제가 요즘 사진에 관심이 많아서요. ...저, 죄송하지만 사진부 부장 선배를 따로 만날 수는 없을까요? 일주일 동안만 사진부 부장 선배님에게 사진에 관해 여러 가지로 배우고 싶은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물리 선생님은 가슴을 탕탕 치면서 자신만 믿으라고 말씀하셨다. 사진부 부장 선배를 오늘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우리 반으로 보내겠다며, 앞으로 일주일간 선배를 마음껏 부려먹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덤으로 해 주셨다. 참, 고마우신 선생님이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 물리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이번에는, 국어 선생님께 다가갔다. 국어 선생님은 아까부터 나를 보고 엉덩이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초조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국어 선생님께 작은 목소리로 “저, 잠시 말씀드릴 일이 있는데요.” 하고 말하자, 두 말 할 것도 없이 국어 선생님은 그대로 내 손목을 잡고 교무실을 나오셨다.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복도 끝에 서서 국어 선생님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니, 대체... ...방송부라니, 그런 곳에 들어간다고 약속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국어 선생님은 억눌린 음성으로 화가 난 듯이 말했다. ...여기서 이 선생님이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하는 생각에 나는 일단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기운없는 내 모습에, 국어 선생님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아, 아니...너를 탓하는 게 아니고, 나는 그냥... ...미, 미안해. 그러니까, 나는...“ 이 쯤에서 용건을 꺼내는 게 좋겠지, 싶어서 나는 고개를 들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도와줄 일은 없어? 뭐든지 말만 해 봐~!” ...역시, 이래서 빽이란게 있어야 하는 거다. 나는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꺼내 선생님께 내밀었다. “저, 선생님...” “...응? 이건 뭐...야?” 국어 선생님이 떨리는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면서 뭔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게...아무래도 착각을 하시는 것 같아, 나는 수줍게 말을 덧붙였다. “이 걸 2학년 9반에...김 경호 선배님께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실은, 전부터 그 선배님께 전해 드리고 싶었는데, 이런 일이 터져서... ...제가 직접 드리면 안 받으실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선생님이 전해 주셨으면 해서요. 전해 주실 때, 제 이름은 비밀로 해 주세요. 그냥, 선배를 동경하는 사람이 전해 달라고 했다고 말하는 건... 안 될까요?“ 선생님은 뚫어져라 그 상자를 노려보았다. 선생님의 눈에는 언뜻 보기에도 강한 분노가 어려 있어서, 나는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양심이 찔려왔다. 설마, 눈치 채신 걸까? 역시, 이건 너무 고전적인 수법인가? 뭐, 사실 김 경호가 누구인지 내가 알 리가 없다. 다만 칠성파 분들이 성심 성의껏 조사해서 건네준 자료에 의하면, 김 경호라는 선배는 농구부의 에이스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국어 선생님을 통해 전달하려는 이 상자에는 ‘힘내세요.’ 라는 단정한 글씨가 씌여진 분홍색 카드가 들어 있다. 바삭한 쿠키와 함께. 그 쿠키의 맛은 내가 보장할 수도 있다. 다름 아닌, 우리 아버지가 직접 구워 주신 거니까. 다만 설사약이 과량 들어간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이 쿠키를 구워주시면서, 아버지가 연신 나를 향해, “학교에서 힘든 일이라도 있니?” 하고 물으시던 게 갑자기 생각이 난다. 사실 내가 직접 이 상자를 김 경호라는 선배에게 전해 준다면...그 선배가 바보가 아닌 이상 쿠키를 받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 선배가 나에게 이 상자를 받고 만약 설사 증세로 병원에라도 실려간다면... ...만주 벌판이 바보가 아닌 이상, 나부터 족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상자를 준 사람이 이사장의 조카인 국어 선생님이라면...? 감히 국어 선생님께 뭐라고 할 사람은, 이 학교에는 없었다. 국어 선생님은 내게 빼앗듯이 상자를 받아 들었다. “...이것만 전해 주면 되는 거지?” 그렇게 말씀하시고 성큼성큼 걸어가시는 뒷 모습이... 어쩌면 내 조잡한 음모를 눈치채신 것도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자신에게는 아무런 선물도 주지 않아서 화가 나신 것도 같다. 조만가 선생님께 감사의 표시로 음료수라도 하나 사 드려야지, 하고 나는 교실로 돌아왔다. “...이, 이걸 정말 다 해야 돼?” 공주님이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 나는 이미, 내가 방송부에 들어간다는 헛소문이 퍼진 이후로, 공주님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공주님은, 헛소문을 퍼뜨리는 것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사실, 헛소문을 그 정도로 퍼뜨리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너만 믿을게, 하고 어깨를 토닥거려주자, 훌쩍거리며 종이를 들고 자리로 들어간다. 뭐, 남은 건, 기다리는 일이려나. 느긋하게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핸드폰에 빼곡히 들어찬 문자 메시지들이 보였다. [밥은 잘 먹어? 나는 지금 밥 먹고 있는 중이야.] [건강하지?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해.]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마. 요즘 이상한 일들이 많으니까.] [...잘 자.] 많은 문자 메시지들의 발신자는, 모두 한 사람으로 되어 있었다. [이훈] 나는 문자 메시지들을 하나하나 다 읽어보고는, 결국 작은 웃음을 지으며 짧은 답문을 보냈다. [잘 지내.] 보내고 나니, 뭔가가 허전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뭐, 이훈 녀석도 내 성격을 잘 아니까. ...하다가, 결국 다시 핸드폰을 열어 다른 답문을 하나 더 보냈다. [건강해.] 핸드폰을 탁, 하고 닫는데, 교실 문이 열리더니, 덩치 큰 남학생 한 명이 들어와 우리 반 아이 한 명을 붙잡고 무언가를 묻더니, 나에게 곧장 다가온다. “네가 3반 반장이야? 그 유명한?” 유명한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3반 반장인 것은 맞다. 나는 나를 흥미롭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그 학생에게 확인차 질문을 던졌다. “사진부 부장 선배십니까?” 학생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게 거만하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내게 배우고 싶다는 게 뭐지?” 그에 대해서는, 누구나 엿들을 수 있는 교실이 아니라, 으슥한 곳으로 가서 말을 하는 게 낫다 싶어, 나는 선배님을 끌고 교실을 나와 아까처럼 복도 끝으로 걸어갔다. “...뭐야?” 약간 불안한 얼굴로 나를 보는 사진부장 선배에게, 나는 우선 친절한 미소부터 지었다. ...지금부터 협상 시작이다. “...정말?” “물론이죠. 뭐, 서로서로 좋은 일들이 아니겠어요?“ 하하, 하고 정겹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사진부장 선배와 나는 사이좋게 미소를 주고받았다. 이로써, 모든 일들이 잘 되었다. 날아갈 듯 걸어가는 부장 선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데, 누군가가 음침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수상해.” ...수상한 건, 조용히 다가와 나를 노려보고 있는 영훈 녀석이 더 수상했다. 한순간 정말로 깜짝 놀라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는데, 영훈이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야?” “꾸미다니?”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얼굴로 영훈을 바라보았지만... ...영훈은 다른 녀석들처럼 쉽게 넘어가주지 않았다. “내가 너를 모를 것 같냐? 네 녀석 성격을 뻔히 다 아는데... ...수상해...“ 음침하게 중얼거리는 영훈의 눈길이 점점 더 가늘어진다. 이대로라면, 내가 하는 일들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지만... ...나는 켕기는 것 하나 없이 떳떳한 몸이다. 나는 때마침 친 수업 시작 종을 핑계삼아 영훈에게서 벗어나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리지? 점심시간이다. 영훈은 아직도 의심을 버리지 못한 듯, 밥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를 번갈아 보았다. 울상을 짓고 있는 공주님과, 낯빚이 하얀 도연을 유심히 보더니... ...영훈이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는 영훈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밥 안 먹어?” 조용히 물어보자, 민섭이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그럼 지금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게 생겼냐? 네가 방송부에 들어간다는 말이 쫙 퍼져있는데...!!“ 나는 민섭을 따라 젓가락을 내려놓고 도시락을 정리했다. 어차피 내 밥은 벌써 다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말인데...민섭아,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민섭에게 슬쩍 말을 꺼내는데, 도움이라는 말에 공주님과 도연이 불쑥 경기를 일으킨다. 동시에 영훈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내가 도와줄 일이라면 얼마든지~!” 주먹까지 불끈 쥔 민섭을, 나는 따사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도시락통을 들어 모서리로 민섭의 뒤통수를 세게 내려치자, 민섭이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설마 급소를 맞았나 싶어, 걱정스레 민섭을 바라보는데, 주위가 조용하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영훈이 손을 가슴에 얹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정하고...의심해서 미안해. 그러니까, 은성아, 제발 진정을...!!” 이 놈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지만, 어쩐지 대충 짐작이 간다. 하여간, 일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들, 하고 가볍게 혀를 차면서, 나는 민섭의 몸을 잡아끌었다. 역시, 내가 들기에는 상당히 무겁다. -26- 나는 도연을 향해 씨익 미소지었다. “...자, 우리의 친구 민섭이를 어서 데리고 양호실로 가야 하지 않겠니, 도연아?” 도연이 잽싸게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민섭을 도연의 어깨에 걸치고 양호실로 뛰어가는데, 도중에 민섭이 가느다란 신음소리를 흘리며 눈을 떴다. “민섭아 괜찮아?” 민섭을 향해 걱정스럽게 묻자, 내 주위에서 같이 가고 있던 아이들이 저만큼 뒤로 떨어진다. 나는 민섭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런데, 내 손에 묻어나오는 이건... ...피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 전에 얼른 주먹을 쥐어 핏자국을 감춘 후, 나는 애써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제 곧 양호실로 갈 거야. 뭐? 민섭아, 그래, 아리따우신 양호 선생님을 얼른 뵙고 싶다고? 알았어, 얼른 가자.“ 민섭이 조그맣게 병원...하고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설마 환청이겠지, 하고 나는 애써 민섭을 외면했다. 주위에서 다른 아이들이 나를 미친 놈 보듯이 바라본다. 우리 학교 양호 선생님, 그녀가 누구인가. 이사장 조카 며느리의 동생이라는 든든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는 선생님으로, 일본 패션에 심취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최첨단 패션으로 치장하고 다니는 그녀를... 학생들은 남몰래 ‘미친년 꽃다발’ 이라고 불렀다. 성격 역시 만만치 않아서, 맹장에 걸린 학생이 양호실로 기어갔을 때에도, 새로 시판되는 향수를 사야 한다며 학생을 내쫓고 양호실 문을 걸어잠갔던 분이다. 결국 맹장에 걸렸던 불쌍한 학생은 구급차에 실려갔다던가... ...결국, 우리 학교 학생들은 웬만한 상처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참았고, 커다란 상처일 경우에는 자진해서 병원에 갔다. 다른 사람들은 양호 선생님에 대해 많은 험담을 하곤 하지만, 양호 선생님은, 이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독립심과 인내심을 키워주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양호실 문을 노크한 후에 열자, 히스테릭한 고함 소리가 터져나왔다. “어머, 누구야~! 지금 밥 먹고 있는데!” 배달 온 것이 분명한 초밥 도시락을 앞에 놓고 있는 양호 선생님을 보자, 새삼 빈부 격차에 대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폭탄이라도 맞은 듯 뽀글거리는 머리에 노란색의 커다란 꽃 한 송이를 꽂고 있는 양호 선생님을 향해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선생님, 지금 제 친구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훌쩍거리자, 선생님의 눈이 커다랗게 떠지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달려온다. “어머, 애, 진정하고... 그래, 그래, 선생님이 다 알아서 해 줄게.“ ...봐라, 우리 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이 많지만, 그래도 선생님들도 이렇게 한 분 한 분 직접 다가가면 나름대로 착하신 분들이 많다. 선생님은 나를 품에 안고는 “어머, 애가...” 하면서 연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나보다는 아픈 환자를 돌봐야 하는 게 아닐지... ....하고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내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이 녀석은 괜찮아요. 그보다는...“ 영훈이 차가운 얼굴로 말하면서 민섭을 가리켰다. ...영훈이 녀석, 왜인지 화가 난 것처럼 입가에 작은 미소를 매달고 있다. 영훈의 심상치 않은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양호 선생님은, 영훈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머, 어머, 어쩜...” ...설마, 변태에게 인기 폭발인 영훈의 매력이 이런 곳에서 발휘되는가 싶어서, 나는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사람은 영훈이 아닌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 사이 민섭이 약한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여긴...?” 기억상실증 환자처럼 어벙한 대사를 내뱉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민섭을 향해, 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소리쳤다. “민섭아 이제 정신이 들어? 머리는?“ “...응?” 민섭은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머리를 흔들며 나를 보다가... ...양호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요?” 일단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민섭의 모습에, 양호 선생님은 바람처럼 달려가 민섭의 옆에 붙어섰다. “그래? 어디가 아픈데? 이런, 환자를 이렇게 두면 쓰나. 자, 어서 침대에 누워, 애.“ 민섭은, 이태리에서 직수입되었다는 전설의 양호실 침대에 최초로 누워보는 영광을 걸머쥐었다. 민섭은 아직까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는데, 나를 향해 입을 뻐끔거리며 ‘무슨 일이야?’ 하고 물어왔다. 너는 걱정 마, 내가 알아서 다 해 줄게. “어머, 이런...피가 나잖아? 어디 다른 곳 아픈 데는 없고? 그래? 어떤 나쁜 놈들이 내 순진한 학생을 이렇게 상처입힌 거야?“ ...양호 선생님의 어법이 조금 이상한 것도 같다. 보통, 내 순진한..이 아니라 우리 순진한...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이제 와서 양호 선생님을 향해 올바른 국어 사용 강좌를 벌일 생각은 없다. 나는 애처로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실은, 2학년 9반 선배들이...” 말을 잇지 못하고, 흐윽, 하면서 고개를 숙이자, 양호 선생님이 침대에 걸터앉아 민섭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분개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 아니 뭐 그런 싹퉁바가지 없는 놈들이...!!” 민섭은 양호 선생님의 무릎까지 베고 누웠으면서 아직까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우리를 간절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민섭아, 나를 용서해 줘. 그저, 칠성파의 보고서에 적힌, 양호 선생님의 이상형과 똑같은 모습의 너 자신을 원망해라. “아뇨, 선배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닐거예요. 그냥... ...저희들이 학생회에 동조해서, 선배들 반이 이번 운동회에서 우승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화가 나서... ...또, 9반 담임 선생님이 꼭 우승을 해야 한다고 자꾸 그러시니까 아마 선배들도 스트레스가 쌓여서...“ 양호 선생님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내가 애시당초 그 인간이 일 칠 줄 알았어. 흥, 교사 자격증도 없는 주제에 교사는 무슨...!! 9반 놈들, 내가 가만 둘 것 같아?!“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2학년 9반을 뒤집어 놀 것 같던 양호 선생님이 민섭의 신음소리에 호들갑을 떨면서 민섭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민섭은 이제야 대충 사정을 꿰마춘 듯, 양호 선생님께, 선배님들도 실은 그러고 싶지 않았을 거라는 둥, 모든 것은 자기 잘못이라는 둥 말을 주절거리며, 만주 벌판에 대한 악감정들을 양호 선생님께 심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간간히 부드럽게 웃는 민섭을... ...양호 선생님은 녹아날 듯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민섭은 그 사이사이 우리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 이만 나가달라고? 다른 놈들을 채근해서 양호실을 나가는데, 갑자기 민섭이 벌떡 일어났다. “서, 선생님, 저도 이만 수업에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어머, 애도...괜찮아, 이렇게 아픈데 수업은 무슨. 내가 너희 담임 선생님께 양호실 입실증 끊어서 보내줄게, 그냥 누워 있어.“ 민섭이네 담임 선생님이 양호실 입실증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믿을지 의문이 든다. 무엇보다 우리 학교에서 그 동안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양호실 입실증이라는 것을 해독할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련지 모르겠다.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게다가 이번 수업은 꼭 들어야 하는 거라서...!” 민섭이 경직된 목소리로 말하면서 우리를 따라 양호실을 뛰쳐나왔다. 뒤에서 양호 선생님은 섭섭한 얼굴로 연신 “언제든지 꼭 다시 찾아와라.” 하고 말을 건넸다. 교실로 돌아가면서, 모두들 말이 없었다. 민섭은 어깨를 가늘게 떨면서 나에게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너...설마, 나를 팔아먹는 건...” 나는 민섭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 부탁이야. 넌,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다.“ 양호 선생님의 반응을 보건대, 아마도 확실히 이 일을 해낼 적임자는 민섭밖에 없다. 내 말에 민섭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넌 정말 나쁜 놈이야.” 그 날, 내가 국어 선생님의 손에 들려보낸 쿠키상자의 효과는 엉뚱하게 나타났다. 2학년 9반 김경호 선배님은, 왜인지 국어 선생님의 손에 신나게 매타작을 당했다고 한다. 게다가 근신까지 명령받아서, 이번 운동회는 무리라던데... ...뭐, 나로서야 좋은 일이 좋은 일이라고, 어쨌든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남몰래, 내 계획을 눈치챈 국어 선생님이 제자의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막고자, 자신이 직접 김 경호의 이번 운동회 출정을 막은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국어 선생님께 인사라도 드릴까 싶어 찾아왔는데... ...국어 선생님은 그 날, 심한 탈수 증세를 보여 구급차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긴 하지만...설마, 내 생각이 맞지는 않겠지, 싶어 나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앞으로 운동회가 끝날 때까지 매일 양호실에 가서 양호 선생님의 비위를 맞춰 줄 것을 부탁받은 민섭은 나를 끝까지 애절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미안하다, 민섭아. 나는 이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저, 파란만장한 이 운동회가 어서 빨리 끝나기를 빌 수밖에는 없다. -D-day 4일 전- 하루 사이에 사진부 부장은 많은 사진을 찍어왔다. 일단 나에게 건네준 사진들을 받아 들자, 사진부 부장은 나를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 대가는?” 조그맣게 속삭이는 사진부 부장을 향해, 나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회장과 부회장을 찾아 협조를 부탁해 놓았으니, 사진부 부장은 이대로 그들을 찾아가 맘껏 사진을 찍기만 하면 된다. 사진부 부장이 원하는 대로 맘껏 사진을 찍게 해 달라는 내 말에, 회장과 부회장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지만... ...딱히 거절할 말은 없었는지 우거지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부 부장은 기쁜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고마워~! 사실 그 녀석들 사진을 예전부터 찍고 싶었는데, 워낙 방어가 철저해서 못 찍었거든. 정말 고마워. 나중에 사진을 팔아서 이익이 남으면 네게도 한 몫 떼어줄게. 저, 그런데, 네 친구들은 어떻게...“ “...물론, 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운동회가 끝나기 전까지 이런 식으로 계속 협조를 해 주신다면, 언제든 그 녀석들을 상대로 마음대로 사진을 찍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사진부 부장은 감격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을 흔들며 교실을 나가는 부장을 잠시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내 손에 쥔 사진들을 흝어보았다. ...칠성파 사람들은 나름대로 뒷세계(...?)의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꽤나 상세한 정보들을 나에게 넘겨주었다. 그 정보들을 바탕으로 사진부 부장의 협조 아래 찍은 이 사진들... ...글쎄, 내게 얼마만큼의 협상의 여지를 안겨주게 될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사진들을 믿음직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 나도 도와줘야 하는 거야?” 지성이 겁먹은 눈으로 물었다. 나는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지성은 뒤로 한 걸음 주춤, 하고 물러나더니, 곧이어 절망적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저렇게 나를 바라보는지 정말 모르겠다. “자, 공주님은 다른 일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으니... 네가 우리 반 응원 연습을 확실하게 시켜주었으면 해.“ “그, 그거면 돼?” 지성이 기쁜 목소리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귀가 다 아플 지경이다. “물론, 응원상을 탈 정도로 연습을 시켜줬으면 줬겠어. 그리고, 다른 반의 반장들과 상의해서 1학년 모든 반들이 응원 연습을 잘 하도록 해 줬으면...” “그건 걱정 마. 나만 믿어.“ 지성이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내 손을 굳게 쥐고 씩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믿음직스럽다. 나는 지성을 향해 마주 웃어 보이며, 다음 일을 하기 위해 교실을 나섰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영훈이 불안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이 녀석들이 왜 자꾸 이렇게 이상한 표정들을 짓는지 정말 모를 일이다. “응.” 간단하게 대답하자, 영훈은 고뇌어린 얼굴로 한숨만 푹푹 내쉬면서 나를 따라 걸어갔다. 지금은 방과 후, 모두들 하교를 하느라 바빠서 교실안은 요란한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느긋하게 걸어, 우선 첫 번째 약속 지점으로 가 보았다. 아까, 2학년 9반이 운동회 연습을 위해 나간 틈을 타서, 교실 창문을 넘어 들어가, 책상 서랍 안에 사진과 간단한 장소를 써서 넣어두었던게 유용했던지, 약속 장소였던 운동장의 벤치 앞에서는 벌써 2학년 9반의...에, 그러니까...김 상훈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고 인사하자, 인사 따위는 필요없다는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선배는 억눌린 음성으로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선배의 손에 꾸깃꾸깃 구겨져서 들려진 사진에는 아주 예쁜 여학생이 선배와 같이 나란히 앉아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 촬영되어 있었다. 저 사진에 문제가 있다면, 선배네 집은 이성 교제를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하다는 것과, 그 예쁜 여학생이 선배네 옆집 사는 누나라는 것 외에는 없다. 사실 내가 선배에게 특별한 원한이 있어서 이런 사진을 가지고 유치하게 협박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선배에게 소소한 부탁을 드리고 싶었을 뿐이다. “...이미 알고 계실 텐데요?” 나는 상큼하게 웃으며 말을 하면서, 영훈의 등 뒤로 슬그머니 비켜 섰다. 혹시 이야기를 하다가 선배가 흥분할 경우, 영훈이 대신 방패막이 되 주겠지, 하는 얄팍한 계산 속 때문이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운동부인 선배의 분노에 찬 주먹을 그대로 얻어맞을 자신은 없다. 그래도, 영훈이 놈은, 몸도 튼실하고, 또 생긴 것에 안 맞게 싸움도 곧잘 한다. “...그건...” 선배는 절망적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잘 알고 있는 눈치다. 만주 벌판은, 지금 운동회 우승에 목숨을 걸은 것처럼 모든 열정을 운동회에 쏟고 있다. 이 상태에서 9반이 우승을 하지 못할 경우... ...그 결과는 상상하기 무서울 정도로 참혹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나 역시 나름대로 절박하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나는 선배님께 동정심을 가지지 않으려 애쓰며 말을 시작했다. 선배님께, 운동회 때 적당히 몸을 둔하게 만들어, 9반이 우승을 하지 못하도록 부탁드리고, 나는 다음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영훈이 기가 차다는 듯 나를 불렀다. “...야, 너 이런 얍삽한 술수로 대체 몇 명이나 협박할 생각이야?”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해맑게 웃었다. “...그게...몇 명 안 돼. 오늘은 한 8명?” “...그럼 내일은 몇 명이라는 거야...” 영훈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하여간, 자식, 더럽게 말도 많았다. -27- -D-day 3일 전- 학교 전체의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그 원인은, 지금 학교 전체를 휩쓸고 있는 하나의 소문 때문이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학교에 안 나오신 국어 선생님의 반인 2학년 7반 때문이다. 듣기로 국어 선생님은 아직도 집에서 요양 중이라고 하시는데...어디가 그렇게 아프신지 제자된 도리로서 정말 걱정이 된다. 2학년 7반은, 담임 선생님의 부재로 인해 기댈 곳 없이 휘청거리는...것은 아니었지만, 교내에 떠도는 악성적인 헛소문들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 헛소문들은, 진실을 기반에 둔, 설득력 있는 소문들로, 상당히 개인적이고 또한 악의적이었다. 게다가 헛소문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곳은, 남몰래 속삭여지는 바에 따르면 2학년 9반...이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를 꺾기 위해, 라는 명목으로 2학년 7반을 모함하는 2학년 9반의 음모, 라는 말들이 아이들 사이에서 떠도는 것을 확인한 나는, 며칠 사이 헛소문들을 조작하고 퍼뜨리느라 얼굴이 헬쓱해진 공주님을 대견스레 바라보았다. 역시, 시키니까 잘 한다. 공주님은 이런 방면으로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게 틀림없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도연이 피곤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그 놈들이랑 연락 됐어. 이야기도 잘 됐고. ...그래서, 언제 할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신중히 대답했다. “운동회 날 새벽으로 잡자.” 2학년 9반이 우승하지 못할 경우, 다음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여러 모로 꼽아본 결과, 다음의 강력한 우승 후보는 1학년 8반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나는 1학년 8반 반장을 남몰래 찾아갔다. “...그래서, 우리 반이 우승할 경우 우리 반에 주어지는 이익은 뭐지?” 1학년 8반 반장은 세파에 닳고 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뭐, 이런 애늙은이 같은 놈이 있나, 하고 잠시 생각을 했지만, 나 같아도 저런 질문을 할 것 같긴 하다. 나는 8반 반장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명예와 또한 상품, 상장...” “좇같은 소리 하네.” 8반 반장은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중얼거렸다. 말이 많이 거친 아이다. 나는 8반 반장의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8반 반장이 미친 놈 보듯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8반 반장의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면서, 상냥하게 웃었다. “돈이 필요한 거야? 난 또, 네가 다른 아이들에게서 돈을 많이 기부받아서 돈같은 것에는 부족함이 없는 줄 알았지?“ “...뭐?” 8반 반장이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노려봐도, 나에게는 증거라는 게 있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사진을 꺼내 8반 반장의 손에 건네주었다. “모범적이고 착실한 학생으로 알려진 네가...이렇데 다른 아이들과 다정한 삥뜯기 놀이를 즐겼다는 것을 너희 집에서 알면 어떻게 될까?” 조사한 바에 따르면 8반 반장의 아버님은 목사님이라고 들었다. 8반 반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8반 반장을 향해 다시 한 번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나는 너희 반이 운동회 우승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줬으면 좋겠는데...너는 어때?” ...그 날, 나는 방과 후에 운동장에서 운동회 연습에 매진하는 멋진 8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D-day 2일 전-- 오늘 복도에서 뛰어다녔다는 이유로, 2학년 9반의 선배님 한 분이 불쌍하게도 양호 선생님께 직통으로 걸렸다. 선배님은 양호 선생님께 머리를 쥐어박히며 귀를 잡힌 채 학생과로 끌려들어갔는데... ....잠시 후, 눈물을 흘리며 책상을 학생과로 옮기는 그 선배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교내에는, 양호 선생님께 걸린 그 선배가 근신 처분을 받았다는 소문이 퍼졌다. ...민섭이가 말로는 투덜댔지만, 그래도 맡은 바 임무는 잘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날, 방과후에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선배들을 찾아가, 다정한 설득 시간을 갖는 도중 영훈이 작은 발작을 일으켰다. 갑자기 내 등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한 것이다. “...나중에 내가 미워져도...절대로, 이런 짓은 하지 마라, 응?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정상적으로 화를 내, 알았지?“ ...웬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불쌍한 녀석, 이런 저런 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D-day 하루 전- 오늘, 드디어 2학년 7반이 폭발했다. 이렇게 폭발하게 되기까지는, 어제 내가 만났던 2학년 9반의 선배 중 한 명이 아주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9반의 선배 한 명이 7반 학생들에게 대 놓고 욕을 한 것이다. 물론, 욕을 한 9반의 선배가 7반 학생들을 정말로 미워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저 선배는 사진을 건네며 하는 나의 작은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 뿐이다. 어쨌든, 결과는 내가 바라는 만큼 나와서... ...2학년 7반의 선배님들은, 훌륭하게도 2학년 9반에 쳐들어가, 장렬히 패싸움을 벌임으로써 9반의 응원도구들을 모두 망가뜨려 놓았다. 듣기로는 며칠 전부터 주문 제작을 했다고 소문이 난 응원도구들이 모두 망가지자, 만주 벌판은 입에 거품을 물고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리 그래도 7반은 명색이 국어 선생님이 담당인 반이다. 이사장 조카인 국어 선생님이, 자기가 없는 새에 7반 아이들을 만주 벌판이 건드렸다고 들으면... ...분명 상당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결국 7반을 상대로 분을 풀지 못한 만주 벌판은...하루 종일 씩씩거리며 교내를 돌아다녔다. -D-day- 오늘은 그렇게도 기다리던 운동회 날이다. 날씨는 화창하고 맑았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웃음이... ...라기보다는 오늘의 우승자에 대한 노골적인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그 와중에도 2학년 9반은 조금 소란스러웠는데... ...오늘, 주전으로 내정되었던 몇몇 선배들이 아직까지 등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명 집에서 나오기는 했다는데, 아직까지 학교에 도착하지는 않은 선배들을 찾아 열심히 핸드폰으로 선배들의 부모님들과 통화하던 만주벌판이 화가 난 얼굴로 다른 선배들을 선수로 지명했다. ...사실, 지금 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그 선배들이, 만주벌판이 생각하는 것처럼 학교에 나오기 싫어서 안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저 주위에 가득 찬 양아치들을 뚫고 학교까지 걸어올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도연은 내 부탁을 훌륭하게 들어주었는데, 도연이 중학교 때 어울려다녔던 친구들은-지금은 학교를 자퇴한 상태라고 들었다.- 내가 말해주었던 골목에 서서 선배들이 학교를 가기 위해그 골목에 들어섰을 때... ....선배들을 포위하고 섰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 녀석들은 선배들을 때리거나, 시비를 건 것은 아니다. 그 정도까지 가면, 그건 범죄다. 그저, 그 양아치 녀석들은, 선배들을 둘러싸고 담배를 뻐금거리며 피우면서, 서로 욕설을 주고 밭았고, 그것만으로도 선배들은 학교에 오는 것을 포기하고 그 골목에 주저앉았다. ...어찌 되었든 주전 선수들이 몇 명 빠졌으니 조금은 괜찮은 것인가... 생각하고 옆을 바라보니, 말은 안 했지만 내 주위의 아이들도 모두 긴장한 얼굴이었다. 이 모든 사태에 관심 한 번 가지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은, 어떤 생각에 빠지신 듯 하늘만 바라보고 계시는 우리 담임 선생님 한 명 뿐이다. 운동회여서 일부러 나오신 건지, 오랜 만에 국어 선생님을 뵐 수 있었는데, 국어 선생님은 그 동안 얼마나 심하게 앓으셨는지 살이 쪽 빠진 초췌한 얼굴로 서 계셨다.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시는 국어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남몰래 감을 잡았다. 그랬다. 국어 선생님은 나의 비열한 음모에 대해서 모두 알고 계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시는 것은, 무언으로 내 계획을 눈감아주시겠다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국어 선생님을 바라보는데, 공주님이 뒤에서 내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은성이 네가 말한 대로 일단 준비는 다 해 놨는데...” 말끝을 흐리며 공주님은 뒤를 돌아보았다. 사실, 내가 세워놓았던 계획은 간단했다. 바로 총점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응원상에 대한 것이다. 오늘을 위해서, 다른 반 아이들까지 동원해서 응원 연습을 시켜왔던 것인데... ...일단 8반이 응원을 하다가 20분이 지나면, 그 때를 기점으로 옆에 앉은 다른 반 녀석들과 8반 아이들이 차례대로 슬그머니 자리를 바꾸는 것이다. 어차피 본부석에서는 응원하는 아이들이 자리를 바꾸던 말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본부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는 것은, 아이들의 응원 소리가 얼마나 큰가, 또 아이들이 흔들어대는 수술이 얼마나 화려한가, 하는 것들이다. 기운이 떨어지면 응원도 잘 못하는 법, 이렇게 계속해서 새로운 얼굴로 응원인원을 바꿔가면서 응원을 해, 8반이 응원상을 타게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다. ...뭐,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반 아이들의 적극적인 협조-이를테면 자신들의 반이 꼴찌를 해도 상관없다는-가 필요했지만, 다행히 모든 것이 좋게 해결이 되었다. 다른 반의 담임 선생님들은, 다행히도 착하신 양호 선생님께서 운동회 내내 책임지고 옆에 두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이제 남은 건... ...나는 국어 선생님께 슬그머니 다가갔다. 국어 선생님은 힘없는 얼굴로 한 구석에 혼자 떨어져 앉아 계셨는데, 나를 보고서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셨다. “선생님, 몸은 괜찮으세요?” 인사를 하고, 선생님의 안부를 묻자, 선생님은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셨다. “응, 그게...” “선생님이 안 계신동안...계속 뵙고 싶었어요.” 작은 목소리로 머뭇거리며 말하자, 국어 선생님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볼을 물들이고 수줍게 웃으시는데... ...괜히 봤다 싶으면서도, 왠지 그 모습이 귀엽게 보이는 건... ...내 눈이 잘못된 건지도 모르겠다. “...그, 그래?” 국어 선생님은 더듬거리며 말하면서 나를 재촉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서 다음 말을 해, 하고 말하는 듯한 국어 선생님을 향해, 나는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냈다. “저, 9반의 선배님...” 막, 말을 하려는데, 국어 선생님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9반?” 나는 뭔가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네, 9반의 선배님들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운동하시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멋지시고...그래서, 저 죄송하지만, 9반의 선배님들께 미리 우승을 축하하는 명목으로 이것을 드리고 싶은데요. 제가 주는 것이라고 말은 하지 마시고 그냥 선배님들께 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설사약을 탄 음료수 병을 내밀며 말하자, 국어 선생님은 입을 비죽 내밀고 내게 그것을 받아들었다. “...알았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이런 식으로라도 이기려고 하는 내 모습에 실망하신 것도 같아 나는 어쩐지 가슴이 아파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써 씁쓸한 마음을 지우려 노력하면서 내 자리로 돌아가는데, 국어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본부석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본부석 쪽에서 오늘의 심판을 맡으신 선생님들과 수군거리며 무언가를 말하는 국어 선생님을 의아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원래, 국어 선생님은 자신의 위치를 잘 자각하고 있어서, 다른 선생님들과 어울리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저렇게 자진해서 다른 선생님들과...? ...하지만 의아한 것도 잠시였다. 아무래도, 국어 선생님의 이상 행동은, 몸이 너무 아프셔서 그러셨던 것 같다. 잠시 후, 국어 선생님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호송되었는데, 들리는 말에 의하면 상한 음료수를 많이 마셔서 설사 증세가 도지신 것 같다고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아프셔서 목이 말라도 아무 물이나 드시면 안 되는데... 하고 혀를 차면서, 나는 열심히 응원을 하고 있는 8반의 응원석을 잠시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프셔서 9반의 선배님들께 내 음료수를 전해 줄 여력이 없으셨는지, 실망스럽게도 9반 선배님들 중 설사 증세를 보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엉뚱한 곳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아군이 생겼으니... “이 녀석, 방금 반칙했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 놈이, 지금 대들기까지?!” 심판을 맡은 선생님의 말씀에 9반의 선배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심판 선생님이 9반에 시비를 거는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는... “선생님, 지금 저 녀석들이 우리를 이렇게 때리면서 반칙을...!!” “아니, 이 놈들이 시합은 안 하고 어디서 거짓말을...?” 하는 식으로 9반 상대편의 노골적인 반칙마저 모른 척 무시하시는 것이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걸까, 이해가 잘 가지 않는데... 만주 벌판이 그 모습을 보고 입에 거품을 문다. “아니, 지금 무슨 편파적인 판정을 하는 겁니까?” 삿대질을 하며 뛰어가는 만주 벌판을 우리의 호프, 양호 선생님이 잽싸게 막아섰다. “네에? 어머,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예요?” “...네?” 학교 일에 통 관심이 없던 양호 선생님의 갑작스런 끼어듬에 만주 벌판은 놀란 얼굴로 눈만 깜박였다. “아니, 그러니까, 애들 얼굴이 이렇게 될 정도로 얻어맞으면 반칙이...” 횡설수설 말을 꺼내는데, 저래서야 양호 선생님을 이기기는 무리다. 아니나 다를까, 양호 선생님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빽 질렀다. “상대편 애들도 맞았잖아요? 그러니까 쌤쌤이죠~!” ...상대편도 맞았으니 쌤쌤일 수는 없다는 것을, 만주 벌판은 양호 선생님께 무척이나 설명하고 싶어했지만...결국 실패했다, 터벅터벅 걸어서 자기 반으로 돌아가는 만주 벌판의 뒷모습은, 굉장히 쓸쓸해 보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결국 운동회 우승의 영광은... ...1학년 8반에게 쥐어졌다. 온갖 종목의 우승과, 마지막 응원상까지 받은 8반 반장은 묵직한 상품과 상패들을 들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기 자리로 되돌아갔다. 힐끔 바라본 만주 벌판의 얼굴은, 이럴 수는 없다고 외치는 듯한 처참한 실의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운동회 꼴찌를 한 반은 운동장의 쓰레기를 줍고 교실로 들어가라는 방송 멘트와 함께 운동회는 마침내 끝이 났다. ...그리고, 운동회 꼴찌를 한 우리 반 반장인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8반 반장에게 다가갔다. 8반 반장은 손을 흔들며 다가가는 나를 경계하는 얼굴로 노려보았다. “...왜?”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 8반 반장의 어깨를 친한 척 두드리자 뒤로 움찔거리며 물러난다. 그런 8반 반장의 몸짓에, 섬세한 내 마음은 그만 심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우리 반이 운동장 청소를 해야 한다고 하는데...혹시 그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내 의도를 눈치챈 8반 반장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야 당연히 너희 반이 해야지, 무슨 소리야?” 씨알도 안 먹힌다는 얼굴로 서 있는 8반 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사진부 부장 선배가 나를 보고 달려왔다. “은성아, 고마워, 너 덕분에, 훌륭한 사진들을 많이 찍었다. 하하, 이제 내일 축제에서 매상 제일은 바로 우리 사진부일거야~!“ “힘내세요.” 나는 사진부 부장 선배를 향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뭐, 사진을 찍도록 영훈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만큼의 보람이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주었던 그 사진들은 어떻게 할 거야? 그거 협박하기에 딱 좋은 사진 아니냐?“ 내게 준 사진의 용도는 모르는 잘 사진부장 선배가 캬하하 웃으며 떠나갔다. 선배의 뒤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는데, 8반 반장이 무서운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야...” “응?” 해맑은 얼굴로 바라보자, 8반 반장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슬픈 어조로 말했다. “아니, 너희 반은 들어가서 쉬라고. 운동장 청소는 무슨... 우리 반이 청소 다 해 놓을게, 친구야.“ ...역시, 알고 보면 모두들 좋은 녀석이다. 나는 8반 반장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그래도 돼?” “...씹...” 잠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8반 반장이 갑자기 내 시선에 화들짝 놀라며 말을 덧붙였다. “하하, 아니, 그게... 맞아, 우리 반 상품도 너희가 가져가라. 너희 반 아이들이 얼마나 수고를 해 줬니, 친구야.“ ...이제 보니 마음 씀씀이도 곱다. 8반 아이들이 우리 반까지 날라다 준 상품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우울한 얼굴로 들어왔다. “허허, 물론 우리 반이 이기기를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 반이 전체 꼴찌라는 것은 조금 심하지 않나, 반장?“ 아무래도 우리 반이 꼴찌를 한 사실에 무척 실망을 하신 듯, 담임 선생님의 얼굴은 무척 어두웠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희가 이번 운동회에 꼴찌를 한 이유는, 모두 저희 반 급우들의 따뜻한 마음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좁은 마음에 우리 반이 우승을 했으면, 하고 나름대로 바라기도 했지만... 저희 반 급우들은, 같은 학우끼리 경쟁하는 것은 심히 내키지 않는 일이라고 말을 하더군요. 결국, 저희 반 학생들은 다른 반 학생들을 응원하고, 또한 운동회를 나름대로 즐기는 것으로 이번 운동회를 마쳤습니다. 비록,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생님.“ 담임 선생님은 감동한 얼굴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아니, 그게 정말인가?” 아이들은 고개를 푸욱 숙이고 너나 할 것 없이 담임 선생님의 눈길을 피했지만... ....그게 담임 선생님의 눈에는 또 겸손한 모습으로 보였나 보다, 담임 선생님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리시며 나가시기 전 내게 돈까지 쥐어주시며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음료수라도 사 주라고 당부하셨다. 정말 존경할 만한 선생님이시다. 아이들에게 음료수 하나씩을 사서 돌리자 아이들은 기가 살아 너나 할 것 없이 왁자지껄 떠들어댔다. 나는 영훈이들의 몫으로 따로 챙겨둔 음료수를 한 쪽에 놓았다. 그러자 공주님이 슬그머니 내 옆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이렇게 음모와 모략이 날뛰는 운동회는 처음이야.” ...걱정마, 나도 처음이니까. 음료수를 다 마신 몇몇 아이들을 손짓으로 부르자, 아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반장, 왜 불렀어?” “아아, 이것들 좀 들어 줘라.” 상품들을 가리키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아무 말 없이 상품들을 들어올린다. 공주님이 내 옆에서, 왜 그래? 하고 질문을 던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이끌고 2학년 9반으로 올라갔다. 9반은 조용했다. 9반의 문은 모두 닫혀 있었지만, 닫힌 문 너머에서 9반 학생들과, 또 담임인 만주 벌판이 얼마나 상심해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문을 몇 번 노크한 후, 문을 열자, 제일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만주 벌판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누구야~! 어, 어, 넌?!” 경악한 얼굴로 나를 손으로 가리키는 만주 벌판에게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실은, 9반에 이번 운동회 상품을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무슨 헛소리야!” 만주 벌판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도, 만주 벌판이 나름대로 착한 선생님이신게... ...나였다면, 누가 내 앞에 서서 이렇게 나불거리면 벌써 머리통을 후려쳐 버렸을 것이다. “사실, 오늘 운동회의 우승은 누가 보아도 9반의 것이었습니다. 비록 여러 우연적인 요소들로 인해 우승을 하지 못하게 되었지만...“ 물론, 9반이 우승을 하지 못하게 방해한 많은, 실은 대다수의 요소들이 우연이 아니긴 했지만... 나는 만주 벌판에게 다가가, 만주 벌판을 존경과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려 애썼다. “...일전에, 선생님께 여러 가지 실례되는 말씀을 드렸던 것,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철없는 마음에...“ 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반짝이는 눈으로 만주 벌판을 응시했다. “그래도 언제나 운동장을 누비는 선생님의 멋있는 모습을, 계속 존경하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국어 선생님이 곧잘 하시는 뺨 붉히기를 했다면 완벽했겠지만... ...만주 벌판은, 이만큼으로도 충분히 만족한 듯,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하하, 아니 무슨... ...그래, 생각해 보면 내가 철이 없긴 했지. 그런데 네 이름이 뭐라고?“ ...왜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봐라, 얼마나 단순한 선생님인가. 9반에 상품을 넘기고 의기양양하게 교실로 돌아오는데, 공주님이 허탈한 얼굴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한 마디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너를 어쩌면 좋으냐.” ...그건 오히려 내가 공주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뭐, 여담이지만, 축제 때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몇몇 특정 인물들의 사진을 팔아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던 사진부는, 익명의 정보를 받고 급습한 선생님들에 의해 단체 기합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 학교 매점에는 오뎅과 떡볶기가 추가 되었다. 또한 민섭은 양호 선생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우리 학교의 숨은 실력자로 다른 이들의 두려움을 샀으며... (본인은 상당히 괴로워했지만 말이다.) ...우리 반은, 학생회를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2주에 한 번씩, 공금으로 점심시간에 간식을 사 먹게 되었다. -28- “은성아? 나 민섭인데, 지금 다른 사람들이랑 너네 집으로 가고 있거든. 오늘 새해 첫날인데, 모두 모여서 어디 놀러가자.“ 나는 잠이 덜깬 부스스한 얼굴로, 잠시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국번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지랄한다. 지금 갈 테니까, 준비하고 있어.“ 내 말을 도중에 끊으며 싸가지없게 말하는 이 목소리는...도연이다. 정말로, 모두 모여 있나 보다. 나는 그대로 핸드폰의 종료 버튼을 눌렀다. 이건 꿈일 거야. 그래, 이건 꿈이야. 안 그렇다면, 새해 첫날부터 이런 전화가 걸려올 리가 없지. 나는 지금 악몽을 꾸고 있구나... 나는 잠에 취해 헤실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다시 침대위에 누웠다. “야, 일어나. 어떻게 하지? 아무래도...“ “그냥 일으켜 세워.” “은성아, 일어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시끄럽게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잠 좀 자자. 나는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 일어나려나 본데?”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고 내 위로 올라탔다. “은성아, 일어... 엉?” “그냥 깨워도 일어나.” ...이 목소리는, 영훈이다. “은성아, 일어나라니까?” ...나는 민섭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뭐야?” 잠이 덜 깨서인지, 목에서는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러가자.” “싫어.” 말하고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몸이 뜬...다? “가자.” “...내려주시면요.” 나는 겨우 눈을 뜨고, 체념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왜, 국어 선생님이 여기에 계시는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씩 정신이 들기 시작한다. 나는 곰곰이 방금 상황을 생각해 보다가,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대체 왜 남의 집에 멋대로,,,!!” “아, 은성아. 어서 준비하거라. 친구들이 기다리잖니.“ 아버지는, 국어 선생님과 다른 녀석들을 앞에 놓고, 무언가를 즐겁게 이야기하시다가 나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셨다. “...내가, 책임감 없는 아이로는 키우지 않았는데, 애가 건망증이 심해서요.” 나를 꾸짖듯이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옷을 걸쳐 입었다. 나갈 준비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도연이 내 팔을 붙잡았다. “...뭐야?” 나는 힘없이 물어보았다. 대체 이건 뭐야?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불법 침입에, 그리고 납치... “어? 나가려고?” 그 때, 작은 형이 방문을 열고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나는 형의 열려진 방문 사이로 얼핏 보이는 지성이의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잘 놀다 와라.” 형은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눈 인사를 건넨 후, 부엌으로 들어갔다. ...지금 그 광경은 도대체... ...하다가, 나는 더 이상 깊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더 이상 고민하기를 포기했다. 대신... “그러니까 어디로 가는 거냐구~!” “...글쎄, 일단 따라오라니까.” ...따라갈 만한 상황이 되어야 따라가지...! 대체 이런 밤에 어디를 간다고 하는 건지... 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없는 절규를 지르다가... ...결국, 눈을 감고 자기 시작했다. “일어나 봐.” 흔들어 깨우는 손에 의해 겨우 눈을 뜬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끌려 차에서 내렸다. “...여긴...”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대체 왜 새해 첫날, 그것도 한 밤중부터 나가자고 했는지 의아해했더니... 그 난리를 쳐서 겨우 온 곳은, 바닷가였다. “자, 그럼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자.” 국어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차 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곧이어 내 손에, 보온병에서 막 따른 차가 담겨져 있는, 따뜻한 컵 하나가 주어졌다. ...지금 이거 먹고, 화 풀라는 건가, 이 사람은. 나는 옆에서 나를 기대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공주님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하여간... “밤하늘이 예쁘지, 응?” 예전, 언젠가 민섭이 녀석이, 이와 비슷한 발언을 했던 것도 같은데... 나는 밤하늘을 바라보다가,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 하늘은, 내가 있던 곳과는 달리, 백금색의 별들로 수 놓아져 있었다. ...이게,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그리고 수많은 책들에 나왔었던... ...그 전설의 동화 속 밤하늘이라는 것인가. 어쩐지, 기분이 감상적이 되기 시작했다. “어때? 괜찮지?” 영훈이 나를 바라보며 슬쩍 말을 던진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도연은 돗자리를 꺼내 자리에 펴기 시작했다. 국어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돗자리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으면서,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기뻐해라. 2학년 때는, 내가 은성이 네 담임이 되게 해 달라고 말 해놨으니까.“ ...뭘 기뻐하라는 건지, 하여간 국어 선생님은 생뚱맞은 소리를 곧잘 하곤 한다. “그건 권력 남용 아닌가요?” 영훈이 퉁명스럽게 시비를 걸 듯 말하자, 국어 선생님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맛이라도 없으면, 사람들이 권력을 원할 이유가 없지.” ...하여간, 어리다 어려. 나는 웃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영훈과 국어 선생님을 보면서,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손에 든 컵을 입가에 가져가 홀짝거리면서 마셔 보니... ...향긋한 이 내음은, 잘 끓여진 녹차였다. “...네 그 표정을 보니,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진다?” 영훈이 생긋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도연이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뭐, 귀엽잖아.” ...아무래도, 내가 졸리긴 졸린가 보다. 자꾸 환청이 들리는 것을 보면. “나랑 바꿔 마시자.” 공주님이 내가 미처 거절할 사이도 없이, 내 손에서 종이컵을 빼앗아 자기가 마시기 시작했다. “어엇~!” 민섭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공주님이 마시고 있는 녹차잔을 바라보았다. ...민섭이 녀석, 녹차가 마시고 싶으면, 지금이라도 따라 마시면 될 텐데, 상처받은 얼굴을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나는 검은 바다와 그리고, 흑청색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곳은, 바람의 향기부터가 틀리다. 육지와는 무언가가 틀린, 이질적인.... ...그래, 이 것은, 방랑의 내음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분이 묘하다. 그렇게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엇~!” 꾸벅꾸벅 졸다가, 옆에서 들리는 외침 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화들짝 눈을 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직접 보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 순간은 영원처럼 느껴졌다. 압도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거대하면서도 부드러운 자연의 앞에서,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서, 그저 눈만 깜박였다. “...1살 더 먹은 것, 축하한다.” 국어 선생님의 부드러운 말에 나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고개를 위로 치켜들자, 국어 선생님이 나를 향해 싱긋 웃는다. 어쩐지, 그 미소가 친숙하게 느껴져,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아. 어서 커라.” 옆에서 영훈이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야, 너랑 나랑 동갑이야. 그런데,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민섭이나, 도연 녀석은 대체 무엇일까. “은성아, 놀자~!” 저 멀리서 공주님이 미친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나를 불렀다. 하여간... 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모래사장 위를 걸어갔다. 걸을 때마다 푹푹 빠지는 모래가, 신발 안으로 들어가 발가락을 간지럽힌다. 문득 주머니에서 들리는 벨 소리에,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냈다. [새해 즐겁게 보내.] 짧은 문자 아래, ‘이훈’ 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커다란 파도 하나가 일어나서 모래 사장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맥주거품처럼 하얀 포말들이 일어나 바닷물을 아름답게 치장한다. [너도.] 나는 짧게 문자를 적은 후에, 이훈에게 송신시켰다. 핸드폰을 닫고, 나는 조금은 어색하게, 즐거운 표정으로 바다와, 그리고 나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어, 그런데 저 사람들은...? 나는 나와 같이 온 일행들 뒤에서 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뒤늦게 발견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설마...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저 위에 버스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주머니에 돈이 얼마가 있더라? 나는 나를 향해 느긋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후... ...그대로 뛰기 시작했다. 이렇게 바닷가에서 노는 것도 좋지만, 볼 것도 다 봤으니, 이만 집에 가서 자야겠다. 설마하니, 내가 도망쳤다고 또 집으로 찾아올 리는 없겠지. 뒤늦게 죽일 듯한 기세로 나를 쫓아오는 도연을 피해, 나는 황급히 막 떠나려고 시동을 걸고 있는 버스로 올라탔다. 버스에 올라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주저앉자,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움직이는 버스 너머로 황당해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들이 보인다. 나는 그 얼굴들을 향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버스비를 내고, 자리에 앉아, 나는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마에 마주 닿은 창문이 차갑다. 앞으로도, 나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이를 먹겠지. 그리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나는, 그 때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깎아가면서 스스로를 작게 만들면서,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하고 계속해서 헤매이겠지. 이렇게 작아지는 것은, 진짜 나를 조각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나는 이렇게 작아져 결국 없어지게 되는 것일까. 나는 굴러다니는 나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물어보며, 고민하고, 또한...웃을 것이다. ...나이를 먹은 것을, 축하한다고 선생님은 말했다. 내 친구라는 이름을 가진 녀석들 또한 어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언제나 두려웠었다. 나는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또한 무언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원한다는 것만으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어렸을 때 이미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꿈만을 바라보지 않아도, 현실만을 바라보지 않아도, 실은 괜찮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주위에 있는 많은 손들에 의지해, 계속해서 앞을 보고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것일 수도 있다. 아직도, 내게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려오지 않는다. 그 이유가, 내게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없기 때문인지, 또는 대답을 들을 준비가 안 되어서인지는, 역시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오늘도 다른 것들에 떠밀려 여기저기를 굴러다닌다. 내 주위에는, 나와 같은 돌멩이들이 많이 있고, 또 작아지는 내 자신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내 돌가루를 묻혔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너무 서둘러서 나 자신을 바꿀 필요는 없겠지. 내가 달라지면, 서운해 질 것이라고 말해 주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 나이를 먹은 것을 축하한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내 옆에 존재한다. 그것만으로도, 이제까지 굴러다니며 닳아진 내 모습이 보상되었다고 느낀다면... 나는 작게 미소지었다. 아직도, 조금은 외롭고, 또 그보다 더 많이 쓸쓸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것은 내 스스로가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더 많은 곳을 굴러다니면서, 알아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는 언젠가 바위가 될 수 있을까? 핸드폰에서 연이어 착신음 벨소리가 울렸다. 나는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싱긋 웃으면서 통화 버튼을 눌러버렸다. “야, 너 지금...!!”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도연을 향해 느긋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냐?” “...뭘?”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 챈 도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 집, 새해 인사차 시골로 내려간다. 나도 따라가기로 했거든. 나중에 개학 한 후에 보자.“ 휴대폰 너머로 표현 할 수 없는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도연의 대답을 듣지 않고 먼저 전화를 끊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여러 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다니며... ...나 스스로를 좀더 깍아 보자. 작아지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고... 깍여진 내 가슴 안에서 보석이 나오던, 또는 내 위에 다른 무언가가 얹혀져 내가 바위가 되던... 그것은 모두 나중의 일일 뿐이다. ...나는 돌멩이이다. ------- 안녕하세요, zina 입니다. 우선 부족한 글을, 지루함을 참고 여기까지 읽어주신 고마우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돌멩이입니다 완결을 놓고 굉장히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사실 많은 분들이 커플링을 원하시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돌멩이는 처음부터 누구와도 커플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글이기에, 저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하더군요.^^;; 결국, 완결은 이렇게 내게 되었습니다. 이 완결에 화를 내실 많은 분들께 변명을 한 가지 하자면... 더 이상 쓰면 20금으로, 발랄 청춘 학원물이라는 타이틀을 달 수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먼 산;;) 이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내셨으면 합니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